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5장 태풍의 눈 1화 사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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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태풍의 눈
세레즈력 386년 8월,
코네세타, 선전포고와 동시에 세레즈에 선제공격을 하다.
제국력 연대기 섭정공 세느비엔느 열전 발췌
1. 사직원
세레즈의 도성 다이레비드의 태자궁을 총괄하는 시종장 모리스 레 하제르는 책상 앞에 앉아 오랜 주저 끝에 들었던 펜을 다시 내려놓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태자궁의 시종 일을 그만두겠다는 미드프레드의 의사에 따라 왕실 문서 요건에 맞추어 작성한 사직원을 원망스러운 듯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미드프레드의 사직원을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민에 빠져 있는 것도 벌써 보름 가까이 흐르지 않았는가. 뒤늦은 자각에 하제르는 결국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하제르는 책상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 훈기를 품은 미풍이 서리가 내린 그의 앞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그는 제멋대로 부는 바람에 흩날린 머리칼을 다시 쓸어 올리며 조금은 착잡한 심경으로 미드프레드가 자신을 찾아왔던 날을 떠올렸다.
“지금 뭐라고 했나?”
책상 가득 쌓인 문건을 뒤적이면서 건성으로 미드프레드의 말을 듣고 있던 하제르는 고개를 들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사직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이 재차 반복되는 미드프레드의 또렷한 음성을 두 귀로 확인하고 나서야, 시종장은 한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모퉁이에 내려놓았다.
하급 귀족이나 평민에게 있어 왕족의 시종이 된다는 것은 곧 출세 가도로의 진입을 의미했다. 특히 왕이나 왕비, 태자의 직속 시종으로 임명되는 것은 그중에서도 그나마 이름있는 귀족의 자제나 부유한 상인의 자식들이나 바랄 수 있는 행운이었다.
어떠한 경로로 발탁되건 간에 열 두세 살에 입궁하여 성인식이 지날 때까지 왕족들의 시중을 들고나면 그 후 궁내부의 사무직으로 진출하여 그들의 출신 성분으로는 좀처럼 꿈꾸어 볼 수 없는 영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궁내부의 내규에는 열여덟 살이 되어 성인식을 치르고 나면 본인의 의지에 따라 시종직을 사임하고 퇴궐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긴 하나, 시종직 자체가 신분상승의 통로로 이용되어 온 만큼 실제로 그에 따라 사퇴하는 이는 흔치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하제르는 몇 년 동안 고생하여 간신히 잡은 기회를 간단히 내버리는 미드프레드의 심사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어처구니가 없고 기가 막히다 못해 짜증섞인 분노마저 일 지경이었다. 하제르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미드프레드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느릿하게 운을 떼어냈다.
“자네가 알고 있는 곳이라고는 여기 태자궁밖에 없지 않나.”
그러나 그는 미동조차 없이 꼿꼿이 서 있는 미드프레드로부터 어떠한 대답도 얻어낼 수 없었다. 다만 탐색하듯 바라본 그의 얼굴에서, 아니 굳게 다물고 있는 입매에서 어떠한 결의 비슷한 것을 살짝 엿보았을 뿐이다.
“혹여 다른 곳을 알고 있다손 치더라도 태자 전하의 시종이기를 포기한 자네가 함부로 넘볼 만한 곳은 없을 것이야.”
하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오히려 미드프레드의 입매에 감도는 결의는 한층 더 굳어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제르는 완고하게 입을 다문 청년를 바라보다가 혀를 차며 운을 떼었다. 이렇듯 사소한 문제에까지 개입해야 한다는 점이 한심스러웠으나, 혈기 넘치는 젊은이의 어리석은 소견을 고쳐주기 위한 따끔한 조언을 하는 것도 자신과 같은 어른의 몫이었다.
“세상만사가 다 마음대로 될 것 같은가? 세상일은 자네 생각처럼 그리 만만하지 않을 걸세.”
무표정하게 빛나던 미드프레드의 황옥빛 눈동자에 일순간이나마 사나운 감정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설마 일개 시종에 불과한 미드프레드가 상사인 자신을 상대로 지금 노기를 표출하고 있단 말인가?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사태에 어떤 황당함마저 느꼈을 때, 그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미드프레드가 답했다.
“저는 태자궁에 매인 노예가 아닙니다.”
미드프레드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시종장을 직시한 채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제 주인이신 태자 전하께서는 제게 거취의 자유를 내려 주셨습니다.”
아체프렌이 코네세타로 떠난 이후, 아니 태자의 전속 시종으로 궁내부에 이름을 올린 이래 미드프레드는 지금까지 늘 고분고분하였다. 마치 반란 귀족의 후예이자 노예에서 신분 상승한 평민이라는 자신의 이름 뒤에 따라붙는 수식어구를 자각하듯 그는 매사에 조심스러웠으며 누구에게나 공손했고, 상사인 하제르에게는 한결같이 순종적인 태도만을 취해왔다.
왕도에 파다할 정도로 소문이 난 태자의 총애를 시기하여 미드프레드에게만 불합리한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고, 그의 소관이 아닌 일을 모조리 떠넘긴 적도 빈번하게 있었지만 미드프레드는 불평불만이라고는 모르는 사람 같았다. 자신에 대한 태자의 신임을 빙자하여 게으름을 부리거나 자구책을 강구할 법도 한데도 제게 쏟아지는 질시 어린 괴롭힘을 아무 내색 없이 감내하는 미드프레드였기에 더 못살게 구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주변에서 아무리 괴롭혀도 처신에 흐트러짐 없이 십여 년을 조용히 버텨온 그였기에, 하제르는 미드프레드가 이렇듯 당돌하게 나올 수 있으리라는 점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예기치 못한 미드프레드의 반응에 놀란 그는 저도 모르게 멈칫하여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간의 정리를 생각해서 한 가지 물어봄세.”
하제르는 숨을 고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한번 미드프레드의 기세에 눌려 버린 그의 어조는 한층 수그러져 있었다.
“그래, 사직원이 수리된다면 어디 가서 무엇을 할 생각인가?”
미드프레드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왔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는 여기에서 제가 전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여기서 나가면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단 말인가?”
잡아채는 듯한 질문에 미드프레드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갔다. 하지만 이내 그는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지요.”
더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겠다는 양 미드프레드는 차분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제 의사에 대해서는 시종장님께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럼 뒷일을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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