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3장 폭풍전야 1화 태자의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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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폭풍전야
세레즈력 386년 5월,
세레즈의 섭정공 세느비엔느,
적국의 영역에서 실종된 왕위 계승자의 행방과 관련하여
공공연히 유감을 표시하고 진상 규명과
책임 추궁을 위한 사자를 코네세타에 파견하다
제국력 연대기 섭정공 세느비엔느 열전 발췌
1. 태자의 실종
어느새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가 아치형 유리창을 통해 복도 안쪽으로 살며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빛이 한 차례 어둠을 몰아낸 자리에 조각상과 장식장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복도 가장자리에 조심스레 머물고 있던 새벽녘의 마지막 어스름이 환한 햇살에 더 버텨내지 못한 채 힘없이 물러선다.
선명하게 밝아오는 그 복도 위를 한 청년이 걸어가고 있었다. 길게 뻗은 대리석 복도에는 그 외에는 다른 누구의 인기척도 없었다. 태자궁 전체가 이른 아침의 고요 속에 잠들어 있는 가운데, 오직 청년의 발걸음 소리만이 낭랑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단정한 걸음걸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옷차림은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왕가의 문장이 섬세하게 새겨진 은색 단추로 장식된 짙은 색 상의에서부터 우아할 정도로 긴 손가락 위를 살짝 덮고 있는 순백색의 소맷자락까지 그야말로 단정함 그 자체인 모습이다. 유일하게 자유로운 흔적이라고는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가볍게 출렁이는 흑갈색의 긴 머리카락뿐이랄까. 그러나 그마저도 목덜미 근처에서 검정 끈으로 가지런히 묶어 전반적으로 깨끗한 느낌의 그의 용모를 조금도 흩뜨리지 않았다.
표정이 없는 새하얀 얼굴과 대조적으로 짙은 곡선을 그리고 있는 양 눈썹 아래 위치한 아름다운 황옥빛 눈동자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우수가 배어있었다. 미끄러지듯 쭉 뻗은 콧날 아래 꽉 다문 입술은 여인처럼 예쁜 느낌은 아니지만, 주위의 시선을 단번에 불러모을 수 있을 만큼 유려한 이목구비였다. 핏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우윳빛 피부 탓일까. 특별히 동안은 아니지만, 이제 삼 개월만 지나면 열아홉 살이 되는 그의 나이를 떠올려본다면 확연히 앳되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청년, 아니 미드프레드는 끝없이 이어져 있을 법한 기나긴 복도를 돌아 이윽고 고풍스러운 문양이 조각된 커다란 문 앞에서 멈추어섰다. 그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들고 온 물건을 바닥에 내려놓은 채 잠시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이 방의 주인이 자리를 비우고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문 앞에서 매무새를 단정하게 가다듬게 되는 것은 비단 반평생에 걸쳐 몸에 익어버린 습관 탓만은 아니었다.
이 방의 주인이자 이 나라의 왕위 계승자인 아체프렌이 왕명을 받고 코네세타로 떠난 이후 지금까지 반년 넘도록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태자의 방을 청소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 것처럼, 미드프레드에게 있어 그것은 일종의 기도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하루빨리 아체프렌이 무사히 세레즈로, 도성인 다이레비드로, 그리고 태자궁의 이 방으로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의 발로였다.
코네세타와 커런스에 파견된 공식 사절로서의 모든 업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세레즈의 왕위 계승자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함께 출발했던 커런스의 호위 선단은 삼국(세레즈, 코네세타, 커런스)이 상호 불가침을 약정한 공해 앞에서 돌아갔고, 그 이후 공공해역을 지난 아체프렌은 코네세타가 관할하는 항구 베네리타에서 항해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받고 출발한다는 연락을 끝으로 소식이 끊겨버렸다. 그렇게 아체프렌이 바다 한가운데서 행방불명 되어버린 지도 벌써 두 달 가까이 접어들고 있었다.
실종된 태자의 안위를 그 누구보다도 걱정하는 미드프레드였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내보일 수가 없었다. 아체프렌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는 여왕이 현 정권을 쥐고 있는 것을 알면서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체프렌의 최측근이었다는 이유로 어딜 가나 태자를 적대시하는 세력의 주목을 받는 자신이 아니던가. 제 주인에게 누가 될 바에야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온 미드프레드였다.
미드프레드는 무거운 한숨을 토해내며 손을 들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태자의 무구를 손질하기 위해 들고 들어온 도구를 탁자 위에 가지런히 올려둔 그는 천천히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커튼을 걷어내자 햇살이 방안으로 곧게 부서져 내리며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미드프레드는 방 안쪽으로 드리워진 빛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선선한 아침 공기가 피부 속에 스며들며 머리를 맑게 만들어 주는 기분이었다.
창가에서 몸을 돌린 미드프레드는 새삼스럽게 방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아체프렌이 앉아서 책을 읽던 가죽 의자, 그와 체스를 즐기곤 하였던 상아로 만들어진 탁자, 그가 자주 찻잔을 올려놓던 벽난로 위, 그리고 기대서 있기를 좋아하던 창가, 그러다가 벽에 걸려 있던 순백색 갑옷에서 눈길이 멎었다.
