Ⓡ 5장. 보다 중요한 것. (3)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Ⅲ
“그러니까 처음부터 반대했던 겁니다. 인정에 이끌리지 마시라고.”
변종 아말에라가 발견되자 보건관련 부서부터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들이 사는 곳은 도시선이고 인구밀집지역이다. 변종이 퍼진다면 로사가 분석한다 해도 치료제 개발에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격이라 정부 내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 앞서 아나이트 원수가 말한 대로, 황제가 딸의 첫 제안을 무시할 수 없어 그냥 통과시켜준 것이 아닌가, 그런 의문도 관료들 사이에서 이미 돌고 있었다.
물론 의료용 란포르를 위시로 한 방역체계는 강력하니, 제국 안에 퍼지는 것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장차 황제가 될 사람이 신민을 우선시하지 않았음은 꽤 문젯거리가 되었다.
아말에라는 몰라도 지상인 수용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었다. 몇몇 열성적인 언론에 의해 결국 전말이 알려진 그 혼란은 상당했고, 특히 수용 도시인 세이크의 주민들은 굉장히 투덜댔다.
볼록 렌즈를 닮은 공중도시들은, 크기는 각자 달라도 구조는 거의 동일해 상반부과 하반부로 나뉘어져 있다. 이 중 상반부는 사람이 사는 거주 및 상업 구역과 공기정화시스템의 일부인 수림으로 이루어져, 자연 상태 그대로의 도시에 최대한 가깝게 꾸며져 있다.
반대로 하반부는 동력로 및 수경재배농장과 육류배양공장, 공산품 제조 공장, 그를 보관하는 창고 등으로 이루어져 상반부의 거주민을 위한 물자를 제공한다.
지상인들은 이 창고 중 하나를 비워 수용했다. 상자형의 임시 거주지를 마련하고, 매일 식료품과 의복을 내어주며 소형 인형병기인 알로프들이 물품 배급과 경비를 도맡고 있다. 의료용 론비샤도 일부 배치되어 건강도 살피고 있으며, 매일 그들의 언어로 번역한 영상을 틀어주어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친 보살핌이라는 의견은 처음부터 불거졌고, 여기에 각지의 연대서명까지 들어와서 황제와 황태녀, 두 사람의 골칫거리를 더했다.
아샤르에도 후의 지구의 인터넷과 같은 체제가 있어, 정보교환과 커뮤니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정보량이라면 로사가 압도적이지만, 민의가 모이는 커뮤니티라는 점에선 큰 의미가 있다.
그 일환으로, 정부 게시판에는 국민이 정책에 대한 이의 제기를 할 수 있는데, 국민 1할이 공감표를 던지면 정부에서도 반드시 입장을 표명하도록 되어 있다.
주제는 당연히 반대파의 입장이었고, 제시 4일 만에 현재 투표가 가능한 성인 1,200만 중 누적 표가 50만 표를 넘었으며 가파르게 상승 중이었다.
철저히 실명제로 운용되는 만큼, 의사표시를 하지 않은 잠재 반대파는 열 배를 호가한다. 반대로 비공감표는 3할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는 곧 정치적 부담이다.
대 지상인 지원 책임자이자, 정부 반대파의 일원인 복지상서가 보다 못해 건의했다.
“반대가 너무 심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전부 죽이자고? 그럴 거면 잡아오지도 않았다.”
황제는 미간을 좁혔지만 상서는 멈추지 않았다.
“죽이자는 게 아닙니다. 어딘가의 자원기지에 몰아넣으면 됩니다. 굳이 도시 안으로 들일 이유가 없잖습니까? 게다가 지상인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고요.”
과거에 사용했고 미래를 위해 만들어둔 자원기지가 우주에 다수 있다. 공기를 주입하고 약간만 손을 보면 사람이 살 수 있을 수준까지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탐탁찮았다.
“소요는 조금씩 가라앉고 있지 않은가?”
미지의 존재에게 끌려왔지만 먹을 것과 몸을 감쌀 모포를 주고, 며칠이 지나자 이들이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는지 소동은 차츰 가라앉았다. 덕분에 황제와 황태녀는 조금 숨통이 트인 참이었다.
