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1장 분열의 조짐 1-2화 후방기지 괴멸 소식
8장 분열의 조짐
세레즈력 387년 3월,
카르테 후방기지를 괴멸시킨 미드프레드 그론레이,
적의 화약을 이용한 양동작전으로 코네세타 해군 함대와
남부 영지에 주둔중인 적의 후방부대를 교란시킨 후 본진으로 이동하다
1화. 후방기지 괴멸 소식
"뭣? "
천막 안에 놓여진 이동식 탁자의 상좌에 앉아있던 클리어트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휘둥그레 뜬 그의 푸른 눈은 절반은 경악으로, 나머지 절반은 놀라움으로 물들어 있다. 그의 입술 사이로 갈라진 음성이 흘러나온다.
"카르테가 함락당했다는 건가?"
신음과도 같은 그의 한 마디 이후, 막사 안에는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원조 병력을 이끌고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적이 떠나고 난 뒤였습니다. 성안의 식량창과 무기창도 비어있었고, 성의 관문 역할을 하였던 이세론 항구는 물론 수송선이 닻을 내릴 수 있을 만한 모든 항구가 초토화되어 더이상 배를 댈 수 없도록 구석구석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
클리어트의 오른편에 앉아있던 텁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사내가 침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곧 이어 쇳소리를 연상케 하는 쉬어터진 목소리가 그 말을 받았다.
"카르테를 후방기지로 삼지 못하게 못을 박은 것이지요. "
클리어트는 가만히 시선을 들어 자신의 왼편을 바라보았다. 인사차 처음 소개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입을 떼지 않고 묵묵히 앉아있던 사내의 메마른 눈빛이 꼿꼿하게 그를 향한다.
"음······"
클리어트는 무거운 침음성을 흘리며 비쩍 마른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내던지는 듯한 말투지만, 그의 지적은 옳았다.
단순히 함락당했다면, 재탈환하면 될 일이다. 그럴 만한 병력과 시간만 있다면, 카르테 성을 되찾는 일이야 그리 어렵지 않다. 카르테 성은 얻는 것보다 지키는 쪽이 수배는 힘들다. 그리고 그건 그간 세레즈 군과 코네세타 군이 그곳을 놓고 벌였던 수많은 공방전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되었다. 적군 역시 그 점을 꿰뚫어 보고 있던 것이다. 후방 기지로서의 카르테의 효용성은 성에 있는 게 아니다. 항구가 파괴되면 그것을 다시 건설하지 않는 한, 그곳을 후방 보급 부대의 거점으로 삼을 수 없게 된다. 분통이 터지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적의 사령관이었다 하더라도 그리 했을 테지. 클리어트는 씁쓸한 웃음이 배어 나오는 것을 의식적으로 자제하며 고개를 들었다.
"해군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테가 공격받았다는 것은 코네세타 해군 전체의 치욕이다. 이런 수치는 한 번이면 족하다. 블라이드 장군, 내 그대에게 로크라테 연안에 주류 중인 함대의 지휘를 맡길 것이다. 귀관은 해군을 전진 배치하여 추후 이런 일이 없도록 경계를 엄중히 하라. "
"명 받겠습니다! "
블라이드는 씩씩하게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절도 있는 자세로, 코네세타 전군 부사령관이자 해군사령관장이기도 한 클리어트를 향해 군례를 해 보였다. 클리어트는 고개를 끄덕여 그에 화답하며, 수색대를 풀어 아직 해상에 있을지 모를 적의 움직임을 포착하라는 명령을 덧붙였다. 막사를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클리어트는 자신 곁에 굳어진 듯 앉아있는 사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 드로와젤이라고 했던가? "
"예, 각하. "
클리어트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상대의 창백한 얼굴을 응시했다. 사내의 매부리코와 심술궂어 보일 만큼 얇은 입술을 바라보던 클리어트가 몸을 일으키며 짤막하게 지시했다.
"금일부로 귀관의 소속을 이곳으로 옮기도록."
굳어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냉랭하게 빛나는 회갈색 눈동자로 일어선 클리어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후 닫혀 있던 그의 입술 사이로 내뱉는 듯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뜻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소관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드로와젤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을 이었다.
"말 한 필만 빌려주십시오. 펜데스칼에 계신 대장군께 보고를 드리러 갈 것입니다. "
"융통성이 전혀 없군. 후방기지가 초토화되었다는 보고를 드리면, 불같은 대장군 성정에 후방기지 소속의 자네가 무사하리라 생각하나? "
"각오하고 있습니다. "
무감각하게 내쏘는 사내의 발언에, 클리어트는 낮게 혀를 찼다.
"어리석은 소리 마라. 전령은 다른 자를 보낼 것이다. "
낮게 일갈하며 클리어트는 더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건 융통성의 문제가 아니라 군의 기강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당사자인 제가 안 가면 누가 가겠습니까? 비록 소관, 끝끝내 상관을 지키지 못하고 성을 빠져나온 당장 죽어 모자랄 몸이오나, 그건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
딱 부러지는 어조다. 클리어트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싶은 심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향한 드로와젤의 눈동자는 생명이 없는 돌 조각 같은 느낌의 회갈색이다. 클리어트는 핏기 없는 상대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결국 한숨을 토해내듯 입을 열었다.
