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상이용사의 사랑
다음날 아침 일찍 노이담마을로 출발했다.
노이담마을까지 또다시 7시간 거리라 하니, 점심을 제때 먹기는 틀린 것 같다.
“로이담마을은 산간지역에 있어요.
나무가 없는 구릉지를 따라 마을이 세워져서 밀농사는 지을 수 없어요.
그래서 마을 전체가 포도나무를 심어 과수원을 운영해요.
수확되는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어 영지 내에 공급해요.
마을 인구 수는 65가구, 200명 가량 되는 소형 마을이에요.“
아이린의 짧고 간결한 설명을 들으며, 포도라는 말에 지구에서 먹던 시큼하면서 달콤한 포도가 연상돼 입 속에 침이 고였다.
“포도의 수확 시기가 언제인가요?”
“포도는 지금이 수확 시기입니다. 가시면 마음껏 드실 수 있을 거예요”
아이린이 내 의도를 간파하고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침 우리가 도착할 때, 포도를 수확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새콤달콤한 것이 맛이 정말 좋았다.
일부러 돈을 주고 수십 상자를 사서 아공간에 넣어두었다.
두리안도 먹고 스콜용병단 3인방도 주려고 산 것이다.
로이담까지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드디어 투란 마을로 출발했다.
투란마을에 도착하자, 250명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린이 어깨에 힘을 주며 '으쓱' 거린다.
마치 ‘나 이 정도로 인기 있는 여자야’라는 제스처를 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아이린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이린을 본체만체했다.
그리고 내가 내리자, 마치 슈퍼스타가 등장한 것 마냥 소리를 질러 댔다.
“우와···마법사님이다.”
“마법사님. 다시 돌아온 것을 환영합니다.”
“철민님 , 투란마을을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사랑해요. 마법사님”
···..
끝도 없는 함성에 아이린이 벙쩠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나는 ‘뭐 이 정도 가지고 그래’ 라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투란마을의 아이들은 대체로 건강해서 질병에 걸린 아이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대상자를 모두 치료하고, 추가로 치료가 필요한 간난아이나 성인들도 치료해 줬다.
날이 저물어 우리는 마틴의 여관 ‘사냥꾼의 쉼터’···가 없어지고 이름이 바뀌었다.
자리도 그 자리이고 주인도 마틴인데, 여관 이름만 ‘마법사가 남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틴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철민님을 죽을 때까지 기억하기 위해서 이름을 바꿨습니다. “
“참나, 이러다가 외지인이 와서 오해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뭐, 오해하려면 하라지요. 없는 사실도 아닌데 그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흠흠”
“쩝, 방이나 줘요. 특실은 아이린영애님에게 주시고, 나도 적당한 방으로 하나 주세요. 저기 기사님과 병사들도 마련해 주시고요”
“네. 걱정 마십시오. 저녁 식사는 좋아하시는 훈제오리구이로 준비하겠습니다.”
“알아서 하세요”
나는 배정된 방으로 올라와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어제 밤, 아이린이 말한 이야기가 머리 속을 떠나질 않는다.
’하지만 못하는 건 못하는 거다. 아무리 내가 막강한 드래곤마법시스템을 가졌다 해도 하나의 왕국을, 어쩌면 제국을 상대로 싸워야 할 수도 있어. 자살행위다.
마나가 무한으로 있다면 모르지만, 끝도 없이 밀려 드는 병사들과 기사들을 상대한다면 마나 고갈로 죽을 것이다.
인류의 적으로 낙인 찍혀 평생 숨어 살아야 할지 몰라.’
하지만 어째서인지 심장이 강하게 요동치고 있다.
아이린의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다는 말이 계속 머리 속에서 울려 대고 있다.
“주인님. 심장이 너무 강하게 뛰고 있어요. 진정하세요”
두리안이 위협을 느꼈는지 경고를 해왔다.
“아!! 그래, 진정, 진정 해야지,”
“어제 그 인간 여자의 말 때문인가요? 인간 세상을 구원해 달라는 말이요?”
“뭐 인간 세상을 구원해 달라는 뜻은 아니지만, 불쌍한 사람들을 구해 달라는 말과는 비슷하지”
“어쩌실 거에요?”
“뭘 어째? 그게 가능한 일이겠어? 왕국 전체, 어쩌면 인간 세상 전체와 싸워야 할지 모르는데 그러면 뼈도 못 추릴 거다.”
“주인님은 이미 강하세요. 혼자서 군단을 상대해도 될만한 힘을 가지고 계세요. 그걸 스스로 부정하지 마세요”
“뭐, 뭐라고···?”
“조금 더 힘을 키운 후에 하셔도 되고, 아니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원래 주인님은 겁이 많으시잖아요”
“뭐,뭐야? 이 자식이 누가 겁이 많다고 그래? 너 옛날에 뽀족산에서도 사람 속을 긁더니 또 이러네. 나는 겁 나는 게 아니야. 어떻게 하면 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지. 포기하는 게 아니라고. 알았어?”
