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애별리고 6화 고작 마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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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애별리고
6. 고작 마음 하나
슈레디안은 초라한 탁자 위에서 꺼질 듯이 빛나고 있는 촛불을 깊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얼마 전에 성에 다녀왔을 때만 해도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는데 불과 열흘도 지나지 않아서 우려하고 있던 일들이 한꺼번에 진전된 느낌이었다.
급작스러운 이주명령도 그렇고 플로베르의 말처럼 시국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영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영민을 성안으로 이주시키고 호구통제를 강화하는 것은 외환이나 내란이 발발했을 때 동요되기 쉬운 영내 분위기를 안정시키고 영민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영주들이 흔히 취하는 조치였다. 갑자기 바뀐 케타로스 영내의 분위기가 과연 세레즈와,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실종과 전적으로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꽤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굳어버린 듯 앉아 있던 슈레디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이 안 오는 모양이군. ”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슈레디안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플로베르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아······. 예. 그냥 이것저것······. ”
그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려 탁자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 막 들어가려던 참입니다. ”
“아니야, 마침 할 얘기도 있던 차에 잘 되었군. 잠시 앉게나.”
플로베르는 미소를 지으며 선반 위에서 새 초를 집어 들어 탁자로 가져왔다. 금방 사그라들 듯 가늘게 흔들리던 불빛이 새 심지로 옮겨붙으며 일순 환하게 주변을 밝혔다. 슈레디안의 새하얀 얼굴이 밝아진 빛에 불그레하게 비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플로베르는 다시금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아까 나가서 내 친구에게 인편을 보냈네. 지금 이스빌렌에서 분대장을 하고 있지.”
이스빌렌은 코네세타의 도성인 크롬빌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중북부의 세력지였다. 물자가 풍요롭고 상업이 번성한 영지라 훗날 귀환을 위해 일을 도모하기에 유리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는 뇌리를 스쳐 가는 계산에 대해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분대장이라면 군인이십니까?”
“음. 나와 함께 근위대에서 젊은 시절을 함께 한 친구지. ”
플로베르는 다시 알 수 없는 쓴웃음을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슈레디안은 플로베르의 남달리 건장한 체구와 진중한 태도에 대한 하나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소개장을 써 줄 테니 일단은 그걸 가지고 이스빌렌으로 찾아가 보게나. 마크가 어떤 방법으로든 자네가 머무를 만한 곳을 마련해 줄 걸세. 일단은 자네를 내 아내 쪽의 먼 친척이라 해 두었으니 그렇게 알고. 비록 몰락한 집안이라 할지라도 귀족의 핏줄이라는 점은 틀림없으니.”
“아······. 예?!”
듣고는 있었지만,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슈레디안은 놀란 음성으로 반문했다. 아이네즈가 몇 번인가 그녀의 모친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지만, 그녀가 귀족이었다는 소리는 꺼낸 바 없었다. 그러고 보니 플로베르가 예전에 근위대에 있었다는 말조차 한 적 없었다. 신분제 사회에서 귀족이나 기사의 혈통은 자부심의 근간이 되게 마련인 법인데도 말이다.
“내 아내는 귀족이었네. ”
“예······. 그렇습니까? ”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난 분명 평민이라네.”
뭔가 말을 꺼내려던 슈레디안은 플로베르의 묘하게 굳은 얼굴을 보고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삼 년 전에 세상을 떴다는 아이네즈의 모친은 플로베르에게도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인 모양이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저 금실이 좋은 평범한 부부라 하여도 상처한 지 3년이면 아직 그리움이 남을 수밖에 없을 터인데, 그들 사이에는 신분을 뛰어넘은 유대가 있었다.
계층과 계급이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에서 사랑이든 우정이든 신분을 뛰어넘은 관계에는 응당 남에게는 말하기 쉽지 않은 구구절절한 사연이 숨어있게 마련이었다. 그와 그의 벗인 미드프레드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사려 깊은 마음으로 그는 플로베르의 사연을 덮어주었다.
“내일 당장 떠나라고 하는 말은 아닐세. 준비가 끝나면 알려주게. ”
침묵 끝에 플로베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뇨. 제 거취를 옮기는 문제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떠나겠습니다.”
플로베르는 평소답지 않게 흔들리던 딸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슈레디안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슈레디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좀 더 강한 어조로 덧붙였다.
“아이네즈, 아니 오늘 일로 충분히 느끼셨으리라 봅니다만 이제 제가 여기서 머무를 수 없는 순간이 온 것 같습니다. ”
자신의 품 안에서 흐느껴 울던 아이네즈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팠지만, 그렇기에 더욱 그녀에게 혼란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자신은 끝까지 여기 머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떠날 거라면 서로에 대한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잘라내는 편이 현명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이었지만 플로베르를 향한 그의 눈빛만은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게 빛나고 있었다.
“차라리 잘된 것일지도 모르지요. 진작 떠났어야 했을 것을, 출발이 늦어져 본의 아니게 너무 많은 폐를 끼쳐드렸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제가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편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반복되는 슈레디안의 말은 플로베르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타이르려는 듯 보였다.
플로베르는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짐작대로라면 딸아이의 감정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다. 사려 깊고 신중한 딸이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뜨내기에게 마음을 주었다가 상처받는 건 아비로서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니었지만, 같이 지내는 동안 그도 슈레디안이 보기보다 건실하고 착한 청년이라는 걸 느끼게 되어, 이대로 그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다면 아이네즈의 짝으로 나쁘지 않겠다고 여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주변 상황이 여의치 않은 이상 플로베르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케타로스는 토착 세력이 강한 변경지역이었다. 유동인구가 적고 인적이 드문 시골이기에 더더욱 이방인에게 냉정하다. 이들이 외지인에게 얼마나 배타적인지 이십여 년 전에 신변의 위협을 받는 아내를 데리고 도망쳐 나와 그 스스로 뼈아프게 겪었기에, 아직 젊고 앞길이 창창한 슈레디안에게 같은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일이 돌아가는 정황이 심상치 않은 작금이라면, 슈레디안이 거쳐야 할 고초는 생각보다 더 가혹할 수도 있었다.
“자네의 생각이 그렇다면······. ”
“그동안의 일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
플로베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표하자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먼저 방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눈길을 떼어낸 슈레디안은 고개를 돌려 탁자 위에서 타고 있는 촛불을 껐다. 그리고 저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 깨물며 자신의 방으로 통하는 사다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문득 멈추어 선 그는 발걸음을 돌려 아이네즈의 방 앞에 섰다. 밤의 정적 사이로 아이네즈의 숨소리가 전해져 왔다.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나지막하고 규칙적인 그녀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슈레디안은 문고리에 가져갔다. 어둠 속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실낱같은 달빛에 의지해서라도 그녀의 잠든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떠날 수 있다면. 그러나 다음 순간 슈레디안은 입술을 깨물며 손을 내렸다.
그녀를 향한 마음이 그저 호기심이나 일시적인 유희 같은 가벼운 감정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이 적대국인 세레즈의 차기 보위를 이을 계승자인 이상 끝까지 책임질 수 없는 관계였다. 원해서 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에게는 이미 혼인을 약속한 약혼녀가 있었고, 그것 외에도 그에게는 고작 마음 하나보다도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니 이곳에 그 어떤 미련도 남겨선 안 된다고 그는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는 아이네즈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른 채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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