“하지만 반대표가 이렇게 많고, 조만간 조정의 입장을 발표해야 합니다. 게다가 지상인 추방에 대한 건의도 덧붙여져 역시 지지표가 급상승 중이고요.”
“즉, 우리 신민들은 그만큼 저 지상인들이 싫다...?”
황제는 괴로운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하기도 힘들다. 스스로를 가둬놓은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그동안 지상의 야만성은 필요 이상 강조되어 온 것은 사실이니까.
체제가 굳건히 유지되기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하다. 흔들림 없는 제도, 그리고 뚜렷한 적이다.
전자는 로사가 책임지지만, 아샤르에 비견할 적은 세상에 없다. 바로 그 적의 역할을, 지상인에 대한 조소와 경멸이 수행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명 존중 차원에서는 이해한다고 쳐도, 병원균에 감염된 이들이 하필 공중도시에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적절한 이동 조치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추가 이동 조치가 있다면, 겨우 가라앉은 지상인들의 불안감, 그 불씨에 기름을 붓는 것이다.”
“그럼 이대로 국민의 불안을 방치하실 생각이십니까?”
“저들 이외에는 감염자가 없지 않은가?”
“전문가의 의견으로 말씀드리자면, 완벽한 방어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후 신민 중에서 감염자가 나온다면, 폐하의 치세에 큰 누가 될까 저어됩니다.”
일단 며칠 더 상황을 두고 보겠다는 황제의 말로 회의가 종료되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체력적으로 좋지 않은 황제는 피곤함을 감추지 못했다.
“며칠이라도 좀 쉬심이...”
딸의 걱정에 황제는 지친 웃음을 지었다.
“이럴 때 황제가 눕기라도 하면 말만 많아져.”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그냥 모른 척 했더라면, 아버지의 정치 인생에 시끄러운 오점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비가 결정한 일이라 하지 않더냐.”
아버지는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딸은 불안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너무 큰 문제를 만들고 끼어든 것은 아닌가. 5년 전에 비해 힘과 지식은 크게 늘었지만, 경험 면에서는 그녀는 아직도 몹시 일천하다.
이럴 때 칼스라도 있다면 마음이 편할 텐데...
귀찮게는 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당분간은 부르려 하지 않으려 했지만, 역시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불려온 그도 처음에는 긴장했지만, 주제가 정치 고민인 것을 알자 즐겁게 받아들였다.
...이런 것만 말해주면 얼마나 좋아.
“...반발을 살 만하군. 특히 예비 반역자 운운은 좀 심했어. 기왕이면 군주의 길을 토로하는 것이 더 옳았지. 나는 어떤 이도 죽이지 않으려는 자세다. 뭐, 그런 것.”
“...반대라는 거야? 나는 당신이 동조할 줄 알았어.”
“왜 그렇게 생각했어?”
“당신은 지상인도 죽이지 않았었잖아.”
“뭐야, 그럼 네 생각이 아니라 나라면 그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 찬동한 거야?”
칼스는 잠시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녀의 선량함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기뻐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착하다고 하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지 않을까.
이건 자기 생각이 아니라 그저 날 따라오는 그런 정도다. 언젠가는 스스로 빛나야 할 텐데, 이리 내 그림자를 자처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당신이라면... 사람을 죽이지 않을 거 아냐?”
뭔가 틀렸나. 그리 묻는 시선에 그는 대답했다.
“나도 죽였어.”
과거를 회상한 그는 무심코 얼굴을 찌푸렸다.
“100명의 무고한 이를 살리기 위해서라지만, 내가 죽인 병사는 그 열배를 우습게 넘어.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려서 죽인 거야. 이 차이야. 알겠어?”
“...잘 모르겠어.”
“희생 없는 세상은 없어. 그리고 군주는, 희생시킬 목숨에 매번 가치를 매겨야 하는 자리야. 그 책임 역시 온전히 덮어써야 하고.”
세리사는 침울했다. 그는 너그럽지만, 군주의 입장이라면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 말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칼스의 다음 말은, 그녀를 꽤 놀라게 했다.
“괜찮아. 설령 내가 결정했다 해도, 네 의견 쪽으로 갔을 테니까.”
“...어째서?”
