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레이든영주의 초대
해 질 무렵이 돼서 도착한 레이든성은 해밀턴성보다 다소 작은 규모의 성이었다.
성벽도 해밀턴성보다 조금 낮아 보이고 도시 규모도 인구 6,000명정도로 해밀턴성의 8,000명보다 작았다.
하지만 도시가 갖춰야 할 건 다 갖춰져 있었다.
여관도 7곳이 있고, 각종 잡화를 파는 잡화점 거리도 해밀턴성 못지않게 조성되어 있었다.
대장간 및 보석상, 곡물상회, 의상점과 찻집, 술집도 중심 번화가에 화려하게 늘어서 있었다.
우리가 신분패를 보이고 성문을 지나치자 저 멀리 영주의 저택이 있는 영주성에서 급하게 말들이 달려왔다.
레이든성은 해밀턴성과 다르게 영주가 기거하는 내성이 따로 있었다.
도시 외각을 감싸고 있는 외성과 영주가 기거하는 내성이 있는 것이다.
말들은 곧장 우리에게 달려왔다.
히히히잉~~
“워어,워어”
두 필의 말이 우리 앞에 멈춰 서고 풀플레이트아머가 아닌 간편한 기사용 가죽갑옷을 입은 기사단장 타이슨과 아롤드가 말에서 내려 내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십니까. 마법사님.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타이슨과 아놀드가 왼쪽 가슴에 오른 손을 가져다 대며 과하지 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나도 두 사람에게 과하지 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두 분 기사님들, 또 뵙습니다.”
“영주성까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리고 세분 영웅분들도 함께 가시지요.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영웅 호칭에 하벨영주가 기다린다고 하자, 스콜용병대 3인방은 입꼬리가 귀에 걸리며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영주성에 들어서자 양쪽 길 옆으로 60여명의 병사들이 차렷 자세로 길게 한 줄로 늘어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군기가 바짝 든 게 훈련이 잘된 강군으로 보였다.
군사들이 사열이 끝난 지점에는 하벨영주로 보이는 사람이 몇 몇 사람들과 함께 서있었다.
우리가 사열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다가가자 병사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외쳤다.
“투란마을을 구원하신 영웅들을 환영합니다.”
60여명이 일제히 지르는 함성에 잠시 귀가 먹먹해 졌다.
‘이그, 깜짝이야.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무슨 나라를 구한 것도 아니고’
나는 속으로 투덜대기는 했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
내가 언제 이런 군대 사열까지 받는 호사를 또 누려볼 수 있을까.
뭐라도 되는 양 가슴이 우쭐해지긴 한다.
“어서 오시오. 투란마을의 영웅들께서 이 누추한 곳에 방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오.
나는 레이든영지의 영주 하벨 레이든 로즈라 하오.”
하벨남작이 자신을 풀네임으로 소개했다.
귀족 그것도 영주가 평민에게 자신을 풀네임으로 소개하는 경우는 없다.
엄연한 계급사회이다 보니 자신의 풀네임은 같은 귀족이거나 자신보다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에게만 사용한다.
그런데 나에게 자신의 풀네임을 말한다는 것은 나를 평민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무래도 마법사라는 위치가 레온왕국, 아니 어쩌면 프리실란드 대륙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는 직업인 것 같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든영지의 영주님, 저는 강철민이라고 합니다.
강은 성이니 철민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내 뒤를 이어 스콜용병대 3인방도 각자 자기 소개를 했다.
우리는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하벨남작이 준비했다는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가 온다는 소식은 이미 3시간전에 들었다고 한다.
6시간 전 쯤, 영지를 순찰하던 기마대와 마주친 적이 있다.
그때 신원 확인을 위해 용병패를 보여준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때 기마대에서 알려온 소식인 것 같다.
연회장에는 이것저것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음식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차려 입은 두 여인이 다소곳이 서 있었다.
하벨남작은 두 여인을 나에게 소개했다.
우아한 기품을 내 보이는 중년 여인이 바로 하벨남작의 아내 세실리아 남작부인, 그리고 아름답게 미소 짓고 있는 젊은 아가씨가 하벨남작의 딸인 아이린 영애였다.
아이린은 올해 22살이고, 왕립행정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지금은 아버지를 도와 레이든성의 행정 업무를 맡고 있다.
키 167에 날씬한 몸매를 가진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특히 웃을 때 드러나는 양쪽 볼에 보조개가 너무 귀여웠다.
식사를 하면서 하벨남작과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철민경, 혹시 우리 영지에 얼마나 머무르실 계획이시오?”
“이곳을 좀 둘러봐야 확실히 알겠습니다만, 괜찮다면 이곳에서 상단을 열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단 말이오? 혹시 우리 레이든성에 정착하실 계획이시오?”