"잘못을 책임지겠다는 뜻은 가상해. 하지만 참수당하면 그걸로 끝인 거다. 멋대로 굴지 마라. 본관이 자네만큼 생각이 없어서 이러는 줄 아는가? "
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질타하듯 말을 이었다.
"살아있는 게 죄스럽다고 했나? 진정 그리 생각한다면 살아서 몇 배로 보상해라. 죽는 건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그때는 나도 말리지 않겠다. "
드로와젤은 앉아있던 그대로 굳어진 것처럼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한동안 그 모습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던 클리어트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자네 외에도 카르테에서 살아 나온 잔류병들은 모두 내가 수습할 것이다. 물론 총사령관께 인가받아야 하겠지만, 이후 본국에서 오는 보급의 총괄책임도 본관이 맡을 생각이다. 귀관을 그 부대의 선임 참모로 임명할 것이니, 자중하고 있도록. "
2. 폭발한 라셀항
"저번 전투에서 활에 맞으신 쉐트인 장군님의 상태가 나날이 악화되고 있다는데··· 사실일까. "
“글쎄··· 아예 빈말은 아닌 것 같아. 큰일이지. 안 그래도 그 일로 병사들의 사기가 이만저만 떨어진 게 아닌데. "
주거니 받거니 하는 부하들의 말은, 어딘가 맥이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 날씨 탓도 있겠지만, 유난히 느릿느릿하게 말을 몰아가는 그들의 손길에는 시큰둥한 기색이 역력하게 묻어나고 있다. 하긴 지루한 임무이긴 하다. 공략부대를 나와 항구로 향하는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듀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좀 서두르지. 이대로 날이 저물면 옮길 때 번거로워진다. "
하지만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온 듀론은 고개를 돌려 부하 장교를 향해 주의 주듯 한마디했다. 상대가 무안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것을 외면하며, 듀론은 묵묵히 먼저 말을 몰아갔다. 말발굽이 지면을 박찰 때마다 마른 흙과 함께 자갈이 가볍게 튀어 오른다. 기분 좋을 정도의 흔들림이었다.
"부사령관 각하, 저기···! "
그의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듯한 날카로운 부름이 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그가 미처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귀청이 떠나갈 듯한 광음이 울려 퍼졌다. 말을 달리던 땅마저 흔들거리는 느낌이다. 말도 놀란 모양인지, 달리다 말고 갑자기 다리를 들어 올리며 미친 듯 날뛰었다. 그는 들어 올려진 말허리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고삐에 매달렸다. 거센 울음을 토해내며 몸부림치는 말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다시 한번 세상을 뒤흔드는 듯한 폭음이 울리며 불길이 치솟았다.
"저, 저건···!! "
경악으로 가득 찬 부하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는다. 멀리 떨어져 있는 데도, 하늘 높이 치솟는 시커먼 연기가 또렷하게 두 눈에 들어온다. 듀론은 침을 삼키며, 고삐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발을 들어 말허리를 세게 걷어찼다. 박차에 옆구리를 찔린 말이 움찔하더니 이내 전방을 향해 힘차게 쭉 달려나간다. 빠르게 스치는 광경들이 어지럽게 맴을 돈다. 고삐를 쥐고 있는 손가락 신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등골이 짜릿짜릿하다. 후끈한 열기가 척추를 타고 이완되어 있던 근육을 바짝 조인다.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하늘을 뒤덮는 검은 연기, 맹렬하게 치솟는 불길과 코를 찌르는 매쾌한 냄새. 안다. 저것이 무엇의 결과물인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저 정도의 폭음이라면 자그마한 마을 하나는 거의 완벽하게 날려버릴 양이다. 대체 항구에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왜 그쪽에서 화약이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거지? 갑자기 왜? 그는 대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퍼부어 대며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달려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헤아릴 수 없는 불안감과 초조함이 그의 전신을 엄습해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매운 연기가 한층 더 강해졌다.
듀론은 항구 가까이 위치한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말을 멈추고 절망적인 눈길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탐욕스럽게 빛나는 불길이 조금도 수그러질 기세 없이 주위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넘실대고 있었다. 자욱한 연기가 일대를 완전히 뒤덮고 있다. 쓰러져 우는 말들과 망가진 인형처럼 새까맣게 타버린 시체들, 미처 옮기지 못한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식량들, 그리고 조금이나마 불길을 잡으려고 뛰어다니는 병사들. 항구는 벌집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영지를 점거하고 있는 것이 적군이라 할지라도, 공격 대상이 조국이라면 이토록 완벽하게 초토화시킬 순 없을 터인데. 아래의 처참한 광경 어디에도 망설임이나 주저함 같은 것은 엿보이지 않는다. 이건 그야말로 항구 하나를 온전히 파괴시킬 목적으로 화약을 매설해 놓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함께 서늘한 한기가 전신을 휩싸고 돈다.
"장군님···. "
악 다문 그의 입술에서 우두둑하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극도로 억제된 호흡이 입안에서 가만히 맴을 돈다.
"저어, 지시를. "
낮은 음성이 격앙되어 있던 듀론의 감정을 차갑게 마비시킨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메마른 음성이 긴장된 공기의 흐름을 타고 흩어진다.
“귀관은 공략부대로 되돌아가 병사들과 군의관을 데려오라. 그리고 귀관은 지금 곧 로크라테로 가라. 가서 클리어트 장군께 사정을 보고 드리고 병력 증강을 요청하도록. 나머지는 본관과 함께 항구로 내려간다! 빨리 움직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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