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부위정경 6화 속고 속이는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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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속고 속이는 싸움
“들라.”
허락을 뜻하는 지시가 떨어지자, 시종들에 의해 섬세하게 조각된 화려한 문양의 거대한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창가에 서 있던 긴 금발의 소녀가 정면으로 몸을 돌리자 좌중에 있던 모두가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에스피아 공주였다.
“분부하신 대로 찾으신 이들을 불러왔습니다.”
“수고했다. 경은 부를 때까지 물러나 대기하도록.”
“예, 전하.”
란델이 물러가자 에스피아는 그 옆에 있던 시녀들도 전부 밖으로 내보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녀는 엘센과 슈레디안을 바라보았다.
“근위대 소속 제5병과 신병 훈련 담당 분대장 마크 엘센, 삼가 전하를 뵙습니다.”
다시 한번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보인 엘센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인사를 올렸다. 에스피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뒤에 서 있던 슈레디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왕실 예법에 맞는 인사를 할 기회를 놓친 모양인지 슈레디안은 당황한 기색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수하가 긴장하다 못해 얼어붙은 것을 알아차린 엘센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다소 늦었지만, 이제라도 고두배를 올리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에스피아는 그에게 그럴 수 있을 만한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상관의 헛기침 소리에 반사적으로 엘센에게로 향했던 슈레디안의 눈길이 다가오는 에스피아의 기척에 놀란 듯 다시 그녀를 향했다. 눈길이 마주치자 에스피아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녀는 홀린 듯 저를 바라보는 슈레디안에게로 다가가 진줏빛 손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슈레디안을 바라보는 에스피아는 흡사 사냥감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암사자처럼 당당하였다.
슈레디안은 황망한 표정으로 눈길을 내리깔았다. 이 방에 들어선 이래 왕족처럼 지체 높은 사람은 처음 대하는 것처럼 어리벙벙하게 굴었는데도 그녀는 의심을 거두지 아니한 채 그를 시험하고 있었다.
슈레디안은 눈앞으로 다가오는 에스피아의 손을 뻔히 보고서도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에스피아가 손을 내미는 의도야 자명했지만, 그토록 얕은수에 말려들 그가 아니었다. 세레즈의 왕자라면, 에스피아가 알고 있는 아체프렌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저 손을 잡아 입을 맞추었겠으나 이 자리에 선 그는 결코 아체프렌이어서는 안 되었다.
그는 꿇어엎드린 채 주저 없이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세레스티아 왕실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몸으로 지엄한 옥좌에 올라 선왕을 기만한 모후의 원수 세느비엔느를 평생 어미이며 폐하라 불러온 그였다. 세느비엔느 정권이 그간 그에게 강요해온 무수한 일에 비한다면, 이런 것쯤은 굴욕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수준이었다.
“삼가, 대,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긴장한 티가 역력한 거친 음성이 필요 이상으로 우렁차게 내실에 울려 퍼졌다. 졸지에 에스피아는 갈 곳을 잃은 손을 내리지도 그렇다고 다시 거둬들이지도 못한 채 반듯한 이마를 찌푸렸다. 사정을 모르는 란델이나 이스빌렌의 시종 시녀들은 그에게 기본적인 황실 예법에 대해 일러줬을 테지만, 설마하니 아체프렌이 정말로 제 앞에서 꿇어 엎드려 이마가 바닥에 닿는 절을 올릴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였던 에스피아는 비록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눈이 마주쳐도 동공이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전혀 모르는 자를 대하는 것처럼 낯선 눈빛이었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이미 내 얼굴을 알고 있는 아체프렌, 네가.’
에스피아는 슈레디안의 반응에 자칫 흔들리려 하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돌이켜 보면 아체프렌은 세레즈와의 사이가 비교적 원만하였던 어린 시절에도 그녀와 코네세타에 쉬운 적이 없었던 상대였다. 저자가 진정으로 신분을 감춘 아체프렌이라면 그에게도 이 자리는 최대의 위기였다. 그녀가 그의 정체를 밝히고자 필사적이듯, 상대 또한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녀를 속이려 들 터였다.
“일어나라.”
에스피아는 불과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도 상대가 보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아체프렌을 연상케 하는 푸른 눈에 깃든 감정이라고는 순수한 긴장과 외경이 뒤섞인 찬탄뿐이었다. 아름다운 용모에 대한 경탄과 그녀의 신분에서 오는 반사적인 두려움이 뒤섞인 그 표정은 흡사 저를 처음 본 성내 백성들의 얼굴과도 같았다.
눈이 마주치고 그녀가 미소짓자 그는 눈에 띄게 당황한 듯 보였으나, 그 역시도 난처한 상황에서 우러나온 반응이었을 뿐, 얄미울 만큼 이성적이고 매사에 능란한 아체프렌의 반응이라기엔 분명 어폐가 있었다. 그를 부르기 전부터 어느 정도 각오하기는 했지만, 예상보다 힘겨운 줄다리가 될 듯싶었다. 에스피아는 흥미롭다는 듯이 입술을 끌어올렸다.
