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전설의 시작 1화 위장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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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전설의 시작
세레즈력 387년 1월,
불패의 신화, 미드프레드 그론레이,
첸트로빌 입성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두다
- 제국력 연대기 섭정공 세느비엔느 열전 발췌
1. 위장 잠입
밤하늘을 총총하게 수놓고 있는 별빛을 등불 삼아 긴 행렬이 대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수십 여 개의 수레를 이끄는 말들의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고 주위로 울려 퍼졌다. 선두에서 대열을 이끌어 가고 있던 메이샤드가 뒤를 돌아보며 낭랑한 목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했다.
“지금까지도 잘했으니 앞으로도 문제없어. 힘내자. 우리의 목적, 잊지 않았겠지? ”
메이샤드는 서늘한 밤기운을 차단하기라도 하려는 듯, 바람결을 따라 펄럭이는 망토를 자신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묵묵히 걷고 있는 동료들의 긴장한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본 다음 조금 목소리를 낮춰서 덧붙였다.
"자 다들 심호흡 한 번씩 해. 이 구릉만 넘으면 공략부대에 도착한다."
구릉 지대에 난 어두운 샛길 너머로, 불빛과 함께 하크스 영내 코네세타 군 첸트로빌 성 공략 부대의 진영이 어렴풋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각종 군수 물자를 가득 실은 수송 대열이 진영 입구에 다다르자, 거친 목소리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멈춰라! "
잔뜩 경계 태세를 갖추며 수송대를 가로막는 보초병들을 힐끗 보며 메이샤드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은은한 달빛 아래 은색 가루를 뒤집어쓰고 있는 듯한 그의 머리카락이 그 반동을 따라 가볍게 출렁였다.
"카르테 후방 기지의 총관인 테세르 장군의 명에 따라 출발한 보급부대다. "
“분명 낮에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왜··· ”
예정대로라면 오늘 오후에 들어왔어야 할 보급대가 한밤중에 도착했으니 의아하기도 하겠지. 메이샤드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조심스럽게 되묻는 그 병사를 향해 툭 내뱉었다.
“보초에게 그런 것까지 보고해야 하는가? ”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에 대꾸할 생각도 못 하고 우물거리는 병사들을, 메이샤드는 조금은 짜증 섞인 어조로 채근했다. 그에 따라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들 중 두어 명이 수레 쪽으로 다가갔다. 확인차 수레의 덮개를 들어 올리자, 그 안에 있던 새 마구와 가죽, 염료와 식량 등의 여러 가지 냄새가 섞여들며 그 주위에 서 있던 병사들의 코를 찔렀다.
병사들이 수레를 확인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메이샤드는 자신 옆에 서 있던 건장한 체격의 병사에게 낮은 음성으로 몇 마디를 지시한 후, 다시 보초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수레의 내용물이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보초병들은 막아서고 있던 길을 열었다.
"통과하십시오. "
수레들이 하나 둘 진영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그가 문득 보초병 중 하나에게 몸을 돌렸다.
"사령관께로 안내 바란다. "
보초병은 더 이상 군말 없이 그를 공략 부대의 사령관 쉐트인 장군의 막사로 안내했다. 입구에게 한참 걸어 진영 가운데에 이른 병사는 흰색 펠트 천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막사 앞에서 멈춰 서서 그것을 가리켰다.
"저기가 쉐트인 장군님의 숙소입니다. "
그는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오? "
붉은 깃발이 달려있는 사령관의 막사 입구를 지키고 있던 다부진 체격의 병사 하나가 날카로운 창을 겨누며 그를 막아 세웠다. 메이샤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수송대를 인솔해온 클로로슈다. 사령관 각하께 보고 드릴 일이 있어 찾아왔다. "
그리고 그는 가슴에서 신분을 증명하는 용 문양의 패를 꺼내 보였다. 그러나 근위병들은 완강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이미 밤이 깊었습니다. "
"급한 일이라고 말했을 텐데. "
"사령관 각하께서는 침소에 드신 이후에는 보고를 받지 않으십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오십시오. "
정중한 태도였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마음을 바꿔 그를 막사 안으로 들여보낼 의사는 전혀 없는 듯했다.
"중요한 일이니 이 야심한 시각에 찾아온 것 아니겠는가?"
