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나를 향한 음모
점원의 안내로 창고로 가서 거기 있던 밀을 모두 아공간에 넣었다. 창고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총 5개 창고에 밀이 나눠져, 보관되어 있었다. 밀을 아공간으로 옮길 때마다 점원이 딸꾹질을 해 댔다.
딸꾹, 딸꾹···
창고를 돌면서 점원에게 이것 저것 물어봤다.
“지금 시기가 일년 중 밀 가격이 가장 비쌀 때 입니다. 2달 후, 수확기가 끝나면 지금보다 절반으로 가격이 떨어져요”
아마도 수요와 공급 법칙이 적용되는 것 같다. 수확이 끝나면 왕창 사서 아공간에 넣어 놨다가 이 시기에 팔면 돈 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구의 중세 시대와 비슷하다면 쌀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점원에게 물어보니 라이스라는 쌀과 똑같은 형태의 곡물이 있단다.
“라이스는 재배하기 쉽지 않아요. 라이스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물이 많이 필요한데 그 만큼의 물을 끌어올 데가 없어서 강 주변 일부 지역에서만 소량으로 재배합니다.”
“가격은 어떻게 되지?”
“밀 가격보다 보통 3배에서 4배 정도 비쌉니다. 그러다 보니 부자들이나 귀족들만 먹을 수 있죠”
“성 내의 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니 보리도 있던데, 하레스상단은 취급 안 하는 건가?”
“네, 저희 상단은 밀만 전문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시장에서 보리를 보셨다면 아마 맥주보리일 겁니다.”
“맥주보리?”
“맥주 만들 때 쓰는 보리입니다. 식용보리는 밀과 재배시기도 겹치고 수확량도 밀보다 못해서 거의 재배 안 해요. 찾는 사람도 없고요. 그나마 맥주보리만 소량 재배되고 있어요”
프리실란드 대륙은 보리도 가을에 수확하는 걸 보니, 겨울보리 품종이 아직 없는 것 같다.
지금 내 배낭 속에는 송씨 아저씨에게 받은 오곡세트가 있다. 현미 ·보리 ·조 ·콩 ·기장이 들어있다. 이런 곡물은 프리실란드 대륙에도 다 있었다.
하지만 오곡세트에 들어있는 곡물은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품종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현미나 보리를 발아시켜 재배한다면 적어도 생산량이 2배, 어쩌면 3배까지도 가능할 지 모른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보리는 가을 추수가 끝나고 파종하는 겨울보리이다. 이 곳 사람들을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작물이 될 수 있어. 그리고 미지의 수림에서 발견한 고구마, 감자, 옥수수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어. 돈 벌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하게 많아’
여관으로 돌아와 씻고 자려 하는데 갑자기 1층에서부터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몰상식한 자가 이리 매너 없이 뛰어다니는지, 나무로 된 바닥이라 소리가 더욱 심하게 들린다.
잠시 후,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들겨 댔다.
꽝꽝꽝, 꽝꽝꽝
누군지 모르지만 참 성격이 급한 사람 같다. 혹시 이안남작이 보낸 자객이 아닐까 조금 긴장되기도 한다. 처음으로 살인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경매가 끝난 이후로 나를 감시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두 명이 번갈아가며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나에게 해코지만 안 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이런 식이면 처리 해야 할 것 같다.
꽝꽝꽝, 꽝꽝
또다시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나는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고 주먹을 들었다. 그런데
“하만입니다. 철민님, 저 하만입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하만이 이 시간에 여기에 왜? 아!! 하마베를 딸에게 먹였구나. 긴가민가 하더니 가자마자 먹였나 보네’
덜컥~
문이 열리자마자 하만이 뛰어들어 오더니 덥석 내 앞에 엎드렸다. 뒤에는 20살쯤 되어 보이는 예쁘장하게 생긴 아가씨도 한 명 서 있었다. 하만의 딸인가 보다. 저런 딸이 하반신이 마비되어 누워만 있었으니 가슴이 얼마나 찢어 졌을까.
“철민님, 철민님. 감사합니다. 우리 줄리아가 그, 그 열매를 먹고 일어 났습니다. 철민님..흐어엉, 흐엉~”
“아, 그래요. 나으라고 드린 건데 안 나으면 안 되죠. 아까는 긴가민가 하시더니?”
“그, 그게···말입니다. 하도,하도 치료할 수 있다고 시기치는 인간들이 많아서···흐어엉. 그래서 이제는 치료를 포기했었는데, 그랬는데, 흐어엉···감사합니다. 철민님. “
내가 하만의 딸을 쳐다보자. 하만이 자기 딸에게 소리친다.
“줄리아, 너도 어서 인사 드려라. 이분이 너의 몸을 낫게 해준 분이시다.”
