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가려면 가진 것 다 내놔!!
자이르왕국은 4명의 소드마스터 중 3명을 잃었으며, 왕국에 단 1명 밖에 없는 7서클의 고위 마법사까지 잃었다. 그래서일까 제시카의 입에서 자이르왕국에 대한 암울한 예측이 나왔다.
“자이르왕국은 주군의 손에 패망하겠군요.”
“글쎄 그건 두고 봐야 할 문제지. 난 이 전쟁까지만 도와주고 더 이상 관여할 생각이 없으니까.”
제시카가 나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다. 마치 조국을 살려 달라는 듯한 그런 표정이다.
그런데 또 까놓고 보면 원수가 정권을 잡고 있는 곳이니 그러지도 못하는 사면초가에 빠진 상황인 것이다.
멀리서 로엘후작과 클라리나가 헉헉 거리며 뛰어오고 있다. 아마도 프란시스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 같다. 오자마자 한참을 숨을 고르더니 땅바닥에 잠들어있는 프란시스 후작을 보며 이를 빠드득 갈아 댄다. 그리고 나를 보며,
“저, 총사령관님? 이놈을..”
“데려가세요”
나는 로엘 후작의 말을 자르며 한마디 하고는 뒤돌아 막사로 향했다. 제시카가 조용히 뒤를 따른다. 얼마쯤 가고 있는데 뒤에서 귀싸대기 때리는 소리와 걸쭉한 욕 소리가 들린다.
짝! 짝!
“일어나 이 개 잡놈아. 여기가 네 집 안방인 줄 알아?”
짝! 짝! 짝!
“어서 일어나지 못해? 너는 오늘 내 손에 뒈지는 거야. 이 잡놈의 새끼야”
나는 평상시와 전혀 다른 로엘 후작의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로엘 후작이 저런 욕도 할 줄 아는 건가..후훗~”
“주군?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마겐공작은 아마도 회군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원래 마겐공작은 지르크 산성 공략에 실패하고 병력이 절반으로 줄었을 때 회군을 거론했었습니다.
그런데 프란시스 후작이 극구 반대했습니다. 자신의 마법병단만 있으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마겐공작을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프란시스후작과 마법병단도 사라지고 더구나 3명의 소드마스터까지 잃어버린 지금, 마겐공작에게 남은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응, 차포가 다 떨어져 나갔는데 배겨낼 재간은 없겠지”
“네?”
“아니, 그런 게 있어. 제정신 박힌 인간이라면 회군할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말이야. 난 그냥 보내줄 마음이 없어”
“하옵시면?”
“하하, 머리 아픈 이야기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배고파서 죽겠다.”
“네”
제시카의 예상은 하루도 안 되어서 들어 맞았다. 마겐공작은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 협상을 타진해 온 것이다.
상황실에서 맞이한 사신의 이름은 토마스 백작이라 하였다. 후작들이 모두 죽어버린 터라 그나마 마겐공작 다음으로 작위가 높은 자라 하였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퇴각할 테니 쫓지 말아 달라는 것이냐?”
“그, 그렇습니다.”
“누구 맘대로?”
“네?”
“누구 맘대로 퇴각하겠다는 것이냐? 올 때는 니네 맘대로 왔지만 갈 때는 맘대로 못 가. 알았어?”
“조, 조건을 제시해 주십시오. 무슨 조건이든 수용할 용의가 있습니다.”
“조건? 너희는 이미 죽어있는 목숨이야. 나는 오늘이라도 당장 너희 진지에 쳐들어가 마겐공작 그놈의 목을 따 버릴 수 있어. 그리고 네놈들을 단 한 사람도 살려주지 않을 생각이야.”
나는 사신에게 최대한 겁을 줬다. 그래야 협상에서 더 유리해질 테니 말이다. 어차피 이 전쟁의 목적은 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국경 밖으로 몰아내는 게 목적이다.
지금 목적 달성이 눈앞에 왔지만 그래도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야 한다. 레온왕국도 국경선과 지르크 산맥 사이의 국토가 초토화되었으니 그에 대한 보상도 받아야 하는 것이 맞다.
“무, 무슨 조건이든 수용하겠습니다. 저희가 무사히 돌아 가게만 해 주십시오. 군주님”
‘군주님?’
“군주라는 표현을 쓰는 걸 보니 너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이냐?”
“네, 아사달국의 군주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이곳에 있는 아군 말고는 모르는 사실인데 말이야.”
“처음에는 저희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군주님의 손에 2명의 소드마스터가 단칼에 죽는 것을 보고 마겐공작님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의심했었습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비슷한 수준의 소드마스터를 단칼에 죽일 수 없다고 하시면서 그랜드마스터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소문으로만 들었던 아사달국의 군주님을 거론하셨습니다.