“위험성은 있었다 해도 본국 피해는 없었고... 다수의 목숨이 걸린 결정을 쉽게 내린다면 그게 좋은 군주일까? 그러니 네 고민은 당연한 거야. 대뜸 소각부터 논한다... 그건 아니지.”
“군주 이전에 나는... 살리기보다 죽이는 것을 먼저 논한 것은... 그건 심하다고 생각했어.”
“탓할 일만은 아니지. 전문가인 신하들은 무엇보다 효율을 중시하니까. 네게 부족한 것은 신하들을 다루는 법이겠지. 방금 말했었지? 신하들도 사람이야. 장래의 황제에게 찍혔다고 생각하면 다들 기분이 어떻겠어?”
“그럴까...?”
어머니의 종족이다. 직접 접하기도 했고 그 이후로는 약간의 호의 정도는 품었던 탓에, 반대파들이 지상인들을 비하하자 자기도 모르게 발끈했었다.
칼스가 말했다.
“반대파들도 잘못은 있어. 황태녀가 슬슬 정치에 발을 들인다. 그런데 생명을 끊고 사람을 죽이는 것부터 가르칠 생각이야? 그리고, 황태녀가 처음으로 의견을 내놓았는데, 모자란 부분을 보완할 생각은 하지 않고 반대부터 하고 있어.”
“...역시 내가 좀 모자라 보여서?”
“그보다는, 줄 위에 놓고 한번 흔들어 보는 거지. 구중궁궐의 황녀였다. 실제 정치에서는 어디 어떤가. 그런 거 아닐까 해. 하지만 신하가 차기 군주를 이렇게 얕보는 건 안 될 일이지. 폐하께서 반대파들을 묵살하신 건 이 점도 크게 작용했을 거야.”
역시 얕보이는구나. 그녀의 침울함을 덜어주듯 칼스가 웃었다. 모처럼 보는 시원시원한 미소다.
“처음에는 다들 그런 법이니 신경 쓰지 마. 그들도 앞으로 모실 군주의 자질 정도는 알고 싶을 거 아냐. 그리고 이것으로 좀 알았겠지. 아버지는 아파도 아직 강력하고, 그 딸도 그냥 도장만 찍어줄 위인이 아니란 것을. 결과적으론 잘된 편이야.”
그가 지지해주자 기분은 몹시 나아졌다.
“그리고, 장래성에서는 더 점수를 줄 수 있어. 지상에 대량학살병기를 쏘는 것을 주저 없이 용인했더라면, 미래의 황제의 관용과 마음 씀씀이라든가, 그런 걸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점수를 잃었을 수도 있어.”
“하지만 지금, 쓸데없는 위험을 불러 일으켰다고 사람들이 난리야...”
타인의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예상 외로 심적 부담이었다. 공인들의 자살률이 일반인보다 훨씬 높은 것도 이런 이유다. 그만한 위치에 오른 만큼 자부심도 있기 마련인데, 친구 사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적나라하고 냉정한 평가는 훨씬 아프게 다가온다.
하지만 칼스가 거듭 위로했다.
“원인을 따지자면 이쪽의 실책이야. 그러니 지상인들은 더더욱 죄가 없지. 이건 그 책임을 지기 위한 위험 감수야. 사령장관을 위시한 반대파들은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생각이 모자란다고 할 수 있을 뿐, 마음이나 열정 자체는 비난할 수 없어. 그러니 그들을 너무 미워하거나 경계하지는 마.”
“으응.”
역시 죄 없는 이를 죽일 수 없어. 그리고 그걸 가르쳐준 사람은 당신이야. 그녀는 그 말을 꿀꺽 삼켰다.
“아무튼...”
잠시 생각한 칼스가 말했다.
“변수가 없다면 아말에라 문제는 여기서 종료되겠지. 방역은 충분하니 더는 퍼지지 않을 거야. 다만 이대로 반대파가 물러나진 않을 거야.”
“어째서...?”
“사태가 간단히 종료되면, 이후 반대파들은 이렇게 사소한 일에 지나친 저항을 했다, 그리 평가되어 나름 책임을 질 수도 있거든. 설령 그렇지 않다 쳐도, 책봉 1년도 되지 않아 아직은 견문만 해야 할 처지의 황태녀가 이번 일을 기화로 국정에 더 간섭하면, 이건 저들의 입지를 크게 흔드는 거거든. 관료제란 생각보다 딱딱한 것. 작은 위협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겠지.”