벽에 걸려 있는 여러 벌의 갑옷 중에서 유독 미드프레드의 시선을 잡아끈 전투용 갑주는 아체프렌이 작년에 커런스의 국왕 유스티안 Ⅶ세로부터 15세 생일 축하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햇살 아래 눈이 부실 정도로 순백색으로 빛나는 은색 갑옷에는 세레즈 왕가의 문양인 황금 사자가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박혀 있었다. 공작 깃털이 달린 은빛 투구에서 긴 장갑, 정강이받이를 지나 발뒤꿈치에 부착된 앙증맞은 크기의 황금빛 발차까지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아체프렌이 코네세타로 떠나던 날의 모습이 미드프레드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떠올랐다. 떠나기 며칠 전 여왕의 급작스러운 부름을 받고 본궁에 다녀온 아체프렌은 이 갑주 옆에 서서 문책 사신의 임무를 띠고 코네세타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그에게 전해주었다.
조공의 허술함을 묻는다는 명목하에 아체프렌을 적국인 코네세타에 보내버리면서도, 타국으로 향하는 외교 사절단의 구성은 왕실의 위엄과 권위에 부합하도록 궁내부에서 전담해야 한다며 자신의 수하로만 가득 채운 여왕이었다.
일국의 태자가 적대 관계에 놓인 국가로 가는데도, 태자 자신의 근위대는 물론 태자궁의 시종장이나 시녀장 하다못해 직속 시종으로 그를 최측근에서 보좌하던 자들마저 배제되었다. 함정이라고 격분하던 자신에게 아체프렌이 했던 말이 바로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궁내부에 내 의견을 반영하고자 했지만 어쩔 수가 없구나. 피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쉽진 않겠지만 너는 이곳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도록 해라. 나는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너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때까지 버티는 거다.”
선물 받은 갑옷의 건틀릿 끝을 만지작거리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아체프렌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기우이길 바라나 내게 불의의 사고가 생긴다면, 네게는 반드시 어떤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지금보다 더 자중자애하여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내가 왔을 때 네가 내 앞에 없으면, 나는 죽어서도 미드프레드,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그리 말하던 아체프렌의 눈빛을 미드프레드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미드프레드는 불길한 생각을 지우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는 그의 갑주와 무구를 끌어와 기름칠을 하기 시작했다.
서른두 살의 나이로 서거한 세레즈의 34대 국왕 카르세오 Ⅴ세에게는 아체프렌과 안타미젤이라는 두 명의 왕자가 있었다. 선대왕의 적장자이자 세레즈의 왕위 계승자인 아체프렌은 왕비 로제스티나의 소생이었고, 선왕의 차남인 폰다 대공 안타미젤은 선왕의 계비인 줄리에트의 소생이었다.
세레즈력 377년 국왕이 젊은 나이로 서거하자 당시 일곱 살에 지나지 않았던 태자에게 정사를 맡기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판단 아래, 아체프렌의 성인식과 함께 대관식을 거행하기로 약조하고 선왕의 계비였던 줄리에트가 섭정 위에 오르는 이례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친가의 후원과 세레즈티아 왕실 종친들과의 긴밀한 접촉 끝에 섭정을 거쳐 여왕의 자리에까지 오른 세느비엔느 1세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태자를 밀어내고 친자인 안타미젤을 왕위에 올리고자 하였다. 왕비의 보위 계승 이후 지금까지 근 십 년간 아체프렌과 안타미젤은 세레즈의 왕위 승계 문제를 둘러싸고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고 이는 적국인 코네세타에까지 널리 알려질 만큼 유명한 사실이기도 했다.
그들의 불편한 관계를 공공연히 드러내기라도 하려는 양, 한 나라의 보위를 이을 태자가 적의 영해에서 실종되었는데도 여왕은 근 두 달 동안 실질적인 수사는 물론, 코네세타에 그 책임을 묻고 수사에 협력을 요구하는 최소한의 성의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실종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조사는커녕 도성과 세레즈 상류 사회에서는 은연중에 아체프렌의 사고를 사망으로 연결짓는 방정맞은 소문마저 떠도는 실정이었다.
그 배후에 여왕과 친여왕파 인사들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간파해낼 수 있는 만큼 아체프렌의 사망이 기정 사실화되는 것 역시도 시간문제였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태자의 전속 시종으로 상급자의 허가 없이는 태자궁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마치 새장 속의 새처럼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드프레드는 초조해지는 심경을 애써 억누르며 기름칠을 끝낸 무구를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그는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방안을 서성거렸다.
하지만 이제 더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 속에 내던져져서 초조하게 아체프렌의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궁 안에 떠도는 흉흉한 소문 속에서 걱정 외에 아체프렌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주저앉아 있어야 한다면 차라리 심장이 터져 버리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나으리라. 하다못해 이 궁을 뛰쳐나가 그의 행방이라도 찾아다닐 수 있다면. 미드프레드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랬다. 아체프렌이 없는 태자궁 따위에 미련을 두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가 없는데 그의 처소 따위에 연연하여 어쩌자는 것인가. 망설이지 말고 떠나자. 시종 일을 관두면 물론 그만큼 위험해질 수도 있지만, 또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렇기에 눈치 보지 아니한 채 행동할 수도 있었다.
차츰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한 복도 너머에서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섞여들고 있었다.
“이봐, 미드프레드! ”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는 미드프레드의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돌아선 그에게 동료 시종 하나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빠른 어조로 대꾸했다.
“역시 여기 있었군. 시종장님께서 부르시니 빨리 가봐. ”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이참에 시종장에게 궁내부를 나가겠다는 의사를 밝혀야지. 미드프레드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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