이후 첩보대를 총가동하여 현재 아사달국 내에 군주님이 안 계신다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아사달국은 어차피 레온왕국에서 독립한 나라이고 현재 레온왕국이 전쟁 중이므로 군주님이 아사달에 안 계신다면 있을 곳은 단 한 곳뿐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호오~ “
사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의 실력이 그랜드마스터라고 소문이 돈다는 것도 의아했지만, 그런 단편적인 내용을 가지고 이렇게 유추해 낼 수 있는 마겐공작이라는 인물에 대해 흥미가 생겼다.
“군주님, 저희가 돌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왜? 돌아간 다음에 또 침공하려고?”
“저,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이제는 그럴 힘도 없다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조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 일단 알았다. 우리끼리 상의해 볼 테니 너는 쉬고 있어라.”
“네, 부디 관대한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토마스 백작이 예를 취한 뒤 막사 밖으로 나갔다.
나는 상황실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지금까지 기다리던 순간이긴 합니다. 하지만 또 막상 이리되니 어떻게 해야 할지 잘 판단이 안 서는 것도 사실입니다.”
왕세자가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들어 댔다.
“하지만 저희도 전쟁을 지속하기에는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쯤에서 협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해리슨공작은 협상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 같다. 이후 몇몇 귀족은 계속 공격하여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은 이쯤에서 협상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럼 협상안으로 무엇이 좋겠습니까? 레온왕국도 피해를 많이 입었으니 그에 합당한 요구 조건을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가져온 25만 명분의 전쟁물자가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우선 그것부터 회수해야 합니다.”
하이샌드 백작이 의견을 냈다.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국토가 황폐화 되었고, 전쟁 초기 국경에서의 사상자 수도 적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금전적인 손해배상도 청구해야 합니다.”
발두스 백작의 의견도 있다. 그리고,
“재발 방지에 대한 조약도 맺어야 합니다.”
등등 여러 가지 협상안들이 나왔다. 나는 이들 모두를 수용하기로 하고 토마스 백작에게 협상안들을 들려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토마스 백작은 다시 사신으로 방문했다.
“저희 자이르왕국에서는 첫째로 가져온 전쟁 물자 모두를 레온왕국에 양도하는 것을 수용하였습니다.
둘째, 레온왕국에 대한 침략 행위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2억골드를 손해배상으로 지급하겠습니다.
셋째, 재발 방지를 위한 조약에도 서명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군마 5,000필을 양도하겠습니다.
위 사항에 대해 왕성으로 파발을 보냈으며 보상금과 군마가 오는 대로 바로 양도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전사한 저의 장병 10만 명의 시신을 넘겨준 것에 대해 마겐공작께서 군주님께 개인적으로 감사하다고 전해 달라하셨습니다.”
군마는 내가 필요해서 끼워 넣은 것이다. 이로써 근 1년 가까이 군마 때문에 고생하던 문제가 싹 사라지게 되었다. 아공간에 있던 전사자들은 전쟁이 끝나면 넘겨주려 했던 것이기에 그것으로 뭔가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이로써 레온왕국과 자이르왕국 간의 전쟁은 레온왕국의 승리로 종전이 되었다. 협상 조건으로 내세운 물자들이 도착하기까지 3주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여 기다려 주기로 했다.
그사이 나는 아사달로 잠시 돌아와 하벨 총리와 대규모 포로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지, 지금 포로들의 숫자가 22,000명이라고 하신 게 맞습니까?”
“네, 포로 22,000명에 소드마스터급 여기사가 한 명 있습니다.”
“소, 소드마스터라고요?”
하벨 총리가 어찌나 놀라는지 입에서 거품이라도 내뿜을 기세다.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소드마스터라면 어느 왕국에서든 후작급 대우를 받을 뿐 아니라, 하벨총리가 만나 본 소드마스터는 해리슨공작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런 엄청난 인물이, 그것도 귀한 여성 기사가 아사달로 오고 있다고 하니 기쁨을 넘어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벨 총리님. 제시카는 성격이 모나지 않은 아름다운 여성입니다. 아마 두루 잘 어울릴 겁니다. 그리고 우리 여군들 지휘관으로 아주 제격인 기사입니다.”
“아, 아름다운 여성이라고요??”
하벨 총리가 실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뭔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 그런 놈 아닙니다. 에휴~”
“제가 뭐라 했나요. 허험, 그리고 일국의 왕이 왕비를 여러 명 두는 것은 흉 될 것이 아닙니다.”
“뭐라는 겁니까? 지금, 말 같지 않은 소리 그만하시고요. 혹여 아이린에게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험, 아, 알겠습니다. 군주님”
“아무튼 포로들은 오는 대로 바로 공사 현장으로 배치하시고요. 제시카는 여군들 지휘관으로 발령 내서 근무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군주님”
“저는 이만 돌아갈게요. 3주 후쯤에나 올 것 같아요. 군마도 5,000필 구했으니 미리 마구간 같은 시설을 만들어 놓으면 좋을 것 같아요.”
