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전장에 핀 꽃 5화 전장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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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장에서 피고 지는 꽃
"여자로는 안 되는 군요."
침대에 길게 누워있던 사비에가 몸을 일으키며 침대 옆에 있는 탁자에서 수건을 집어 들어 클리어트에게 내밀었다. 클리어트는 그것을 받아 들면서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냐? "
"여자를 안는 걸로 잊어버릴 만한 걱정은 아닌 것 같다고요. 하기사 여자가 별 볼 일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사비에는 다시 수건을 물에 적셔 땀에 젖은 그의 몸을 닦아주었다. 매번 그렇듯이 언제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여자였다.
사비에는 배운 바 없이 몸을 팔아 풀칠하는 천것치고는 눈치가 빠르고 비상하다 할 만큼 영리했다. 하지만 그래봐야 여기저기 굴러먹는 군창 따위. 첸트로빌 공성이 뜻대로 되지 않아 짜증이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고민을 한낱 창기 따위와 나누고자 할 만큼 궁색해지지는 않았다고, 클리어트는 고집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사비에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입을 열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니 네가 마음 쓸 것 없다."
"제가 왜 마음을 씁니까. 어차피 제 일은 여기서 장군님과 구르다 가는 것뿐인데요."
"······망할 것."
클리어트는 낮게 혀를 찼다. 그녀에게 침대에서 마음대로 입을 놀려도 좋다고 허락해 준 일이 꽤나 뼈아픈 실수였다고 가끔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대하시지 않는 일을 하려고 애쓰는 건 오히려 방해만 되죠. 더구나, 무슨 일인지 알지도 못하는 천한 몸이 무슨 수로요. 무식한 것에게 들려주실만한 이야기도 아닐 텐데요."
등을 문지르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지며 떨어져 나간다. 클리어트는 흠칫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처럼 맹랑한 어조이지만 어쩐지 그 목소리와 손놀림에서는 서글픔 비슷한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에 마음이 약해진 클리어트는 다음 순간 부지불식간에 이렇게 묻고 말았다.
"···알고 싶은 거냐?"
"아뇨.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야기 따윈 질색이에요."
다시 쾌활한 어조로 돌아온 그녀가 부드러운 가슴을 그의 등에 기대왔다. 차갑게 식은 등으로 따스한 체온이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클리어트는 등을 약간 뒤로 젖혀 여인의 체온에 몸을 맡기며 입을 열었다.
"하루라도 빨리 공성전을 끝내야 해. 내가 여기 묶여있어서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곧 대장군이 결전을 벌일 테니 빨리 그쪽으로 합류해야지. 그 전에 바다에서 설치고 다니는 세레즈 놈들을 깨끗하게 쓸어버리고."
"남자들이란 어떻게든 좀 더 큰 싸움을 하겠다는 생각밖에 안 하는군요. 그래서 대체 뭐가 생긴다는 거죠?"
사비에가 이죽대면서 클리어트에게서 몸을 떼어내어 다시 침대 위로 길게 누웠다. 클리어트 역시 몸을 돌려 그녀의 어깨 사이로 팔을 짚으며 얼굴을 그녀의 눈앞으로 가져갔다.
"때로는 생기는 것도 있지. 내가 너를 얻었듯이."
가느다란 손이 그의 머리를 잡아 자신의 젖가슴 사이로 끌어안는다.
"글쎄 자기 품 안에 있을 때야 무슨 말인들 못하겠어요."
클리어트는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웃음을 터뜨렸다. 단 한 번도 예측 가능한 일이 없고, 때문에 단 한시도 지루하지 않은 여자였다. 귀부인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말을 태연하게 툭툭 뱉어내지만, 이 여자의 신분이 창녀라는 사실 따위 그녀를 안고 있는 동안에는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클리어트는 그녀의 가슴을 입술로 훔치면서 말했다.
"지겹기 짝이 없는 공략이지만 너를 얻은 것은 수확이다. 이것만큼은 진심인데, 어떡해야 믿어주겠느냐?"
"원하는 대로 들어주시는 건가요?"
클리어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침대에서 뭔가를 얻어내는 것은 여자들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 어울리지 않는군.'
그는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고 약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코네세타로 데려가 달라는 건가? 내가 가는 대로 따라올 테냐?"
"미쳤어요?"
그는 다시금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내키지 않지만, 이 여자가 매달려 온다면 한 번쯤 고려해 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고 나니 오히려 자신이 원했다가 거절당한 듯한 느낌이었다. 묘한 서운함까지 느끼면서 다시 그녀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지만, 사비에가 가볍게 그 손을 제지했다.
"세상 소문 무서운 줄 제일 잘 아는 게 미천한 계집들이랍니다. 장군님은 코네세타의 부사령관인가 그쯤 되는 높은 분이 아니셨던가요? 세레즈 출신의 창녀 하나 매달고 코네세타로 돌아가시면 그 꼴 참 볼 만하겠네요."
"······."
"입에 뭐라도 넣어주자고 몸은 팝니다만, 하늘 무서운 줄은 알지요. 그런 것 바란 적은 없습니다. 행여나 그런 말씀 마세요."
그녀의 미소는 평소의 비틀린 듯한 요염함이 아니라 오히려 약간의 처연함까지 자아내는 서글픈 느낌의 것이었다. 도무지 거칠 것이 없는 듯한 당돌함 사이로 때로 흘낏흘낏 내비치는 서글픈 다정함, 그 자신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클리어트가 진정으로 끌리고 있는 것은 바로 그쪽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른침을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네가 원하는 게 뭐지? 들어주겠다고 약속할 테니, 말해 봐."
그래도 사비에는 입을 다문 채 가만히 클리어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로 당황스러웠다. 그는 어느새 자신이 진심으로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리라 결심하고 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클리어트는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군창에는 빚 때문에 매여있는 거겠지? 거기서 풀어줄까?"
사비에의 입가에 보일 듯 말듯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나 이내 그녀가 붉은 입술을 비틀며 피식 웃었다.
"그러면 뭐해요. 어차피 버린 몸이긴 마찬가진데. 그냥······.”
“그냥?"
놓칠세라 그녀의 말꼬리를 잡는 클리어트에게 그녀는 낮게 웃어 보였다.
"꼭 이기세요."
"응? "
"승리하시라구요. 첸트로빌 성을 함락시켜 주세요."
이것은 격려일까. 클리어트는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웃어넘기려 했으나 사비에의 목소리에 담긴 서늘한 기운에 순간 온몸이 식어버리는 듯한 느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세레즈 출신, 이처럼 뱉어내는 듯한 목소리로 첸트로빌 성을 무너뜨리라고 말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하지만 더 이상의 무엇을 생각하기도 전에 타오르는 듯이 새빨간 머리카락이 온통 시야를 덮으며 물결쳤다. 식어버린 몸을 다시 데우기에 충분할 만큼 여자의 몸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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