줄리아도 자기 아버지 옆에 무릎 꿇고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저에게 베풀어 주신 큰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뭐만 하면 무릎 꿇는다. 이 사람들만의 감사 표현 예절인가? 너무 과한 예절에 좀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괜찮으니 일어나서 앉으세요.”
나는 하만과 줄리아를 일으켜 세워 의자에 앉혔다. 흥분이 조금 가라 앉자 하만에게 말했다.
“이제 따님도 치료되었으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세요. 듣자 하니 왕궁장인으로 뽑히기도 하셨다고 하던데”
“아, 아닙니다. 옛날 일입니다. 저는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허허”
“그런데 따님은 어떻게 다친 겁니까?”
“그게···.”
하만은 갑자기 부화가 치미는지 얼굴을 붉히며 주먹을 쥐고 벌벌 떨어 댄다. 뭔가 있구나 싶어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놈, 그놈 때문입니다.”
“···??”
“소영주, 바우보 소영주, 그놈이 내 딸 줄리아를 그렇게 만든 겁니다.”
줄리아가 옆에서 갑자기 눈물을 쏟아낸다.
“그놈이 내 딸에게 못된 짓을 하려고 납치하려다가 줄리아가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바람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는 사람들에게 내 딸 줄리아가 갑자기 마차로 뛰어들었다고 거짓 소문을 냈습니다. 하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놈이 얼마나 난봉꾼인지, 좀 예쁘장하게 생긴 평민 처녀들 중 그놈에게 안 당한 아가씨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허, 이런, 그 아비도 쓰레기던데 아들내미도···.”
“그 아비에 그 자식 아니겠습니까. 아비인 이안영주는 평민들을 개돼지 취급하며 재산을 수탈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작자입니다. 그 만행에 해마다 영지민들이 굶어 죽어 나가기 일수이고요. 아들인 바우보 소영주도 그 악행이 영지 곳곳에 자자합니다. 오죽하면 딸 가진 부모들은 바우보에게 수모 당하기 전에 시집 보낸다고 아직 혼기도 안 찬 어린 처녀의 혼처를 알아보고 다닌다고 합니다.”
참 어이가 없다. 어떻게 그런 악귀 같은 인간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많은 영지민들은 왜 그렇게 당하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하면서도 영주에게 저항할 생각은 안 하는 건가요?”
“아이고, 그런 말씀 마십시오. 어떻게 영주에게 반기를 든단 말입니까. 그렇게 했다가는 귀족이자 영지민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영주에게 반역한 죄로 왕국군이 내려와 다 죽일 것입니다.”
이게 문제다.
지구의 중세 봉건시대에도 영지민이 절대 영주에게 대항 할 수 없도록 귀족끼리 결속하여 평민이나 농노들을 핍박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 때 노비가 주인을 신고하지 못하도록 경국대전에 명시해 놨다는 기록을 본 적 있다.
“참나”
허탈한 웃음 밖에 안 나온다.
나는 하만에게 클레인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안남작 부자를 어떻게 골탕 먹일지에 대한 내 계획도 말해주었다. 하만의 눈이 왕방울만 해져서 굵은 눈물을 쏟아낸다.
“저도, 저도 돕게 해 주십시오. 철민님. 이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
자신도 꼭 돕게 해 달라 사정을 했다.
“하만씨, 일단 갑옷이 완성되는 두 달 간은 이곳에 남아 있으세요. 그리고 내가 레이든성에서 자리를 잡으면 연락할 테니, 그때 상회를 정리하고 레이든성으로 오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만씨에게 제안을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선 이것들을 봐 주세요”
쿵~쿵~쿵~
나는 하만에게 아공간에 있는 가죽들의 일부분을 보여줬다. 샤벨타이거, 실버울프, 아울베어, 회색늑대, 거대멧돼지 가죽들이다.
“헉, 이, 이것들은···.”
“앞으로 이 가죽들로 하만씨가 제품을 만들어주세요. 내가 만들 상단에서 그 제품들을 팔면 그냥 가죽으로 팔 때보다 더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어요.”
나의 제안에 갑자기 하만이 넙죽 엎드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 하만 앞으로 철민님을 주군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받아주십시오”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에 약간 당황하기는 했지만, 나야 당연 좋다. 하만의 솜씨가 보통 솜씨가 아닌데 그런 사람을 부하로 두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좋아요, 하만씨 같이 일해 봅시다. 그리고 가죽들이 아주 많아요. 하만씨 혼자서는 힘들 겁니다. 같이 일할 다른 장인들이 있으면 함께 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주군. 제 딸 줄리아도 어려서부터 저에게 가죽 다루는 법을 배워왔습니다. 웬만한 장인 솜씨보다 좋습니다. "
“그렇군요. 앞으로 줄리아양도 잘 부탁드릴게요.”
“맡겨주시면 최선을 다 할게요.”
줄리아의 솜씨도 웬만한 장인보다 훨씬 좋다고 하니 앞으로 훌륭한 인재가 될 것 같다.