“...그럴까? 하지만 내가 그러지 않을...”
“그냥은 안 믿을 걸. 이미 선을 한 번 넘어버린 너니까. 그러니 최소한 네게 반성문이라도 받아내던가, 며칠이라도 근신 처분 정도는 요구할 거야.”
“그럼 써야겠네...”
글 솜씨는 자신 없지만 할 수 없다.
하지만 칼스가 손사래를 쳤다.
“어딜. 여기서 밀리면 네가 더 얕보여. 그러니 여차하면 폐하께서 칭병을 하시거나, 아니면 내 아버지들까지 끌어들여 널 지키려 하실 거다. 그렇게 신경전이 벌어지면, 네게 반대하는 세력뿐만 아니라 동조하는 세력도 전면에 드러나겠지. 그럼 그들을 중용해 본격적으로 네 세력을 만드는... 그런 것도 생각하고 계실 거야.”
“내 세력...?”
“넌 공부회가 없잖아. 그러니 이번에 골라봐야지. 이번 일은, 폐하께서 단순히 네 선심에 호응하신 것만은 아냐. 약간의 분란을 통해 신하들을 걸러내는, 그런 정치적 판단이라고 보아도 좋겠지. 네 아버지는 절대로 허술하지 않으시다고. 안심해도 좋아. 하하.”
칼스는 웃어버렸지만 세리사는 기가 질렸다.
아버지는 이런 복잡한 일을 수십 년이나 해 왔단 말인가. 수많은 자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최대한 공감을 얻는 정책을 찾고, 말을 듣지 않는 자는 권위로 눌러가면서 때때로 그 반발을 견뎌냈다.
자신이 과연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새삼 겁이 덜컥 났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공포에 휘둘리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당분간은 우리가 만날 일을 만들지 말아야겠어.”
“응? 왜? 무슨 일?”
“...내가 동궁 출입이 잦은 것은 사실이야. 그것도 단둘이 만나는 경우가 너무 많아. ...의심을 살 수 있어.”
“황태녀가 왕세자를 부르는 것이 뭐가 어때서?”
“조금은 연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야. ...네 시녀장은 눈치를 어느 정도 챘다고 했지?”
“으응... 그런데?”
“내 쪽에도 하나가 있어.”
“...뭐?!”
가슴이 내려앉은 그녀에게 칼스가 낮게 말했다.
“입은 무겁다고 생각해. 다만, 이렇게 하나 둘씩 눈치를 채어갈 정도면, 역시 우리 처신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야 해.”
“...정말 당분간 동궁 출입은 끊을 거야?”
약속은 했지만 단 며칠 사이에도 굉장히 괴로웠다. 하지만 그는 나 없이도 아주 잘 먹고 잘 살지.
너무나도 불리한 입장에서 싸우고 있다.
“그래. 그리고 가능하면 유키나를 끼워서 보자.”
“유키나는 학교에 갔잖아? 방학까진 두 달은 족히...”
“어쩔 수 없지. 두 달은 금방 가. 너도 이제 어른이니, 그 정도 참을성은 있어야겠지?”
“...알았어.”
“그럼 난 간다.”
한동안 못 볼 그가 떠났다. 아쉬움에 자리만 지키던 그녀에게 아버지의 호출이 들어왔다.
다시 만난 아버지는 기쁜 듯 웃고 있았다.
“좋은 소식이다. 제국 인권협회 및 익명의 부서에서, 나라의 근본이념을 지켜주신 황태녀께 감사드린다고 전해달라네. 앞으로도 지지와 성원을 약속한다고.”
거듭 가슴을 쓸어내린 세리사가 문득 중얼거렸다.
“다행이군요. 역시 그렇게 흘러가는군요.”
“...뭔가 알았다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사실은...”
세리사는 칼스가 말한 것을 부황에게 전했다. 잠시 웃긴 했지만 황제는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녀석. 사태를 잘 짚었네. 내가 가려던 방향도 거의 다 읽어냈고. ...새삼 생각하지만 엄청난 놈이야.”
