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전설의 시작 7화 조력요청(9장 인명록)
7. 조력 요청
뮤켄은 멈칫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순간적으로 잘못 들었는가 했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방 너머 복도로부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사령관이 보낸 사람인가. 아니면 영주가? 그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보일 듯 말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어지간한 사건이 터지지 않은 이상, 사람을 보내 자신을 찾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시각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정리하고 있던 서류 쪽으로 다시 시선을 떨어뜨리며 짧게 말했다.
"들어오시오."
밖에 서 있던 이는 그 말을 퍽 오래 기다리고 있었던 듯,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늦은 시각에 실례합니다. "
자연스럽게 듣고 있는 이의 주의를 끌어당기는 맑은 울림, 이제는 완전히 귀에 익어버린 그 차분한 음성에 이끌리듯 뮤켄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미드프레드였다.
"···사령관 각하."
나직한 중얼거림이 뮤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한 당황함과 놀라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표정이었다.
"하시던 일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색한 얼굴로 미소 짓는 사령관에게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뮤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닙니다. 그보다 우선 좀 앉으시지요. "
"고맙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고 의자에 앉은 사령관에게 다가서며 뮤켄은 매우 짧은 순간 반듯한 미간을 좁혀 보였다. 올려야 할 보고는 잊은 적이 없고 지원군과 첸트로빌 성안의 병사들 간에 별다른 마찰도 없는 이상, 그가 이런 시간에 자신을 따로 찾아올 일이라는 것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오후에 보고할 때 누락된 것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어쩐 일이십니까? "
약간 긴장했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은 듯한 뮤켄의 음성과는 대비되어, 한층 더 가볍게 들리는 미드프레드의 목소리에서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태평스러움 마저 묻어나고 있었다.
"아, 예. 앞으로의 일에 대해 장군과 의논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그런 용무로 장군을 찾기에는 조금 늦은 시각인 듯도 합니다만. "
민망한 기색으로 살짝 눈썹을 찌푸리는 미드프레드를 보던 뮤켄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전시에 밤낮의 구별이 어디 있겠습니까? "
그는 고개를 흔들어 사령관의 사과를 가볍게 만류하며 특유의 온화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차후의 일이라 하시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저는 하크스를 떠날 생각입니다. "
미드프레드의 느닷없는 발언에 순간적으로 뮤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크스 영지를 떠난다고? 믿을 수 없었지만, 지금 눈앞의 이 사령관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참모장을 바라본 뒤, 미드프레드는 진지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크스 영지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끝났습니다. 농성하는데 지휘 체계가 다른 병력이 늘어봐야 걸리적거리기만 하지요. 별달리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 이 성안에 머무는 것은, 결과적으로 한정된 식량 문제를 악화시키는 일이 될 뿐입니다. "
뮤켄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직설적인 감이 없진 않았지만, 굳이 틀렸다고도 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사실 미드프레드가 끌고 온 병력수는 참으로 애매했다. 성 밖에 있는 적군에게 정면승부를 걸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성안에서 기존 병력과 연계해서 농성하기에는 거치적거린다. 영주 입장에서 봐도 3천이라는 병력은 끌어안기에는 부담스럽고, 무시하기에는 불편한 존재였다.
비록 영주가 특유의 인덕을 발휘, 싫은 기색 하나 없이 하크스 지원군을 감싸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 극히 이례적인 경우라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뛰어든 격인 지원군과 성을 지키고 있던 기존 병력 간에 특별한 알력이나 갈등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도리어 놀라운 일이라 할까. 지금처럼 양측 모두 비등한 병력으로 수적 우세를 점할 수 없을 경우엔 더더구나 말이다.
그간의 군 경험을 바탕으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발발할 가능성이 있는 불미스러운 사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뮤켄이었지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군을 어우르는 영주의 놀라운 포용력과, 작전을 수행할 때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 부대 장악에 관련된 일을 참모장인 뮤켄에게 일임하고 무심한 태도로 일관하는 미드프레드의 비권위적인 태도가 아니었다면, 짧은 기간이나마 불편한 사건 하나 없이 두 군대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했으리라는 것을.
이 어린 사령관은 한 부대를 이끄는 최고 위치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에 대한 통제를 싫어하고 자신의 지휘권에 놀랍도록 초연했다. 그랬기에 뮤켄으로서는 미드프레드가 이렇듯 민감한 사안을 지적했다는 점이 조금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사령관께서 그리 결정하셨다면, 그에 따르는 것은 소관의 의무이자 도리입니다. "
어떤 이유에서건 지원군이 지원해야 할 영지를 떠난다는 것은 분명히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이다. 하지만 이 부대의 사령관은 미드프레드였고, 그 결정이 아군에게 도움이 되는 한 본인의 생각과 다소 배치되더라도 자신은 사령관의 결정 사항에 대해 전적으로 따라야 할 위치에 서 있었다.
