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창작연

왕도와 패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창작연
작품등록일 :
2019.04.01 11:16
최근연재일 :
2020.02.09 22:13
연재수 :
271 회
조회수 :
116,479
추천수 :
2,679
글자수 :
1,047,762

작성
19.05.21 06:35
조회
433
추천
10
글자
7쪽

12장 전장에 핀 꽃 5화 전장의 꽃

DUMMY

5. 전장에서 피고 지는 꽃






"여자로는 안 되는 군요."


침대에 길게 누워있던 사비에가 몸을 일으키며 침대 옆에 있는 탁자에서 수건을 집어 들어 클리어트에게 내밀었다. 클리어트는 그것을 받아 들면서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냐? "


"여자를 안는 걸로 잊어버릴 만한 걱정은 아닌 것 같다고요. 하기사 여자가 별 볼 일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사비에는 다시 수건을 물에 적셔 땀에 젖은 그의 몸을 닦아주었다. 매번 그렇듯이 언제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여자였다.


사비에는 배운 바 없이 몸을 팔아 풀칠하는 천것치고는 눈치가 빠르고 비상하다 할 만큼 영리했다. 하지만 그래봐야 여기저기 굴러먹는 군창 따위. 첸트로빌 공성이 뜻대로 되지 않아 짜증이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고민을 한낱 창기 따위와 나누고자 할 만큼 궁색해지지는 않았다고, 클리어트는 고집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사비에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입을 열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니 네가 마음 쓸 것 없다."


"제가 왜 마음을 씁니까. 어차피 제 일은 여기서 장군님과 구르다 가는 것뿐인데요."


"······망할 것."


클리어트는 낮게 혀를 찼다. 그녀에게 침대에서 마음대로 입을 놀려도 좋다고 허락해 준 일이 꽤나 뼈아픈 실수였다고 가끔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대하시지 않는 일을 하려고 애쓰는 건 오히려 방해만 되죠. 더구나, 무슨 일인지 알지도 못하는 천한 몸이 무슨 수로요. 무식한 것에게 들려주실만한 이야기도 아닐 텐데요."


등을 문지르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지며 떨어져 나간다. 클리어트는 흠칫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처럼 맹랑한 어조이지만 어쩐지 그 목소리와 손놀림에서는 서글픔 비슷한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에 마음이 약해진 클리어트는 다음 순간 부지불식간에 이렇게 묻고 말았다.


"···알고 싶은 거냐?"


"아뇨.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야기 따윈 질색이에요."


다시 쾌활한 어조로 돌아온 그녀가 부드러운 가슴을 그의 등에 기대왔다. 차갑게 식은 등으로 따스한 체온이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클리어트는 등을 약간 뒤로 젖혀 여인의 체온에 몸을 맡기며 입을 열었다.


"하루라도 빨리 공성전을 끝내야 해. 내가 여기 묶여있어서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곧 대장군이 결전을 벌일 테니 빨리 그쪽으로 합류해야지. 그 전에 바다에서 설치고 다니는 세레즈 놈들을 깨끗하게 쓸어버리고."


"남자들이란 어떻게든 좀 더 큰 싸움을 하겠다는 생각밖에 안 하는군요. 그래서 대체 뭐가 생긴다는 거죠?"


사비에가 이죽대면서 클리어트에게서 몸을 떼어내어 다시 침대 위로 길게 누웠다. 클리어트 역시 몸을 돌려 그녀의 어깨 사이로 팔을 짚으며 얼굴을 그녀의 눈앞으로 가져갔다.


"때로는 생기는 것도 있지. 내가 너를 얻었듯이."


가느다란 손이 그의 머리를 잡아 자신의 젖가슴 사이로 끌어안는다.


"글쎄 자기 품 안에 있을 때야 무슨 말인들 못하겠어요."


클리어트는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웃음을 터뜨렸다. 단 한 번도 예측 가능한 일이 없고, 때문에 단 한시도 지루하지 않은 여자였다. 귀부인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말을 태연하게 툭툭 뱉어내지만, 이 여자의 신분이 창녀라는 사실 따위 그녀를 안고 있는 동안에는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클리어트는 그녀의 가슴을 입술로 훔치면서 말했다.


"지겹기 짝이 없는 공략이지만 너를 얻은 것은 수확이다. 이것만큼은 진심인데, 어떡해야 믿어주겠느냐?"


"원하는 대로 들어주시는 건가요?"


클리어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침대에서 뭔가를 얻어내는 것은 여자들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 어울리지 않는군.'


그는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고 약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코네세타로 데려가 달라는 건가? 내가 가는 대로 따라올 테냐?"


"미쳤어요?"


그는 다시금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내키지 않지만, 이 여자가 매달려 온다면 한 번쯤 고려해 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고 나니 오히려 자신이 원했다가 거절당한 듯한 느낌이었다. 묘한 서운함까지 느끼면서 다시 그녀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지만, 사비에가 가볍게 그 손을 제지했다.