“황, 황송합니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명령을 받고 후다닥 일어서다가 에스피아의 손끝에 머리가 닿고만 슈레디안은 사색이 되어 어설픈 자세 그대로 다시 꿇어엎드렸다. 뜻하지 않게 왕위 계승자의 신체를 만진 셈이 되어 몹시 당황한 모양이었다. 이마를 바닥에 찧는 소리가 고요한 내실에 쿵 하고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죄송······, 아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
그녀는 침묵한 채 바닥을 짚은 슈레디안의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을 내려보았다. 우아하리만큼 길고 아름다웠던 아체프렌의 손과 달리 저의 자비를 구하듯 손바닥 쪽을 위로 하여 뒤집혀진 청년의 손은 전혀 관리가 되지 않은 듯 보였을뿐더러 몇 개월 전만 하여도 없었던 자상이 손바닥 위로 보기 흉하게 자리잡혀 있었다. 그것은 분명 제때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여 남은 흉터였다. 세레즈의 왕위 계승자인 아체프렌의 몸에는 결코 남을 수 없을 만한 상처가 에스피아의 눈에 시리게 다가와 박혔다.
자신 앞에 꿇어 엎드려 용서를 구하는 것도, 황망한 표정과 두려움에 떠는 몸짓마저 극히 자연스러웠다. 이곳에 들어선 이래 그가 행한 어느 것 하나 왕실의 적장자로 태어나 태자로 자라온 아체프렌으로서는 꿈에서조차 상상해보지 않았을 일이었을 텐데도, 평생 몸에 익은 몸짓인 양 스스럼이 없어 보였다.
청년의 손에 자리잡힌 상처와 비굴한 태도가 마음에 걸리는 건 사실이었으나, 그것만으로 의심을 거두기에는 청년의 생김이 너무나 아체프렌과 흡사했다.
그 고고하고 오만하며 우아한 왕자가 그저 눈속임만을 위해 적국의 공주인 자신 앞에서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죽일 수도 있는 자였던가.
최초의 동요를 극복한 에스피아의 에메랄드색 눈동자에 차츰 차가운 빛이 깃들기 시작했다. 오체투지를 한 채 자비를 구하듯 떨리는 손바닥을 그녀 앞으로 내미는 그를 보고 있자니, 작년 가을 세레즈의 외교사절의 자격으로 코네세타를 방문했던 아체프렌이 떠올랐다.
그때의 아체프렌은 세레즈의 왕권을 대리하는 전권 사신의 자격으로 왔음을 주지시키며 부왕인 로그스트 Ⅵ에게조차 예를 표하길 거부했었다. 흉맹한 기색을 한 적국의 기사단에 둘러싸인 아체프렌은 무장조차 하지 않은 단신이었다.
적국 조정에 홀로 서서도 그는 비무장의 사절을 기사단까지 동원하여 위협하다니 섬나라 왕의 도량은 고작 그 정도냐며 냉소까지 보낼 정도로 여유만만했다. 목숨이 여럿이라 그토록 오만하냐는 한 신료의 물음에 아체프렌은 어차피 죽을 자리에서는 살아보려 애를 써도 죽을 것이고 살 자리에서는 죽으려 악을 써도 살 것인데 새삼 두려울 것이 무엇이냐며 태연자약한 얼굴로 반문하였다. 분노하는 대신들을 만류한 부왕은 아체프렌의 남다른 기개를 칭찬하며 그를 커런스까지 호위하라 명하였다.
그때의 아체프렌과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자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생김만이 같을 뿐, 언행, 표정, 몸짓 어디에서도 아체프렌을 연상할 수 있을 만한 구석은 없었다.
‘하지만······.’
에스피아는 침음을 삼켰다. 그러나 슈레디안과 아체프렌을 별개의 존재라 치부하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너무나도 많았다.
“고작 그 정도로 내 그대를 죽이겠느냐. 개의치 않으니 고개를 들라.”
“감······, 아니 황공합니다.”
조심성이 없이 벌떡 일어나던 아까와 달리 그는 이번에는 머뭇머뭇 고개를 들었다. 바닥에 찧은 이마는 발갛게 부어 있었고, 황송하다 거듭 읊조리는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이것이 전부 다 내게 보이기 위한 기만술이란 말이지. 울 것 같은 표정도, 굴종이 몸에 밴 듯한 언행도.'
아체프렌을 알아온 지도 십 년이 넘었건만, 황금비율로 만들어진 조각상처럼 아름다우나 그 완벽함으로 인하여 지독하리만큼 차가운 인상을 주었던 그가 저토록 다채로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에스피아는 이번에 처음으로 알았다.
‘그렇다면 나도 네가 어디까지 내게 굽힐 수 있는지 기꺼이 구경해주마. 아체프렌, 네가 먼저 걸어온 싸움이니 내 앞에서 네 가면이 깨지는 순간 나는 가차 없이 네 생명을 취할 것이다. 부디 끝까지 나를 잘 속여 보아라. 감탄할 정도가 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그녀도 이제 오기가 돋았다. 에스피아의 얼굴에 냉혹한 결의가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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