메이샤드는 자신 앞을 가로막은 창 하나를 거칠게 밀어젖혔다. 주위가 시끄러워지자 주변에 있던 병사들도 하나 둘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왜 이리 소란스러우냐. "
조용하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가 어깨 너머에서 들려왔다. 실랑이를 벌이던 근위병 중 한 명이 뒤에 서있던 부사령관을 발견하고는 당황한 기색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예, 이 자가 사령관을 뵙겠다고 소란을 피우기에... "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젊은 장군은 한 걸음 다가서며 주의 깊은 시선으로 메이샤드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본관은 이 부대의 부사령관인 듀론이다. 귀관의 소속 및 성명은? "
가만히 서서 한동안 상대를 훑어보던 젊은 장군의 입술에서 단정한 느낌의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관 테세르 장군 휘하의 카르테 후방 부대 소속 도트 클로로슈라 합니다. "
"귀관이 오늘 오후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수송대의 총책임자인가? "
"아닙니다. 소관, 제랄딘 장군을 대신하여 수송대를 인솔했을 뿐입니다. "
마치 그러한 질문이 나오리라고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재빠르게 답하는 그를 보며 듀론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가. 그대의 보고는 내가 받도록 하지. 따르게. "
그는 먼저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사령관 막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군막 앞에서 멈춰선 그는 잠시 뒤따라 오는 자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곧장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귀관의 행색을 보니, 들어야 할 이야기가 제법 많을 듯 하군. "
어두운 곳에 서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막사 안에 들어서는 클로로슈라는 자는 그의 예상보다도 훨씬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열 대엿 정도 되었을까. 잡티 하나 없는 흰 피부 때문인지, 대강이나마 지혈해 두기 위해 이마를 동여맨 천 사이로 배어 나온 검붉은 핏덩이가 한층 더 선명해 보인다. 일렁이는 횃불의 불그스름한 기운에 반사되어 언뜻 금발인지 은발인지 구분이 안 되는 그의 머리칼 곳곳에도 적의 피인지, 혹은 그 자신의 피인지가 묻어 붉게 젖어 있었고 그가 입고 있는 갑옷도 여기저기 연결 고리 부분이 부서져 있는 게,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일을 당한 듯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
오늘 오후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수송대가 이렇게 늦게 도착한 것이나, 인솔 책임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상대의 심상치 않은 부상 등으로 미루어 일어났을 만한 일들을 떠올려 보며 듀론은 상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서 있던 그가 뭔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는 듀론이 앉아있는 탁자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가 들고 있던 투구를 약간 거칠게 내려놓았다.
"이곳으로 오던 중 적에게 예기치 못한 기습을 당했습니다. "
카랑카랑하게 울리던 종전의 목소리와는 달리 지금 그의 음성은 조금 잠겨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럼 그 투구는...? "
"예, 인솔대장이었던 제랄딘 장군의 것입니다. "
약간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의 어깨가 잘게 떨리는 듯했다. 피에 젖어 흔들리는 그의 머리카락을 응시하고 있던 젊은 부사령관의 눈동자도 일순 흔들리는 듯 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겨우 이런 것뿐이었습니다. "
울음을 삼키는 잔뜩 쉰 목소리였다.
"그래서 도착이 늦어졌던 거로군. "
한숨 섞인 어조로 나직하게 되뇌며, 듀론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기타 피해는? "
잠시 후에 이어진 듀론의 음성은 놀라울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수레 다섯 대 분량의 건초와 군량미가 불에 탔습니다. 그 외 교전 중 대장님을 비롯하여 오십 여명의 병사들이... "
이렇다 할 만큼 방비 태세를 갖추고 있지 못한 수송 대열이 협로에서 갑작스러운 기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로 피해를 최소화했다면, 그나마 상당히 효과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그 대열에 속해있던 병사들의 심정을 객관적인 척도로 잴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듀론은 살짝 한숨을 깨물었다.
"귀관은 적의 목적이 뭐라고 보나? "
"잘 모르겠습니다. 일반 백성이 섞여 있는 것 같은 허술한 외양과는 달리 놀라울 정도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수상하고, 아군의 영역권 안에서 적이 그렇듯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도 의아할 뿐입니다. 단순히 식량을 갈취하러 나타났다고 보기에는 군수 물자에 전혀 집착하지 않은 점이 이상하고, 수송 대열의 파괴가 그 목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후퇴 시점이 지나치게 빨랐습니다. "
뭔가를 생각하며 침묵을 지키던 듀론이 고개를 들어 올려 상대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알겠네. 내 내일 아침이 밝는 대로 사령관께 보고 드리고 지시를 받도록 하지. "
듀론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쓰러울 정도로 여러 보이는 동안을 하고 있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네. 아까 사령관 각하의 막사 앞에서의 일은 과히 언짢게 생각하지 말게나. "
듀론을 향한 그의 밝은 녹색 눈동자에 순간 의미를 알 수 없는 야릇한 기운이 스치는 듯했다. 하지만 듀론이 그 빛을 미처 눈치채기도 전에, 그는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제가 감히 사령관께 불만을 가질 수는 없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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