"세상 소문 무서운 줄 제일 잘 아는 게 미천한 계집들이랍니다. 장군님은 코네세타의 부사령관인가 그쯤 되는 높은 분이 아니셨던가요? 세레즈 출신의 창녀 하나 매달고 코네세타로 돌아가시면 그 꼴 참 볼 만하겠네요."


"······."


"입에 뭐라도 넣어주자고 몸은 팝니다만, 하늘 무서운 줄은 알지요. 그런 것 바란 적은 없습니다. 행여나 그런 말씀 마세요."


그녀의 미소는 평소의 비틀린 듯한 요염함이 아니라 오히려 약간의 처연함까지 자아내는 서글픈 느낌의 것이었다. 도무지 거칠 것이 없는 듯한 당돌함 사이로 때로 흘낏흘낏 내비치는 서글픈 다정함, 그 자신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클리어트가 진정으로 끌리고 있는 것은 바로 그쪽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른침을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네가 원하는 게 뭐지? 들어주겠다고 약속할 테니, 말해 봐."


그래도 사비에는 입을 다문 채 가만히 클리어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로 당황스러웠다. 그는 어느새 자신이 진심으로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리라 결심하고 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클리어트는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군창에는 빚 때문에 매여있는 거겠지? 거기서 풀어줄까?"


사비에의 입가에 보일 듯 말듯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나 이내 그녀가 붉은 입술을 비틀며 피식 웃었다.


"그러면 뭐해요. 어차피 버린 몸이긴 마찬가진데. 그냥······.”


“그냥?"


놓칠세라 그녀의 말꼬리를 잡는 클리어트에게 그녀는 낮게 웃어 보였다.


"꼭 이기세요."


"응? "


"승리하시라구요. 첸트로빌 성을 함락시켜 주세요."