“휴아~ 군주님은 통이 커도 너무 커서 따라가질 못하겠습니다. 허허”
하벨 총리와 회의를 마치고 다시 텔레포트로 지르크 산성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약 3주가 흐른 뒤, 자이르왕국에서 배상금과 군마, 그리고 전쟁 물자가 양도 되었다. 그리고 마겐공작과 12만 명의 자이르왕국군은 왔던 길을 되돌아 국경을 넘어 철수를 완료했다.
포로로 잡혔던 기사들은 모두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다만 나에게 치료받고 부상에서 회복된 일반병사 22,000명과 제시카는 5,000마리의 군마와 함께 아사달로 보냈다. 가는데 대략 10일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이번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며 마지막 회의가 상황실에서 열렸다. 이 회의를 끝으로 각 영지군은 해산하여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게 된다. 논공행상은 추후 왕성에서 열린다고 한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간단하게 축하 인사나 전하면서 끝날 회의라고 생각했는데 회의 주제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모두 나만 쳐다보고 있는 눈빛이 간절한 도움을 청하는 눈빛이다.
왕세자가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우리는 총사령관님의 도움으로 전쟁에 승리하여 침략자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보다 더 큰 문제를 내부적으로 안고 있습니다.
바로 지난 수백 년간 이 나라의 근간을 흔들어 놓고 있는 매국노들을 척결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이번과 같은 문제가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눈을 피해 한마음 한뜻으로 모이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이렇게 병력까지 동원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할 것입니다.
하여 저는 이 자리에서 총사령관님께 한 번 더 도움을 청할까 합니다. 저희가 이 나라의 생피를 빨아 먹고 있는 매국노들을 척결할 수 있도록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총사령관님”
왕세자의 긴 연설이 끝나자 자리에 모인 모든 귀족이 합창으로 소리를 질렀다.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총사령관님”
“허, 이런. 물에 빠진 사람 구해 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란 소리네. 갑자기 왜 생떼를 쓰고 그러십니까?”
“총사령관님 이번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이번에 매국노들을 모두 발본색원하여 척결할 수만 있다면 저희 왕실에서도 잃어버린 권위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된다면 저희 레온왕국도 총사령관님이 만들어가는 세상에 함께 동참하겠습니다.”
‘엉? 이건 또 뭔소리야? 내가 만들어가려는 세상에 동참해?’
“내가 이루려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아십니까?”
“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습니다. 노예가 없는 세상, 평민이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 귀족이 자신이 가진 권력과 권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으신 거 아니십니까?”
‘꿈보다 해몽이란 말이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나는 아사달만이라도 그렇게 만들고 싶었을 뿐이데, 왕세자는 내가 세상 자체를 바꾸려고 하는 줄 알고 있었나 보네.’
“그래서 어떻게 동참하겠다는 겁니까?”
“일단 매국노들로부터 권력을 회수하면 레온왕국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노예을 해방하겠습니다. 그리고 평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평민 중에도 능력이 있는 사람은 중앙 관료가 될 수 있도록 제도도 개선하겠습니다. 이 외에도 더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차차 개선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귀족의 권위와 배치되는 문제인데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려고 합니까?”
“매국노들이 척결되면 레온왕국의 귀족들의 중추는 여기 있는 이분들입니다. 이분들은 이미 저의 뜻을 이해하고 따르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왕세자가 나 모르게 귀족들과 이미 짝짜꿍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대단하다. 매국노들을 척결하고 그들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왕권과 국가권력을 되찾아 올 수 있다면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권위의 일부분을 내려놓겠다고 하다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기 모인 귀족들은 깨어있는 사고를 하는 대단한 사람들로 평가받아야 한다.
아이린 이후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왕세자는 주시해야 할 인물임은 틀림없다. 이 모든 것이 왕세자의 머리속에서 짜이고 연출 된 각본과도 같다는 것을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런 인물이 나중에 내 등에 칼을 꽂는다면 좀 아프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나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본인도 잘 알 테니, 지금으로서는 왕세자의 말이 진심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는 잘 알지요?”
“무, 물론입니다. 총사령관님. 만약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제 목을 치셔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목을 걸겠습니다. 총사령관님”
해리슨공작마저 저리 나오자 모든 귀족이 자기목을 내 걸었다. 확실히 이 사람들은 진심인 것 같다.
그렇다면 못 도와줄 이유가 없다.
내 마음속에 아련하게 남아있는 조국, 대한민국과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나라, 이 레온왕국의 과거의 아픔을 털어내고 우뚝 선 모습을 본다면 내 마음도 한결 편할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미쳤냐? 공짜로 도와주게. 대가는 확실하게 받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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