“저는 이틀 후에 해밀턴성을 떠날 겁니다. 그런데 현재 나에게 감시가 붙어있어요. 아마도 이안남작이 붙인 것 같은데, 내가 떠난 후에 혹시나 두 분에게 해코지가 있을지 몰라 미리 말해 드리는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알아서 처신 잘 하겠습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여러가지 애기를 나누다 하만과 줄리아를 집으로 돌려 보냈다.
이안남작을 엿 먹일 방법으로, 옆 영지로 가서 더 큰 레비탄가죽을 팔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이안남작이 가지고 있는 레비탄가죽은 희소성이 없어지면서 똥값으로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생긴 것 같다.
다음날,
해밀턴성 이곳 저곳을 구경하며 필요한 생필품들을 샀다. 소금이나 후추, 기타 향신료와 솥뚜껑처럼 생긴 무쇠로 된 큼지막한 불판도 하나 샀다. 이제 돌 판은 안녕이다.
보석상에 들려 보석 원석을 어디서 구하는지도 물어봤다.
“보석원석은 대형상단에서 취급합니다. 특히 볼튼상단이 제일 많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볼튼 자작을 만나볼까 하다가 그만 뒀다. 어제 보니까 심기가 무척 불편해 보였는데 괜히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것 같아서 포기했다. 다른 상단도 취급한다고 하니 레이든성에 가면 만나봐야겠다.
밤이 되자 투명마법을 걸고 여관을 빠져나왔다. 감시가 있을 테니 방의 촛불은 끄지 않고 켜 두었다. 바로 이안남작의 저택으로 날아갔다.
이곳 저곳을 훑어보다가 어느 창문 넘어 이안남자과 그 아들 바우보, 그리고 경매에서 보았던 덩치 큰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창문 옆에 바짝 붙어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마커스경, 그 작자가 아직 성을 안 떠나고 있는 것이 맞소?”
“네 영주님, 아직 여관에 머물고 있습니다. 밤낮으로 감시를 붙여 놨으니 성 문을 빠져나가면 즉시 보고하겠습니다.”
이안남작은 고객을 끄덕이며 아들 바우보에게 묻는다.
“아들아, 준비는 잘 되어있겠지?”
“걱정 마세요. 아버지, 오러유저 기사 5명과 날랜 병사 30명을 각 길목마다 배치해 놨습니다. 성을 빠져나가는 즉시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너만 믿는다. 아들아. 2만골드가 큰 돈이긴 하지만 자작위만 얻을 수 있다면··· ”
이안남작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바우보가 치고 들어왔다. 남이었으면 크게 성을 냈을 테지만 아들이라 참는 둣 했다.
“그런데 아버지, 고작 레비탄가죽 하나로 자작위를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니지, 레비탄가죽은 그냥 선물이다. 하이센드 백작님에게 드리는 선물, 그분이 변경백으로서 왕국회의에서 적극적으로 추천을 해 줘야 가능할 문제야.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을 우리가 따로 마련해 줘야 한다. ”
“아! 그래서 금고에 있는 보물들이..”
바우보가 이안남작 뒤쪽 벽에 있는 금고를 슬쩍 쳐다봤다.
“그래, 이날을 위해 지난 10년간 악착같이 모아온 것이다. 오직 자작이 되기 위해 안 쓰고 안 먹고 영지민들을 개돼지처럼 굴려가며 모아온 돈이다.”
이안남작은 탐욕으로 가득 찬 눈을 빛내며 아들 바우보를 바라봤다.
“실수 없이 잘 처리해야 한다. 만약 조금이라고 문제가 발생한다면 나의 계획은 다시 1년을 미루어야 할지 모른다.”
“걱정 마세요. 준비는 완벽합니다. 조금의 실수도 없을 겁니다.”
“마커스경도 그 작자의 감시를 더욱 철저히 해 주시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영주님”
“내가 자작위만 얻게 되면 하벨영지를 단숨에 쳐서 내 영지로 만들 것이오. 용병들도 계속 보강하시오. 마커스 경”
“네. 영주님. 현재에도 계속 증원하고 있으며, 올 말쯤에는 3천명까지 가능할 거 같습니다.”
“3천명이라, 지금 하벨영지의 군사가 어느정도요?”
“첩자들의 보고로는 약 600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사로는 오러유저 2명과 익스퍼트 초급 1명, 익스퍼드 중급이 1명입니다.”
“익스퍼트 중급이라는 자가 그 기사단장인가 하는 놈인가?”
“맞습니다. 영지전이 시작되면 제가 직접 나가 그 자의 목을 베어 영주님 앞에 바치겠습니다.”
“오~ 마커스경, 듣는 것 만으로도 듬직하오. 그대만 믿겠소. “
이안남작의 직무실에서는 계속 회의가 진행되더니 늦은 밤이 되자 직무실의 문을 걸어 잠그고 각자의 침실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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