“정착은 아니고요. 한동안은 머물 생각입니다.”
“아아, 그러시군요. 그러시면 내가 도움을 드리겠소.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뭐든지 말씀해 주시오.
내가 최선을 다해 돕겠소. 철민경.”
“하하, 그래주신다면 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일단 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번화가는 아니더라도 도시 외각으로 경매소 건물이 될만한 적당한 건물을 좀 팔아주세요. 영주님”
“이를 말이오. 내일이라도 당장 진행하라고 이르겠소.
아니지, 아니야. 아이린 네가 한번 알아보는 게 어떠냐?”
“죄송해요. 영주님, 저는 지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쁩니다.
이제 곧 수확기라서 전수 조사도 해야 하고, 8개 마을에 아이들에게 현재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감기에 대한 역학 조사도 해야 해요.
잘못하면 전염병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문제 만큼은 시급히 처리해야 합니다.
상단 설립 같은 간단한 것은 제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충분히 처리가 가능합니다.”
똑 부러지는 아이린의 말에 하벨남작도 나도 할 말을 잊어버렸다.
하벨남작은 딸 아이린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거부할지 몰랐는지 약간 계면쩍게 웃으며 나에게 걱정말라는 제스쳐를 취한다.
“아. 그러냐? 허허, 뭐 급한 일이 있으면 먼저 해야지.
그러면 제이콥이 철민경을 좀 도와 줘야 할 것 같소만”
“알겠습니다. 영주님. 제가 나서서 철민경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제이콥는 영주성의 집사인 듯 싶었다.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60살은 훌쩍 넘어 보였다.
“신경서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님”
“별 말을 다 하시오. 철민경이 우리 영지에 머물러주는 것 만으로도 내가 감사를 드려야 할 판이오.
그건 그렇고 철민경의 상단은 무엇을 주로 취급하는 것이오”
“저의 상단은 앞으로 대형몬스터의 사체와 가죽, 그리고 가공된 보석등을 주력으로 취급할 계획입니다.”
“대,대형몬스터의 사체를 취급한다는 말이오?”
하벨남작과 가신들은 깜짝 놀라며 모두 나를 쳐다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형몬스터라면 오우거나 트롤, 미노타우노스 등인데 그런 몬스터는 왕국 전체적으로도 1년에 2~3마리 밖에 잡히지 않는 희귀 상품이기 때문이다.
없어서 못 잡는 게 아니라 잡을 수가 없어서 못 잡는 것이다.
말마따나 투란마을에서 그린마운틴 깊숙한 숲으로만 들어가도 대형몬스터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잡기 위해서는 훈련이 잘된 병사 수백 명과 익스퍼트급 기사도 수 십명 필요한데, 누구도 그런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잡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네. 제가 사냥하여 상단에서 판매할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상단을 열게 되면 왕국 뿐만 아니라 타국에서도 대형몬스터의 사체를 사기 위해 이곳으로 찾아오게 될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영주님의 레이든성은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게 될 거고요.”
‘그러니까 잘해, 내가 앞으로 영지 키워줄 거니까. 나를 팍팍 밀어라, 알았지?’ 라는 뜻을 강하게 풍기며 하벨영주를 쳐다봤다.
“하하하하!”
갑자기 하벨남작이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을 웃어젖히던 하벨남작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오더니 덥석 내 손을 잡는다.
“철민경, 미안하오, 그리고 고맙소.
내 익히 철민경의 무력을 들었소.
엄청난 마법으로 오크 500마리를 혼자서 잡은 것도 들었고, 4m가 넘은 우두머리 오크도 단 한방에 죽였다는 말도 전해 들었소.
그래서 철민경이 우리 영지에 머물러 주었으면 하는 바램과 욕심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오.
그런데 철민경께서 레이든성에 상단을 열어 대형몬스터를 손수 잡아 사업을 하시겠다고 하니 내가 너무 좋아서 그만 실례를 했소.
영지가 발전할 것이 눈앞이 보이다 보니 내가 실례를 범했소. 용서하시오 철민경”
“아닙니다. 영주님. 사람이다 보니 당연히 그럴 수 있지요.”
“뭐든지 돕도록 하겠소. 땅도 무상으로 드리겠소.
그리고 건물도 무상으로 지어드리겠소.
세,세금도 면제해 드리겠소.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뭐든지 말하시오”
파격적이다. 하벨남작은 레이든성이 발전하는 모습을 확실히 본 것 같다.
땅이나 건물 정도 무상으로 준다고 해도 앞으로 발전할 것을 생각하면 새 발의 피라는 것을 확실히 느낀 것이다.
거기다 세금까지 면제해 준다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영주님 세금을 면제하는 것은 불가 합니다.”
아이린이 소리를 높이면서 반대 의견을 표명하였다.
