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표류 5화 바다를 닮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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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바다를 닮은 여인, 아이네즈
“가만 보면 자신이 다친 몸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는 것 같아요, 슈레디안은.”
아이네즈가 피식 웃으며 하는 말에 그는 어쩐지 머쓱해져 입을 다물었다. 상대의 대답에 말문이 막힌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으나, 과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만약 다른 이가 이와 같은 행동을 했다면 자신이 기분이 지금과 같지는 않았으리라. 슈레디안은 그 점이 신기했다.
아이네즈를 알게 된 지 이제 겨우 보름이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아이네즈를 다른 이들과 명확하게 구분 짓고 있었다.
어찌하여 아이네즈는 독특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녀의 무엇이 다르기에.
슈레디안은 물끄러미 아이네즈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가 무심코 던진 시선 끝에는 거의 항상 그랬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이네즈가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슈레디안은 그녀에게 시선을 가는 저를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슈레디안도 여러 가지로 힘들 텐데 큰 내색 없이 지내주는 것도, 뭐든 나서서 도와주려고 해주는 것도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일어나 조금 돌아다닐 수 있다고 해서 다 나은 건 아니잖아요. 온종일 집에만 있으면 갑갑하겠지만 나는 슈레디안이 조금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좋겠어요.”
‘마음의 여유라.’
그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짐작대로 자신의 표류와 몸에 남은 자상이 우연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바에 의한 것이라면, 예정된 일은 보지 않아도 훤했다.
세레즈 왕실 차원에서 그를 찾기 위한 수색은 없을 것이고, 머잖아 본국에서는 그의 국장이 선포될 터였다. 그리고 공석이 되어버린 그의 자리를 이복 아우인 안타미젤이 대신하게 되리라. 부왕께서 붕어하시고 태자인 저를 밀어내고 스스로 섭정왕의 자리에 올라 십여 년간 지금과 같은 순간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려왔을 계모가 어찌 이와 같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것인가.
계모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어 이복 아우인 안타미젤이 그에 앞서 보위에 오른다면 자신은 정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내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되면 흘리지 않아도 될 피를 목숨 같은 대지 위에 흩뿌려야 할 터였다. 부왕이었던 카르세오 Ⅴ세가 그러하였듯, 그리고 세레스티아 왕조의 무수한 선조들이 그러하였듯이, 그 또한 피로 얼룩진 옥좌에서 결코 평안하지 못하리라는 점을 슈레디안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그 스스로 지어낸 거짓말처럼 자신에 대해 송두리째 잊었다면 차라리 마음의 여유를 갖고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아이네즈 부녀는 생면부지의 그를 가족이나 다름없이 대해주고 있으며, 그 점 역시 자신의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생활에 큰 불만이 없다는 것과 그가 처한 상황의 절박함은 엄연하게 별개의 문제였다. 아이네즈의 말처럼 느긋해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아니한 복잡한 심경을 헤아리는 것처럼 아이네즈는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요?”
아이네즈가 한참을 바다 쪽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지라 슈레디안은 무엇이든 간에 먼저 뭔가 말을 꺼내지 않고서는 안 될 듯한 기분이 들어버렸다. 그러나 아이네즈는 오히려 그의 질문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돌리며 작게 반문했다.
“아뇨. 그렇게 보이나요?”
“아니 뭐,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뭔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요.”
“맞아요. 바다를 보고 있지요.”
순간 슈레디안은 놀림을 당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아이네즈는 슈레디안의 멍한, 하지만 약간은 불쾌해 보이는 눈초리에 아랑곳없이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글쎄요, 하지만 내가 바다를 보고 있다고 하기보다 바다가 내 눈 안으로 들어오는 거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 앉아 있으면 내가 눈을 감지 않는 이상에는 바다를 볼 수밖에 없잖아요. 이렇게 넓은데.”
조롱을 당한 듯한 기분이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넓은데.’라고 중얼거리는 아이네즈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천진난만한 느낌이라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굳은 입가를 풀고 말았다.
정말로 이상한 여인이었다, 아이네즈는. 성숙한 듯싶으면 또 천진하고, 한없이 포근하게 감싸오는가 싶으면 또 딱 부러진 언행으로 저를 당황케 한다. 그의 인생에 이와 같은 여인은 여태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네즈가 신기했고, 흥미로웠다. 슈레디안은 이것이 여인에게 가진 첫 호기심이라는 사실을 아직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난 어떤 이유가 있어서 뭔가를 열심히 바라보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요.”
“네. 슈레디안이라면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예?”
아이네즈는 그를 힐끗 돌아보며 미소 짓고는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 오래 겪은 건 아니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슈레디안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지 거기에 맞는 이유나 목적을 뚜렷하게 만들어 두는 성격이라고.”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뭐, 같이 지내다 보면 저절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슈레디안은 내가 장작을 나르거나 텃밭에서 먹을거리를 옮기거나 청소를 하는 일은 꼭 도와주지만, 아버지가 그물을 깁고 계실 때는 가만히 있죠. 기술이 필요한 일이라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얼마 전에 나무를 해주겠다고 나서면서도 어디다 쓸 것이고 얼마만큼 하면 되는지 물어봤지요. 애써서 해 왔는데 필요한 것이 아니면 곤란하니까 그랬겠죠. 그리고 또,”
“······그만해도 알겠어요. 그렇군요.”
슈레디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구 하나 감히 그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평가하려 드는 불경을 저지른 적이 없어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아이네즈의 지적이 하나같이 사실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뭔가 도와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따뜻한 밥 정도뿐이니까요.”
아이네즈의 다정함이 가랑비처럼 슈레디안의 강마른 마음을 적셔왔다. 그는 진심을 담아 답했다.
“누구에게든 아이네즈가 내게 주었던 도움 이상의 것을 바랄 수는 없을 거예요.”
그의 목소리는 손끝으로 만져지는 새하얀 모래의 감촉만큼이나 부드러웠다. 아이네즈는 그런 슈레디안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 말해줘서 고마워요. ···나는 슈레디안이 여기 머물러 있는 동안만이라도 무언가를 해 보았으면 좋겠어요. 떠오르지 않는 과거에 매달려 있기보다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는 게 슈레디안에게 더 어울린다고 믿거든요.”
아이네즈의 음성은 파도 소리에 묻힐 듯 나직하면서도 어떤 확신을 깃들인 채 그의 귓가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억지로 눈을 감지 않는 이상에는 바다를 보게 된다고 했지요. 어쩌면 사람 살아가는 일도 결국 그런 거 아닐까 모르겠어요. 내가 거부하지 않는 한 모든 일에는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것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거라는 뜻이지요?”
“예, 틀림없이.”
그녀는 우스울 만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슈레디안이 이 상황에서 그 의미를 찾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이네즈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어두워졌네요. 먼저 들어가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 너무 늦지 않게 들어오세요. 바닷가의 밤바람은 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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