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표류 4화 슈레디안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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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슈레디안의 고민
파란 하늘에 떠 있는 조각구름 몇 개가 남쪽으로 넓게 퍼지며 옅어져 간다. 맑은 햇살 아래 반짝거리는 백사장 위로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몰려들었다.
백사장 위에 주저앉아 파도가 힘없이 부서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청년은 문득 늘씬하게 뻗은 손가락을 들어 올려 눈가를 가린 황금빛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는 소금기 어린 바다 냄새를 처음 맡아보는 것처럼 새삼스레 코끝을 찡그리며 고개를 조금 들었다.
시야 안에 들어와 있는 하늘도 바다도 모두 빛의 무리를 안고 있는 투명한 파란 색이다. 시간조차 정지한 것처럼 나른한 오후가 조금씩 저물어 가고 있었다.
한참 동안 수평선을 바라보던 그는 그 자리에 풀썩 드러누웠다. 기분 좋을 정도의 온기를 간직한 모래들이 피부에 부드럽게 와 닿았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다가 반듯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곧게 쏟아져 내리는 햇살에 눈이 부셨던 까닭이다.
‘벌써 보름이로군.’
그랬다. 그가 이곳, 뮤즈 마을에 표류한 지도 벌써 보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단정한 얼굴을 찌푸린 채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 몸에 난 상처는 거의 다 아물었다. 모두가 아이네즈의 헌신적인 보살핌 덕이었다.
신체 곳곳에 자리잡힌 흉터까지 지워지려면 한참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운신에 불편함이 없는 이상 그는 그런 자잘한 문제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현재의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본국으로, 정체를 드러내지 아니한 채 무사히 돌아가는 일이었다.
코네세타는 크고 작은 다섯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 국가였다. 코네세타에서 본국인 세레즈로 귀환하려면 반드시 바다를 건너야 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원만하지 못하였던 양국의 외교 관계는 최근 몇 년간 악화 일로를 걷다 못해 현재는 경제 문화적 교류가 완전히 단절되어 버린 실정이었다. 따라서 코네세타에서 세레즈로의 직항로를 택하려면 거대 상단이 운영하는 밀무역선이라도 얻어 타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신분을 감추고 움직여야 할 형편상 그에게는 대형 상단에 개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도도, 배편을 이용할 수 있을 만큼의 재력도 없었다. 중간 과정을 어찌 해결하여 밀무역선에 올라탄다 하여도 정부의 허가 없이 움직이는 수단인지라 응당 세레즈 본토에 있는 항구에 정박할 수 없음은 명약관화, 필시 경유지에서 다시 본토로 이동하는 경로를 재탐색해야 할 터였다.
안전을 위해서든, 이용의 편리성을 고려해서든, 다소 시일이 걸리더라도 코네세타에서 커런스로 이동했다가, 커런스에서 다시 세레즈로 움직이는 편이 합리적일 듯싶었다. 적국인 코네세타에서와는 달리 커런스에서라면 그도 운신의 폭이 훨씬 더 넓어질 터였다.
생각의 고리가 돌고 돌아 결국 장거리 여행경비 마련이라는 난제에 봉착했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렇다 할 만한 유동인구도 없고, 자급자족이 일상인 한적한 어촌에서 경비를 마련한단 말인가.’
단 한 번도 금전적인 문제로 고심을 해본 적이 없었던 그로서는 실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가야 했다.
그동안이야 몸이 불편하여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붙들려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얼추 운신이 가능해지지 않았는가. 이대로 마땅한 방도조차 없이 이런 궁벽한 시골에 틀어박혀 헛되이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고,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닦달하였다.
그는 문득 얼굴 위로 길게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느끼고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장을 보러 아침 일찍 집을 나섰던 아이네즈가 언제 돌아왔는지 자신 곁에 무릎을 두 손으로 그러모으고 앉아 있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고, 또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을 것처럼 바다의 풍경에 깊이 동화되어 차분하게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왔어요?”
금빛으로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네. 돌아오다가 슈레디안이 여기 누워있는 게 보여서요.”
슈레디안은 아이네즈가 그에게 붙여준 이름이었다.
그는 의식을 찾은 후 정체를 숨기기 위하여 기억을 잃은 시늉을 하였다. 그리 하면 자신에 대해 애써 설명할 필요도 없거니와, 상대의 호기심 어린 질문 공세도 피할 수 있어 두루 편하리라 여긴 까닭이었다.
단 하나의 거짓말로 아무것도 밝힐 필요가 없어진 그에게 아이네즈가 언제까지 그를 저기요, 라고 불러야 하냐고 물어본 건 그들이 함께 지낸 지 닷새가 지난 오후의 일이었다. 그 반문에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아이네즈에게 저를 아무렇게나 부르라고 일러뒀었다.
몸도 아프고 머리도 지끈거려 심신이 고단한데 얼마나 머무르게 될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사용할 가명 따위에 신경을 쓰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아이네즈 부녀가 저를 부를 일이 몇 번이나 있겠는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머무를 때나 몇 번 쓰다 버릴 이름 같은 것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싶었으나 아이네즈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예상외로 흔하지 않으면서도 멀쩡해서 내심 놀란 기억이 있었다.
“이것저것 많이 샀네요. 무거울 것 같으면 같이 가자 하지 그랬어요.”
아닌 게 아니라 아이네즈 옆에는 장터에서 산 듯한 옷감과 먹을거리가 몇 개 놓여 있었다.
“그다지 무겁지 않았어요. 설혹 무겁다 해도 내가 슈레디안에게 장바구니를 들게 할 리가 없잖아요. 며칠 전에도 나무해준다고 나섰다가 손바닥 상처가 다시 터져서 돌아온 걸 다 아는데.”
그는 무심코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붕대에 휘감겨 있는 왼손에는 뭔가 날카로운 것으로 깊게 베인 상처가 있었다. 단순히 풍랑 때문에 생긴 타박상이나 찰과상이라기보다는 자상에 가까운 상처인데, 문제는 그러한 상처가 생겨난 경위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 혼자만 이곳으로 흘러들게 된 것이 자연재해 때문이 아닐 수도 있었다. 아이네즈의 부친인 플로베르도 그를 건져낸 곳 근방에서 다른 이나 깨진 배의 파편은 본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만약 자신의 표류가 인위적으로 발생하게 된 것이라면 그 배후에 누가 있을지는 자명했다. 계모인 세느비엔느를 떠올린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이런 곳에 내팽개쳐져 있는 동안 왕성에서 계모와 간교하기 짝이 없는 조정 신료들이 벌일 법한 일을 떠올리니 이에 신물이 도는 느낌이었다.
그는 답답한 마음을 풀어내고자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의식이 돌아온 직후에는 온몸에 몰아치는 아픔 때문에 미처 의식하지 못했지만, 차차 시간이 흐르면서 깨닫게 되었다. 표류하게 된 원인이 있었던 날 전후의 며칠이 머릿속에서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는 사실을.
고작 며칠간의 기억이 사라진 것뿐이고 처음에는 일시적인 현상이라 여겨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아직껏 별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무언가 어슴푸레하게 떠오를 것 같아 생각을 더듬어 보면 어김없이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왔다. 그러니 기억을 잃었다는 말은 완전한 거짓말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단지 며칠간의 기억이 사라진 것도 사람을 초조하고 신경질적으로 만드는 것은 여지없는 사실이라서, 그는 아이네즈 부녀 앞에서 연기 아닌 연기를 과히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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