“헤헤, 그렇지요. 우리 주인님은 강한 분이시니까요. 믿어요. 주인님”
“썩을···”
‘그래 이것 때문에 그렇게 심장이 뛰는 거였구나.
포기하지 못했기에,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외치고 있기에, 그런데 머리는 못한다고 단정 지어버려서 심장이 그렇게 뛰는 거였어.
에이~ 몰라!! 지금 당장 하자는 것도 아닌데 차차 고민해 보자’
저녁 식사는 마틴이 구워낸 훈제오리구이와 맥주로 맛있게 먹었다.
아침에 또다시 마을 사람들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마지막 행선지인 로만마을로 향했다.
“로만마을은 50여 가구에 170명 정도의 소형 마을이에요.
생업으로 맥주보리를 재배하고 있어요.
해밀턴영지와의 국경이 5Km밖에 안되어, 저희 영지와 해밀턴영지간의 분쟁이 발생할 때 항상 큰 피해를 입어 왔어요.
마을 전체를 다른 지역으로 이동 시키려는 시도가 있긴 했지만, 역시 예산 문제로 포기할 수 밖에 없었어요.”
“맥주보리 농사를 짓는다고 했는데 수요가 있나요?”
“큰 수요는 없어요.
하지만 영지 내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맥주보리를 생산하고 있어요.
영지 내에서 판매 되는 맥주의 원료를 전부 이곳에서 독점 공급하고 있어요”
“겨울보리는 심지 않는 겁니까?”
“네? 겨울보리라니요?”
“늦가을에 심어 이듬해 봄에 수확하는 보리인데 들어본 적이 없나요?”
“그, 그런 것이 있나요?”
아이린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에게 뭔가를 더 말해 달라는 듯 내 입만 쳐다보고 있다.
‘역시 아이린도 겨울보리를 모르고 있구나.’
하레스상단 점원의 정보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차원에서 물어 본 것인데 아이린도 겨울보리를 모르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얼핏 들은 것 같아서 물어 본 겁니다. 혹시나 그런 것을 알고 있는가 해서요”
“아! 제가 알기로는 겨울에 파종하여 봄에 수확하는 작물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로만마을에 도착하여 마을 중앙 공터에 하얀색 진료소 천막을 쳤다.
그리고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치료하고 간난아이나 일반 성인들의 질병도 좀 봐주면서 치료를 마쳤다.
천막을 걷고 막 떠나려는데 공터에 모인 영지민들 속에 앉은뱅이가 한 명 보였다.
하반신을 가죽으로 둘러싸 메고 손을 짚어 이동하는 듯 했다.
나이는 40대 중반으로 보였다.
나는 중년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천적인 건가요. 아니면 다친 겁니까?”
중년인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내가 마법사인 걸 아는지 감히 쳐다보지 못하는 것이다.
“다, 다친 것입니다. 12년전에 영지군으로 투란마을 오크들과 싸우다 다쳐서 하반신을 못쓰게 되었습니다.”
“영지군으로 참가하여 다쳤다고요?”
“네”
나는 아이린과 웨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당신은 이름이 뭡니까?”
“작센이라고 합니다.”
“좋아요. 작센씨, 만약 당신이 일어나서 다시 걸을 수 있다면 무엇이 가장 하고 싶으세요?”
내 질문에 작센이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제가 다, 다시 건강해 질 수 있다면, 마리에게 처, 청혼을 하고 싶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작센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자신의 처지가 이러하여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휴~ 이러면 또 마음이 겁나 아프지.’
갑자기 마을 사람들 속에서 한 여자가 뛰쳐나오더니 작센을 감싸 안으며 울기 시작했다.
“작센! 작센, 나는 언제나 당신 곁에 있어요.
당신이 다리를 못쓴다 해도 저는 상관없어요.
당신이, 당신이 나에게 청혼해주기 만을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작센 사랑해요.”
갑자기 온 마을이 울음 바다가 되어버렸다.
나도 눈물이 찔끔~
그러나 안 그런 척 입술을 꽉 깨물며 근엄한 척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자 분위기가 좀 진정이 되는 듯 했다.
나는 조용히 웨인에게 부탁하여 작센을 마차 안으로 옮겨 달라했다.
웨인은 작센을 번쩍 들어 올려 마차로 걸어가면서 작센의 귓속에 속삭였다.
“작센, 어쩌면 작센의 하반신이 오늘 치료 될 수 있어요. 우리 마법사님은 다른 마법사와 차원이 다른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믿어 보세요”
“이봐, 웨인. 자네가 훌륭한 기사가 되었다는 말은 오래전에 들었다네.
오늘 이렇게 늠름한 모습을 보니 정말 기분이 좋아.