"그럼 그 이후의 행로에 대해서는 따로 염두에 두신 바라도 있으신지. "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뮤켄의 어깨너머 책상 모서리에 시선을 주고 있던 미드프레드가 순간적으로 피식 하고 웃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 방법이 틀렸던 것 같군요. 제 말은, 그러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미드프레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뮤켄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웃음기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저는 지금 사령관으로서 참모장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
뮤켄은 아연한 눈빛으로, 정색을 하고 있는 어린 사령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미드프레드는 시선을 떨어뜨리며 묵직한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장군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는 제 진심을 밝히는 것이 도리겠지요. 제가 말하는 방법이 모자라 순서를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
이 사령관이 말하려고 하는 바를 짐작할 수 없기도 했지만, 뮤켄은 일단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쪽을 선택했다.
“말씀하십시오.”
"저는 출세를 원합니다."
담담한 어조로 운을 떼어낸 사령관을 향한 뮤켄의 얼굴은 여느 때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말에 깃든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직설적이며 속물적인 욕망 때문이 아니었다. 그간 자신이 겪어온 미드프레드와 출세를 희망한다는 그의 말이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아 당혹감이 커진 탓이었다. 그러나 뮤켄이 무어라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미드프레드가 다시 운을 떼었다.
"그저 단순한 출세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형식적인 자리 따윈 필요 없습니다. 저는 제 발언과 행동이 태자 전하께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는, 그러한 위치에 올라서고 싶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죠."
미드프레드의 마지막 발언은 어쩐지 섬뜩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태자 전하께서는 반드시 돌아오실 테니까요."
뮤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향해 또렷하게 고정된 그의 황옥빛 눈동자가 점차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제가 그러한 위치에 서기 위해서 장군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저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
스물세 해를 살아오면서, 누군가의 시선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화 중에 상대를 외면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라고 늘 생각해왔고, 자신이 그런 떳떳하지 못한 감정을 느끼는 날이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뮤켄은 정말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단호하다 못해 위협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 어린 사령관의 눈빛을 외면할 수만 있다면. 하지만 끝을 알 수 없는 어떤 절박한 기운을 깃들여 한층 더 깊은 빛을 품은 그 황옥빛 눈동자는 뮤켄이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먹이를 눈앞에 둔 배고픈 맹수의 눈빛과도 같았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압니다. 지금부터 제가 가려고 하는 길은 여왕 폐하의 뜻과 명백하게 배치될 테니까요. 그렇기에 사령관으로서가 아니라 미드프레드 그론레이 개인 자격으로 장군께 협력을 부탁드리고 있는 겁니다. 장군께서는 제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결코 가질 수 없을 것들을 이미 지니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태자 전하를 위해서, 앞으로의 세레즈를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장군과 함께 군을 이끄는 동안 한층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의, 아니 부디 태자 전하의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숨이 막혔다.
아체프렌과 안타미젤, 그리고 세느비엔느 여왕과 본가인 콜드베폰의 가족들. 이 한순간의 대답으로 바뀌게 될지도 모를 수많은 것들을 그는 생각해야 했다.
뮤켄은 새어 나오는 한숨을 지그시 내리누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중요한 것은 결국 자신의 마음일 뿐이다.
뮤켄은 머릿속을 스쳐 가는 무수한 생각을 물리친 채로 한 가지만을 떠올렸다. 나는 이 사람을 돕고 싶은 것일까. 이토록 절박한 목소리로 자신의 도움을 청하는 이를, 정말 진심으로 도와주길 원하는가.
"···이곳으로 부임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
미드프레드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어떤 압도적인 기운에 떠밀리듯 뮤켄이 입을 열었다.
"방금 하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제와 새삼 제 대답이 필요하십니까? "
아직 앳되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사령관의 하얀 얼굴에 그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환한 미소가 번져가기 시작했다. 뮤켄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아닙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뮤켄 장군님.”
그는 일어나 뮤켄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장군을 믿습니다."
비록 짤막한 한 마디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음을, 뮤켄은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미드프레드 그론레이*
밀시언 지휘 하의 아나브릴 방어군 진지에 도착한 이래 첸트로빌 입성을 위한 계책에 골몰하여 성공시킨 후 전쟁 이후 아체프렌의 귀환을 대비하여 뮤켄에게 조력을 구한다.
*마세르 라 뮤켄*
미드프레드를 도와 첸드로빌 입성전을 성공시키고, 미드프레드의 조력 요청에 승복하여 아체프렌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한다.
*크로젤 라 메이샤드 /도트 클로로슈 *
미드프레드의 작전에 의거, 보습대를 기습할 전위부대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능숙한 코네세타 어 실력을 기반으로 도트 클로로슈라는 가명으로 적의 진영에 잠입하여 적의 보급창을 불태운다.
*에드윈 그란델*
하크스 영주의 가신, 부상을 입은 채 아나브릴 방어군에 의탁 중이었으나 미드프레드를 만나게 되어, 그의 첸트로빌 입성 전략을 돕는다.
*레니크 라 밀시언*
아나브릴 방어군의 사령관, 미드프레드의 작전에 조력한다.
*듀론*
코네세타 첸트로빌 공략부대의 부사령관, 사령관 쉐트인을 대신하여 신분을 위장한 채 잠입한 메이샤드를 만난다.
*쉐트인*
코네세타 첸트로빌 공략부대 사령관
*에딘*
코네세타 첸트로빌 공략 부대 소속 말단 사병
*몬셀로*
코네세타 첸트로빌 공략부대 소속 말단사병, 세레즈의 기습을 처음으로 알아차린다.
- 작가의말
9장 끝
감사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