그러자 행정관으로 보이는 몇 몇 사람들이 아이린의 의견에 동의하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것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네. 얼굴이 예뻐서 봐줬더니 여기서 초를 치네. 초를 쳐.’
“무,무엇이 안된다는 것이냐. 아이린”
“영주님, 철민경의 영웅적인 행적이 있으니 땅을 무상으로 주고 건물을 지어주는 것까지는 저도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세금 문제는 다릅니다. 세금을 면제해 준다면 성내 상인들의 불만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누구는 면제해주고 누구는 세금을 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형평성이 무너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불만을 품고 성을 떠나는 상인들이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영지의 상권은 단 몇 사람에 의해 움직여서도 안되고 단 몇 사람에게 특혜가 주어져서도 안됩니다.
건강한 상권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세금 제도가 자리 잡아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야, 이 여자 똑똑하네.’
마치 21세기 내가 살던 동네에서 살다가 온 사람처럼 깨어있는 사고를 할 줄 아는 것 같았다.
‘아카데미 수석이라더니 생각하는 것이 남다르구나. 맞는 말이기도 하고’
“흠, 그건 그렇다만···”
“그 점은 나도 아이린영애의 말에 동의합니다.”
내가 아이린의 말에 동의한다고 하자 하벨남작이 계면쩍은 듯 나를 보며 말했다
“처,철민경 그렇지만···”
“세금을 내겠습니다.
나에게 특혜를 주어서 세금을 걷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는 특혜 받은 내 몫까지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합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그동안 쌓아오신 영주님의 평판에 오점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철민경은 우리 레이든영지의 영웅이오.
레이든영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20년전 투란마을의 비극을 알고 있소.
그들의 원수를 갚아주신 것은 곧 레이든영지의 원수를 갚아주신 거나 다름이 없소.
철민경께서 레이든영지에 머무는 동안 상단에서 벌어드리는 수익에 대해 세금을 면제한다고 것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주어지는 특혜요.
누구도 그에 대해 잘못되었다 말 할 수 없소이다.
내 딸이 입 바른 소리를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을 망각한 발언이오.
나는 레이든영지의 영주로서 그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소”
하벨남작은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다.
세금을 안 받는 다면 나야 땡큐다.
하지만 내가 파는 대형몬스터들의 단가가 높다 보니 나는 부자가 되지만 영지는 계속 가난할 것이다.
나중에 이에 대한 문제가 분명이 불거진다.
그때 가서 떠나면 그만이지만 만약 이곳에 터를 잡게 된다면 곤란한 사항이 될지도 모른다.
그냥 처음부터 세금을 내는 것이 났다.
“저는 얼마 전 해밀턴영지를 돌아본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더군요.
오랜 기간 굶주려 질병에 걸린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안남작에게 10년간 착취 당해 오면서 해마다 아사자가 발생하여 마을 인구도 많이 줄었다고 하더군요.
해밀턴영지의 이안남작는 권력을 남용하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무릇 권력자는 그 권력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수많은 영지민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자가 그 책임을 회피하고 오히려 영지민의 재산을 강탈하여 굶어 죽게 만드는 행위는 이미 영주로서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권력자로서의 권위도 스스로 내던져 버린 경우입니다.
그래서 저는 해밀턴성을 떠나 이곳 레이든성으로 온 것입니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식구마저 죽음으로 몰아넣는 작자에게 조금의 도움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벨영주님께서는 스스로 판단하기에 권력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나의 말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해밀턴영지와 이안남작을 욕하는 대목에선 10년묵은 채증이 내려가는 듯한 희열을 느끼고 있던 하벨남작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 누구에게도 그런 질문을 받아 본 적도 없고, 또 단 한번도 권력자로서의 책임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권력에 대한 책임론과 권위에 대한 논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러니 저러니 말들이 많은 명제이기도 하다.
“그, 그것은, 나,나는···”
“지금처럼 하시면 됩니다.
영지민 안 굶기고, 영지민들 수탈 안하고, 영지민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고 또 억울한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을 현명하게 해결해 주는 영주,
단 몇 사람에게 존경 받는 영주가 아니라 모든 영주민에게 존경 받는 그런 영주가 되시면 권력자로써 책임을 다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 저에게 공평하게 세금을 내라고 요구하셔도 되는 겁니다.”
“아! “
하벨남작이 뭔가를 깨달은 듯 짧은 탄성을 지르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런 것이라면 우리 영주님은 권력자로서의 책임을 다 하고 계신 것이오.”
“그렇고 말고, 우리 영지에는 굶주리는 사람도 없고, 수탈도 없소.
그리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도 많지 않소”
여기 저기서 하벨남작을 두둔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연회장은 갑자기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린도 나를 다시 봤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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