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진흙 속의 연꽃 2화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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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해
로엘은 자신의 시야 가운데 문자 그대로 단정히 서서 보고를 마친 젊은 장수에게서 시선을 떼어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준비가 무사히 끝났다니 다행이로군. "
대수롭지 않은 투로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그는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밖에 있던 하인 하나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이내 문이 열리고 하인이 들어서서 차분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는 것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그는 짧게 지시했다.
"자네는 가서 지원군 사령관을 모셔오도록. "
"예, 영주님. "
꾸벅 인사하고 물러가는 하인의 모습을 지켜보던 슈발츠의 미간에 잔주름이 하나 더 잡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게. "
짧은 침묵 끝에 로엘 공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발언이었기 때문일까. 영주를 향한 슈발츠의 얼굴에서는 당황한 기색이 뚜렷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영주님. "
망설이는 어조로 자신을 부른 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슈발츠의 심정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던 듯, 노영주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곧 지원군 사령관이 이리 올 걸세. 그러니 내게 하고픈 말이 있다면 지금 하라는 게야. 자네 말을 듣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아무래도 지원군이 영지를 떠나기 전에는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을 듯하니. "
노영주를 향해 고정되어 있던 슈발츠의 푸른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 듯했다. 자신의 불만을 다 알면서도 병사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것을 감안하여 일부러 모르는 척 덮어두려 하나 했더니, 끝까지 모르는 체를 할 생각은 아니었나 보다.
"주공께서 이미 결정하신 일에 대해 제가 새삼 나서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여 참아 왔습니다만. "
계속 주저하며 꺼내지 못한 말을 영주 쪽에서 먼저 거론한 이상, 이제 슈발츠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할 이유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는 말아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을 주었다.
"기회를 주신다 하니,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그는 약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소관, 영주님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
회색빛이 도는 그의 푸른 눈동자가 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하크스를 지원하러 온 병사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영지를 벗어나는 것 자체가 전장 이탈에 해당하는 월권행위인데, 어찌 그리 쉽게 떠날 수 있도록 허락을 하시고, 배와 화약까지 딸려 주시는 겁니까? "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일세. "
"필요한 조치라니요? "
되묻는 슈발츠의 음성이 조금 더 올라갔다.
"자네는 하크스 지원군이 무얼 의미한다고 생각하나? "
잠시 멈칫하는 슈발츠를 약간은 착잡한 시선으로 응시하다가, 영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 첸트로빌 성의 농성을 지원하기 위한 군대와 하크스 영지의 수복을 원조하기 위한 군대, 이렇게 말일세. 내 하나 더 묻지. 그럼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얼까. "
평상시와 전혀 다를 것 없이 고요한 그 음성에서는 묘한 엄숙함 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그들이 농성 지원군이라 한다면, 그들은 아군 즉 첸트로빌 성의 농성을 돕기 위한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게야. 그게 그들의 임무인 셈이니까. 돕는다는 의미를 굳이 성안에서의 방어로만 좁게 해석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리고 그들이 영지 수복을 목적으로 한 군대라 해도 그 점은 마찬가지네. 예로부터 전장에서 야전 사령관의 결정 사항에 대해서는 국왕 폐하조차도 간섭하지 않는 것이 법도였어. 그러니 이 일은 월권 행사라 할 수 없는 성질의 일인 게지. "
"말씀하시는 뜻은 잘 알고 있습니다. "
순순한 대답과는 달리, 이 젊은 장군의 굳은 얼굴에 드리워진 불만의 그늘은 전혀 옅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로엘 공은 한눈에 간파해 낼 수 있었다. 그래, 자네의 올곧은 성정으로는 내 행동이 납득하기 어려울 게야. 영주는 내심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현재 그 군사는 우리에게 그다지 절실하지 않아. "
"예? "
"성안에 있는 아군의 기존병력은 사천 가량이지. 새로 들어온 지원군은 삼천 정도 되고. 자네가 그들을 지켜봐 왔으니 묻는 말이지만, 양쪽의 병사들이 언제까지 조용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
병사들을 효과적으로 지휘하기 위해서는 첸트로빌의 군사들과 지원군 양자 중 어느 한 쪽이 우위를 잡고 지휘권을 이양받아 최종적인 통솔을 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머릿수나 입성 시의 상황으로 미루어보건대 미드프레드의 지원군이 가지런히 로엘 공에게 포섭되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그 점을 지적하는 로엘 공의 질문에 슈발츠는 대답을 못 하고 결국 시선을 떨어뜨렸다.
"지금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마찰이 없는 게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린 서로 힘들어질 게야. 어차피 수비 위주의 농성 전략을 채택한 이상, 병사들의 머릿수가 많아진다 해서 객관적인 전력이 나아진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네. "
종전과 별다를 바 없는 영주의 나지막한 음성은 어쩐지 손에 잡히지 않는 한숨 같은 인상을 주었다.
"어쩌면 무모한 시도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아무것도 안 한 채 주저앉아 있는 것보다는 무엇이라도 시도해 보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
"제가 감히 어찌 영주님의 뜻에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저희들이 애써 지켜온 배와 화약이 그 목적을 다하지 못할까 하여···."
로엘 공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염려를 내 어찌 모르겠는가. 아군이, 우리 병사들이 배와 항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내 모르리라 생각하는가? 그래,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온 것을 서슴없이 내어주는 내 결정이 자네들로서는 못마땅하기도 할게야. 당연한 일이지. "
그는 가만히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듯한 음성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한 번 생각해 보게나. 그 배가 우리 수중에 있으면, 그건 그저 항구에 가만히 매어있는 배일뿐이지. 그러다가 혹여 전세가 기울어 항구를 빼앗기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더더욱 최악의 용도로 쓰일 테고. 누가 타든 배는 타라고 만들어진 거고, 이왕이면 우리 영지를 돕기 위해 파견된 아군이 이용하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적어도 항구에 방치해두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옳은 용도로 배를 사용하는 게 아닐까 하는데. "
슈발츠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 나 구분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다 세레즈 인인 게야. 비록 내가 직접 쓸 수 없다 하더라도, 이곳에 그저 쌓아두는 것 이상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면 난 배가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기꺼이 내줄 생각이네. "
아직껏 시선을 떨구고 있는 젊은 장수를 부드럽게 응시하며 영주가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슈발츠. 자네의 그 고지식한 성품도, 영내 병사들과 백성들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그 마음도, 내 잘 알지. 이 늙은이의 아둔한 생각이, 때때로 자네 보기엔 답답하고 고루하게 느껴질 지도 몰라. ”
슈발츠를 향한 로엘 공의 주름진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나는 자네가 우리 하크스 이외에 더 큰 것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라네. 무릇 그릇이 큰 장수는 시야가 넓은 법이거든. 내 말뜻 이해하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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