그러나 내 하반신은 고치기 무리라는 거 나도 잘 알아.
너무 오래되었기도 하고 그동안 수차례 신전도 가봤고, 마법사에게도 치료를 받아봤네.
모두 소용이 없었고 모아두었던 돈만 날렸어. ”
“작센, 깜짝 놀랄 준비하고 맘 단단히 먹어요.
작센의 사랑을 번쩍 안아 들 수 있는 순간이 찾아 올지 모르니까. 하하”
마차 안으로 옮겨진 작센은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작센에게 다가가 작센의 하반신을 감싸고 있던 가죽을 풀어 헤쳤다.
들어 난 다리는 오랜 기간 사용하지 않아 제 기능을 잃어버리고 깡말라 버린 채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아있었다.
“흠···..”
나의 한숨 비슷한 탄식에 작센도 자신의 다리를 보며 좌우로 고개를 흔들어 댔다.
스스로 고쳐지기 힘들다고 판단하는 듯 했다.
아이린은 두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린 채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심각했다. 오랜 기간 영양분과 피가 재대로 공급되지 않아 근육과 신경 등이 모두 괴사해 버린 상태다.
이 정도면 누가 와도 고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의 마법은 고칠 수 있다.
고로 나는 고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아이린에게 나가 있으라 했다.
아이린은 두말하지 않고 마차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웨인과 건장한 병사 한 명을 불렀다.
두 사람도 들어오자마자 작센의 다리를 보고 기겁을 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작센의 양쪽 어깨와 팔을 강하게 잡으라 지시했다.
뼈가 재생되고 신경과 근육이 재생되면서 극심한 고통을 동반한다.
이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내긴 힘들다.
그럴 때는 몸을 결박하는 방법이 최고다.
작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치료를 시작했다.
“힐”
새하얀 빛이 내 손에서 뻗어나가 작센의 다리를 감싸다 몸으로 스며 들었다.
동시에
우드드득, 우드드드드
뼈가 갈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작센의 두 눈이 커질 수 있는 최대 크기로 커지고 온 몸에서 심줄이 툭툭 튀어나왔다.
작센은 얼굴을 사정 없이 좌우로 흔들어 대며 고통을 참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한번으로 안된다. 여러 번 해야 온전해 질 것이다.
“힐”
우드드드, 우드드득
두 번째 힐마법이 시전 되자, 뼈가 곧게 펴지며 얼추 자세가 잡혀가고 큰 혈관들이 재생되었다.
근육도 조금씩 재생되며 다리 모양을 갖추어가기 시작한다.
작센은 여전히 고통에 몸부림치며 잠깐 잠깐 기절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굉장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렇게 나마 참아내는 것이 기특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래 당신은 충분히 새로운 하반신을 가질 자격이 있어. 적어도 영지와 타인을 위해 희생한 것이잖아. 내가 꼭 고쳐 줄게’
“힐”
세 번째 힐에서는 더 이상 뼈가 갈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근육이 완성되고 작은 모세혈관들이 생겨나며 근육에 혈액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부가 재생되어갔다.
잠시 후 모든 치료가 끝났을 때,
탈진할 것처럼 보이던 작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쌩쌩한 모습으로 자신의 다리를 만져 보고 들어보면서 눈물을 펑펑 흘렸다.
좁은 마차 안에서 무릎을 꿇고 연신 머리를 박아 대는 모습을 보며 내가 한마디 했다.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빨리 가서 청혼이나 하세요.”
잠시 후, 마차 문이 열리며 웨인이 나왔다.
그리고 병사가 나왔다.
그리고 내가 나갔다.
마지막으로 작센이 자신의 다리로 마차에서 내려 오는 모습이 보였다.
“우와···작센이, 작센이 걸어 나와요”
“세상에나, 세상에나 기적이 일어났어요, 기적이···”
“마법사님이 작센의 다리를 고쳐주셨어요. 마법사님 만세~”
“만세, 만세···”
···..
온 마을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면 작센의 완치된 모습을 기뻐했다.
작센은 한발 두발 걸어가더니 자신의 사랑, 마리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 흘리며 청혼 하였다.
“마,마리 나와 결혼해 주겠소. 내가 절대로, 이제는 절대로 당신의 눈에 눈물이 맺히지 않게 하겠소. 나오 결혼해주오”
마리가 꿇어앉은 작센의 머리를 가슴에 안으며 대답했다.
“내. 결혼 할게요. 작센, 당신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힘껏 안으며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그리고 작센은 그녀의 손에 작은 금반지 하나를 끼워 주었다.
물론 내가 준 것이다. 금반지야 잔뜩 있는데 하나 준들 티도 안 난다.
사람들은 환호와 기립 박수로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 진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나도 두 사람이 앞으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해줬다.
4박 5일이라는 긴 여정의 마침표를 찍으며 마차는 다시 레이든성을 향해 힘차게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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