“저는...”
세리사는 조금 운을 띄울 기회라 생각했다. 칼스와 자신의 격차를 벌린다면, 나중에 그가 제위에 올라도 유리할 테니.
“부끄럽고 자신이 없어요. 저는 왕세자의 발끝에도 못 미쳐요. 과연 괜찮은 건가요?”
“확실히, 재능만이라면 칼스가 너보다 훨씬 위겠지.”
자식처럼 생각했다 해도 결국은 친자식은 아님에도, 황제의 칭찬은 세리사의 예상보다 훨씬 후했다.
“온정과 냉철함을 모두 갖추고 있고, 문무 양면에서 아주 유능해. 정치의 속성도 잘 알고 전반적인 정신력도 강해. 이건 너도 인정하고 배워야 하는 부분이야.”
“제가 모자라서... 속상하지 않으세요?”
“누가 그러든?”
황제는 달래듯이 말했다.
“세리사. 네 불안은 안다. 명백하게 자신을 넘는 사람이 턱밑에 있으니 싫어도 비교 당하게 되겠지. 그러나 군주가 재능만으로 되는 자리는 아니다.”
“그럼요?”
“만인을 누를 수 있는 정통성과 그에 따른 지지, 그리고 사람을 알아보는 눈과, 그들을 믿고 쓰고 사랑하고 달래는 자세도 중요한 거야. 그런 점에서는, 저 대단한 칼스조차도 네게 뒤처지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단다. 너무 자신감을 잃지 마라.”
“그래도 결과가 이렇잖아요...”
“사령장관도 맞고 너도 맞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함부로 책한다면 그것만 야단칠 거다. 의견이 다른 신하들, 그 충돌의 조정도 중요한 일이지. 그렇다고 네가 딱히 명분에서 밀리는 것은 아니니, 책임이 발생한다면 애비가 책임지면 된다. 신경 쓰지 말거라.”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무슨. 전에도 말했지만 너는 착한 아이다. 힘들고 어렵다면 칼스와 유키나가 도와줄 거다. 너는 그들을 인정하고, 믿고 의지하고, 또 힘을 빌리면 돼. 그러니 일부러 냉혹해지려고 하지 말고, 지금 그대로 경험만 쌓아다오. 애비도 처음에는 미숙했느니라.”
“...노력하겠습니다.”
“방식은 달라도 어느 나라든 시대든, 통치의 바탕은 인정과 인덕이 아니면 안 되느니라. 완벽하지 못한, 그런 사람이 사는 세상이니 사람이 가장 우선이어야 하고, 완벽하지 못함을 메울 수 있는 것은 뛰어난 기술과 높은 학식이 아닌, 인정과 너그러움뿐이기 때문이야. 아비가 너에게 남기는... 황제가 황태녀에게 남기는 가장 큰 가르침이라 생각하고, 부디 항상 명심하거라...”
세리사는 비로소 안심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나에게는 칼스와 유키나가 있어. 의지할 수 있어.
하지만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어 흠칫했다. 만약 칼스를 떠나보내는 날이 온다면, 자신은 과연 그 후로도 여전히 그를 믿고 의지할 수 있을까?
혹여 그가 다른 이와 행복한 모습에... 갑자기 미쳐 버리지는 않을까.
그렇게 그를... 모든 면에서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며칠 동안 호재와 악재는 번갈아 왔다.
인권협회에서 황제의 결정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면, 병리학학회에서는 반대 성명을 냈다. 칙명에 힘을 보태고자 두 현왕궁에서는 지지성명을 냈었고, 반대로 제국 의회에서는 귀족 의회인 상원과 평민 의회인 하원이 모처럼 한 목소리를 내어 반대했다.
덕분에 정국(政局) 그 자체는 말도 못하게 시끄러워진 가운데, 전혀 뜻밖의 사태가 일어났다. 그동안 꾸준히 반대의사를 표명하며 조정에서 물러서지 않은 이들, 즉 정부에선 복지상서와 교육상서, 군부에선 삼군사령장관이 초강수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흔하지만 효과가 좋은, 이른바 단식 투쟁이었다. 20명이 넘는 고위 관료와 군인들이, 황궁 정문 앞에 자리를 펴고 앉아 간신히 물만 마시고 버텨 버린 것이다.