이것은 격려일까. 클리어트는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웃어넘기려 했으나 사비에의 목소리에 담긴 서늘한 기운에 순간 온몸이 식어버리는 듯한 느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세레즈 출신, 이처럼 뱉어내는 듯한 목소리로 첸트로빌 성을 무너뜨리라고 말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하지만 더 이상의 무엇을 생각하기도 전에 타오르는 듯이 새빨간 머리카락이 온통 시야를 덮으며 물결쳤다. 식어버린 몸을 다시 데우기에 충분할 만큼 여자의 몸은 따뜻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왕도와 패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75 12장 전장에 핀 꽃 7화 지원군의 본진 합류(12장 인명록) 19.05.23 414 10 9쪽
74 12장 전장에 핀 꽃 6화 출격요청 19.05.22 613 9 8쪽
» 12장 전장에 핀 꽃 5화 전장의 꽃 19.05.21 434 10 7쪽
72 12장 전장에 핀 꽃 3-4화 이반의 조짐 19.05.20 535 12 10쪽
71 12장 전장에 핀 꽃 2화 불꽃 같은 여인 19.05.19 425 8 8쪽
70 12장 전장에 핀 꽃 1화 굳건한 성벽 19.05.18 452 8 8쪽
69 11장 분열의 조짐 7-8화 최종단안(11장 인명록) 19.05.17 440 9 12쪽
68 11장 분열의 조짐 6화 뮤켄의 충고 19.05.16 503 8 9쪽
67 11장 분열의 조짐 5화 패퇴 19.05.15 449 10 7쪽
66 11장 분열의 조짐 3-4화 양동작전 19.05.14 428 10 10쪽
65 1부 11장 분열의 조짐 1-2화 후방기지 괴멸 소식 19.05.13 510 9 11쪽
64 10장 진흙 속의 연꽃 7화 투항 제의 (10장 인명록) 19.05.09 464 8 13쪽
63 10장 진흙 속의 연꽃 5-6화 접전 19.05.08 518 8 7쪽
62 10장 진흙 속의 연꽃 4화 적의 공격에 대처하는 각자의 자세 19.05.07 464 8 8쪽
61 10장 진흙 속의 연꽃 3화 후방기지 카르테 19.05.07 482 7 7쪽
60 10장 진흙 속의 연꽃 2화 이해 19.05.07 479 8 8쪽
59 1부 10장 진흙 속에 핀 연꽃 1화 불만 19.05.07 524 6 7쪽
58 9장 전설의 시작 7화 조력요청(9장 인명록) 19.05.06 523 7 12쪽
57 9장 전설의 시작 5-6화 전후처리 19.05.06 568 8 12쪽
56 9장 전설의 시작 4화 최초의 승리 19.05.06 550 7 11쪽
55 9장 전설의 시작 3화 교전 19.05.05 516 9 9쪽
54 9장 전설의 시작 2화 기습 19.05.04 503 12 9쪽
53 9장 전설의 시작 1화 위장잠입 19.05.03 496 8 10쪽
52 8장 효시 7화 작전계획(8장 인명록) 19.05.02 556 11 12쪽
51 8장 효시 6화 용기, 혹은 이길 수 있다는 신념 19.05.02 539 8 11쪽
50 8장 효시 5화 아나브릴 방어군에서 얻은 정보 19.05.02 485 9 9쪽
49 8장 효시 3-4화 사령관과 참모장 19.05.01 507 11 13쪽
48 8장 효시 2화 전장의 밤 19.05.01 533 10 11쪽
47 8장 효시 1화 행군시작 19.04.30 560 12 11쪽
46 7장 전환점 7화 최초의 동료(7장 인명록) 19.04.30 568 8 11쪽
45 7장 전환점 6화 입바른소리 19.04.29 538 11 8쪽
44 7장 전환점 5화 보이지 않는 벽 19.04.29 557 11 7쪽
43 7장 전환점 4화 출전령 19.04.28 571 10 7쪽
42 7장 전환점 3화 하크스 지원군 19.04.28 647 11 9쪽
41 7장 전환점 2화 정치적 포석 19.04.27 609 12 10쪽
40 1부 7장 전환점 1화 연전연패 19.04.27 579 11 8쪽
39 6장 개전 8화 승진 거절(6장 인명록) 19.04.26 585 11 8쪽
38 6장 개전 7화 뮤켄장군 19.04.26 631 13 9쪽
37 6장 개전 6화 개전 이후 19.04.25 572 9 7쪽
36 6장 개전 5화 선제공격 19.04.25 625 10 7쪽
35 6장 개전 4화 선전포고 19.04.24 638 13 7쪽
34 6장 개전 3화 어머니와 아들 下 19.04.24 572 16 11쪽
33 6장 개전 2화 어머니와 아들 上 19.04.23 597 12 7쪽
32 1부 6장 개전 1화 진상규명요구 19.04.23 630 10 11쪽
31 5장 태풍의 눈 8화 안타미젤의 결심(5장 인명록) +2 19.04.22 695 15 12쪽
30 5장 태풍의 눈 6-7화 안타미젤 왕자 19.04.22 696 10 8쪽
29 5장 태풍의 눈 5화 계륵과도 같은 패 19.04.21 632 12 9쪽
28 5장 태풍의 눈 3-4화 충성서약 19.04.21 734 11 13쪽
27 5장 태풍의 눈 2화 사직서의 파장 19.04.20 743 14 11쪽
26 1부 5장 태풍의 눈 1화 사직원 19.04.19 742 15 7쪽
25 4장 부위정경 7화 생존전략(4장 인명록) 19.04.19 752 16 16쪽
24 4장 부위정경 6화 속고 속이는 싸움 19.04.18 763 19 10쪽
23 4장 부위정경 5화 기만 19.04.18 871 14 13쪽
22 4장 부위정경 4화 공주의 부름 19.04.17 821 19 10쪽
21 4장 부위정경 3화 거리의 아이 19.04.17 852 18 10쪽
20 4장 부위정경 2화 세레즈의 물밑 접촉 19.04.16 828 20 7쪽
19 1부 4장 부위정경 1화 코네세타의 공주 19.04.15 868 19 10쪽
18 3장 폭풍전야 6화 주전론을 위한 막후교섭(3장 인물소개) 19.04.14 906 21 12쪽
17 3장 폭풍전야 4화 밀실정치 下 +2 19.04.13 1,013 21 7쪽
16 3장 폭풍전야 3화 밀실정치 上 +2 19.04.12 1,002 23 7쪽
15 3장 폭풍전야 2화 그윈 재상 19.04.11 1,048 23 8쪽
14 1부 3장 폭풍전야 1화 태자의 실종 19.04.10 1,192 21 11쪽
13 2장 애별리고 7화 이별(1-2장 인물소개) +4 19.04.10 1,199 33 8쪽
12 2장 애별리고 6화 고작 마음 하나 +2 19.04.09 1,252 21 9쪽
11 2장 애별리고 5화 이주명령 19.04.09 1,399 26 9쪽
10 2장 애별리고 4화 떨림과 설렘 +4 19.04.07 1,392 25 7쪽
9 2장 애별리고 3화 염색 +2 19.04.05 1,470 24 7쪽
8 2장 애별리고 2화 현기증 +2 19.04.04 1,484 28 7쪽
7 1부 2장 애별리고 1화 마음의 향방 19.04.03 1,534 26 7쪽
6 1장 표류 6화 자각 +2 19.04.03 1,647 32 7쪽
5 1장 표류 5화 바다를 닮은 여인 +6 19.04.02 2,069 33 8쪽
4 1장 표류 4화 슈레디안의 고민 19.04.01 2,284 37 8쪽
3 1장 표류 3화 3년만의 손님 19.04.01 2,634 34 7쪽
2 1장 표류 2화 신분 은폐 19.04.01 3,541 46 7쪽
1 <제1부 펜데스칼 전쟁> 제1장 표류 1화 난파당한 청년 +4 19.04.01 6,791 63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