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핏빛 긍지 3-4화 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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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발각
"실례합니다. 영주님. "
"무슨 일인가?"
조심스럽게 문을 연 병사는 마주 앉아서 서류들을 펼쳐놓고 있는 하크스 영주 로엘 공과 수비대장 슈발츠를 향해 송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적진에 변화가 있을 경우 즉시 알리라고 하셔서."
"적이 움직이고 있나?"
"진지 이동이나 공격은 아닙니다만······."
병사는 묘하게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일종의 시위인 것 같습니다. 성의 정면을 향해서 커다란 장대를 세우고 그 위에 사람을 하나 매달아 놓았습니다."
"사람을 매달다니? "
의아한 듯이 반문하는 영주와는 대조적으로 슈발츠의 낯빛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걸 저희로서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만, 분명히 여자 한 명이··· 으악!"
병사는 말을 채 마치지 못했다. 슈발츠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문간에 서 있던 그를 밀쳐내고 미친 듯이 달려나간 까닭이었다.
"···슈발츠 장군에겐 뭔가 짚이는 바가 있는 모양이군. 나도 좀 가 보아야 하겠네. 안내하게나."
"아, 예."
얼떨떨한 표정으로 벽에 부딪힌 팔을 문지르던 병사가 공손한 태도로 앞장섰다. 정면으로 버티고 선 성벽 위에는 슈발츠가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얼굴을 한 채 적진을 쏘아보고 있었다.
장대에 매달린 여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긴 빨간 머리는 멀리서도 선명했다.
"무언가 아는 바가 있으신가? 장군은? "
로엘 공의 조용한 목소리에 슈발츠는 그제야 갑자기 정신이 든 것처럼 황망한 표정으로 뒤쪽을 돌아보았다.
"아, 영주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주군께 당치않은 무례를······."
"되었네. 그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영주가 두 손을 내저으며 제지하자 슈발츠는 다시 장대 쪽을 돌아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예전에 들여보냈던 첩자입니다. 한동안 연락이 없다 싶더니 결국 발각된 모양입니다."
"첩자를? 여자를 들여보냈단 말인가? 허어 참···."
로엘 공의 탄식 비슷한 가벼운 신음을 뒤로 한 채 슈발츠는 이빨 새로 배어드는 비릿한 피내음을 삼키며 장대를 계속하여 노려보고 있었다.
4. 본진으로 이동
“병사들 이동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무장을 마치고 막사를 나서자 부관 카데닐이 다가와 보고를 했다. 클리어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대 인근에서 기밀문서를 빼돌리려 하였던 방물장수와 적의 간자를 추격하여 사살한 것도, 군창에 대한 조사를 요구한 것도, 조사 끝에 사비에를 잡아낸 것도 모두 카데닐이었다.
조심성이 많은 성품답게 카데닐은 거의 모든 일에 있어서 클리어트의 의사를 먼저 묻고 지시에 따라 행동했지만, 극비리에 진행된 조사 끝에 밝혀낸 세작이 상관이 즐겨 찾던 바로 그 군창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사비에의 처분에 대해 재차 묻지 않았다. 자존심이 강하고 혈기가 넘치는 클리어트이기에 발칙하게도 자신의 품 안에서 버젓이 첩보 활동을 한 사비에를 더더욱 용서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몸을 팔아 먹고사는 미천한 계집을 세인으로 이용한 적장의 의도는 빤했으나 카데닐은 클리어트의 맨 처음 명령대로 사비에를 죽지 않을 만큼 고문하여 장대에 매달았다. 