다른 이들은 그렇다 쳐도 60줄에 접어든 사령장관이다. 물론 무골(武骨)이고 나이에 비해 정정하다고는 해도, 40년을 봉직해온 노장군이 시위를 하는 셈이라 모양새가 심히 좋지 않다.
“해산명령도 거듭 듣지 않는다는 건가?”
황제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국민의 저항권도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또한 차기 후계자에게 정치 실습을 시키기 시작한, 조금은 불안하고도 매사가 조심스러운 시기다. 늙은 장군을 강제로 끌어내기라도 한다면 문제가 생길 것이다.
총재도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도 몇 번이고 말했습니다만, 그냥 말로는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 분명하다고...”
황제는 혀를 찼다. 삼대장군은 황제가 직접 임명하니 당연히 측근이다. 특히 아나이트 원수는 충직하기 그지없는 군인이었다. 14년 전의 조치는 억울할 만 했지만, 아내를 잃었음에도 그는 일언반구 불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참지 않겠다는 건가.
반대파를 힘으로 누를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동조하는 세력을 모아 대항시키면 손 안대고도 코를 풀 수 있다. 저들도 그걸 읽었는지, 그냥 밀리느니 초강수를 두자고 판단한 모양이다.
사태가 종료되면 내각 개편이 한 번은 있을 터. 명분이 비슷한 만큼, 미리 이렇게 해 두면 황제도 자신들을 함부로 자르긴 힘들 것이란 그런 판단일 것이다.
“제가... 나가볼까요?”
느닷없는 딸의 말에 황제는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러면 서로 불편하잖니.”
“하지만 끌어낼 수도, 또한 요구를 들어줄 수도 없습니다. 설득할 사람이 필요한데, 그 분들이 오질 않겠다 하고 아바마마는 옥체가 미령하시니... 제가 가면...”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느냐...?”
세리사의 결정에도 이유가 있다.
자기가 여기서 숨어버린다면 비겁자 소리나 들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나이트 원수도 개인적인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얼굴은 비추고 싶었다.
거듭 간청하자 황제는 별 수 없이 허락했다.
“알았다. 하지만 정 설득이 힘들거든 바로 돌아 오거라. 네 능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설마 사령장관이 황태녀에게 막말을 하진 못할 터. 오히려 아샤르 2인자가 직접 그 말을 들어주려 나섰다면 모양새는 날 수 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황궁 정문 앞에는 대광장이 있다. 일반인들이 경조사를 축하하거나 정치적 시위를 할 때 쓰인다.
운대(雲臺)라고 일컬어지는, 황제의 옥좌를 놓고 신민을 대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단 바로 아래, 이미 20여인의 사람들이 꿇어앉아 있었다.
복지상서 유르켄과 교육상서 지아페르의 두 상서와 그 직하 관료들이 정부 인사였다면, 군부로는 삼군사령장관 아나이트 원수를 필두로 오베르, 바네타, 브제티의 3명의 대제독이자 함대사령관들이 있었다.
오베르는 아나이트 원수와 같은 함대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온 초로의 장수였고, 바네타와 브제티도 마찬가지인 유능한 장수들이다. 말하자면 군부 내의 아나이트 패밀리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한 목소리로 황제 폐하를 외쳐대니, 드넓은 광장이 제법 진동했다. 물론 운대 부근은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도록 구조를 짜놓았지만, 3일 굶은 사람들의 목소리치고는 다들 너무 팔팔하다.
과연 설득이 가능할까. 세리사는 상당히 주춤했다.
한편 황태녀가 직접 나오자 대부분 놀란 표정이었다.
“어찌 이리 직접...”
“고생이 많으십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지만 이미 대립각은 팽팽했다.
한 편은 다음 황제, 한 편은 오래도록 봉직한 경험 풍부한 자들이다.
어려운 싸움이 될 터. 세리사는 마음을 다잡았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예상대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 난리법석. 졸지에 집안에 원숭이를 들이고 바나나를 줘요.
하지만 황제는 단호하고... 과연 그는 바른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또 그녀는 입배틀이 약한데 얼마만큼 대처할지...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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