그건 그 행위를 통해 그녀로부터 무엇을 알아내고자 함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가 아는 게 없다는 것쯤은 처음부터 짐작했던 바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떻게 본다면 적장에게 이용당했을 뿐인 적국의 여인을 건드리는 것이 카데닐로서도 내키지 않았지만, 이적행위를 한 자를 그냥 풀어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저항을 멈추지 않는 첸트로빌 성의 적군, 아니 하크스 영민에게 좋은 본보기였다. 그녀를 피투성이로 만들어 매다는 것으로 그들은 코네세타는 적군과 적의 백성들에게 경고를 보낼 수 있었다. 이적행위에 대한 대가가 깔끔한 처형이라면 적에게 전혀 공포심을 줄 수가 없다. 끝나지 않은 고통으로 최대한 길게 괴롭힌 이후에 가장 비참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해야 적의 저항 의지를 앗아갈 수가 있었다. 클리어트가 죽지 않을 만큼 주무른 뒤에 매달아두라 명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세작 건을 자신에게 일임하긴 하였지만, 클리어트가 이토록 냉혹하게 외면할 줄은 카데닐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눈에 띄는 붉은 머리 때문에라도 장대에 매달린 이가 사비에라는 것을 알아보았을 터인데도 클리어트는 가타부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대장군의 서신에 적힌 대로 하크스 농성군의 병력을 정리하여 펜데스칼의 본영으로 이동할 것이니 준비해 두라 차분하게 명령했을 따름이었다. 모진 고문을 당해도 살려달라 한마디조차 하지 않는 저 계집이나, 이틀이 멀다 하고 끼고 놀던 계집이 적의 첩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얼굴에 동요 한 점 없는 상관이나 독하기는 매한가지라고 카데닐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소장 에반 듀론, 진영을 비울 수 없어 이곳에서 미리 인사드림을 부디 용서하십시오.”
“본관이야말로 끝까지 공략전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이동하게 되어 유감이다.”
조금은 잠긴 음성으로 그렇게 운을 뗀 클리어트는 한순간 미간을 좁혔다. 도대체가 해상에서 후방기지로 옮겨온 뒤로는 뜻대로 풀리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 병력 삼사천이 머물 뿐인 적의 성 하나를 함락 못 시켜서 전상을 입는가 하면, 멍청하게도 시건방진 계집년의 손아귀에서 실컷 놀아나고 말았다. 도리어 겉으로 드러내어 성을 내는 것이 본인의 치부를 스스로 들추는 결과가 되는 셈이라 필사적으로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기실 클리어트로서는 사비에뿐만 아니라 저 멀리 있는 첸트로빌 성 전체를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심정이었다.
“금일 부로 전사한 쉐트인 장군을 대신하여 듀론 장군에게 본 진영에 대한 전권을 부여한다. 첸트로빌이 적에게 남은 유일한 후방거점이라 하나 적의 병력이 부족하고 적장과 내통하던 세작 또한 잡았으니 이후 지휘에 큰 부담은 없으리라 믿는다. 어차피 대본영에서 전면전으로 적의 도성을 함락시키면 첸트로빌의 항복은 따라올 것이니 무리하지 말고 상태 유지에 전념하라.”
“각하의 명, 충심으로 따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려던 클리어트는 듀론이 약간 주저하는 듯한 어조로 적의 간자는 어떻게 처리하느냐고 묻자, 멈칫했다. 잡힌 첩자가 그녀란 것을 안 뒤로 단 한 번도 의도적으로 그녀를 돌아보려 하지 않았던 클리어트의 눈길이 처음으로 장대로 향했다.
매달린 지 벌써 사흘째였다. 고문을 당한 뒤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상태라 의식을 잃은 지 오래인지 앞으로 기울어진 고개 아래로 그녀의 붉은 긴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녀의 당돌함도, 묘한 처연함도 모두 마음에 들었던 것은 사실이나, 사비에가 설령 적의 세인이 아니었다 하여도 고작 계집 하나에게 발목이 잡힐 클리어트가 아니었다. 하물며 제 품에서 저를 농락하고 적대 행위를 한 괘씸한 계집임에야 두말할 나위조차 없었다.
“닷새 뒤 창에 꿰어 죽여라. 그 연후에도 본보기 삼아 진영 앞에 매달아둔다면 겁 없이 나대는 쥐새끼들은 없어지겠지.”
씹어뱉듯 내뱉고 나서 클리어트는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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