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효시 1화 행군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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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효시
세레즈력 386년 12월,
불패의 영웅, 미드프레드 그론레이,
코네세타와의 첫 접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무사히 하크스 영지에 입성하다.
- 제국력 연대기 섭정공 세느비엔느 열전 발췌
1. 행군 시작
“배고파 죽겠다. 대충 아무거나 잡아서 돌아올 것이지. 왜 이리 늦는 거야? ”
상의를 벗어던지고 동료 병사 서넛과 둘러앉아 있던 병사 이스터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짜증스레 내뱉었다.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그 옆에는 그의 것인 듯 보이는 투구와 흉부 보호 갑옷, 손목 보호대와 망토, 장검과 활 등의 무기류 몇 개가 아무렇게나 내던져 있었다.
“시끄러워. 입 다물고 기다리던가, 아님 엎어져 자. 나까지 짜증 난다. ”
말끔한 생김새를 한 이스터와는 대조적으로 턱 밑에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병사 하나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타박을 놓는다. 어느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며칠 동안 제대로 씻을 새도 없이 강행군을 했지만, 얼굴의 절반을 덮은 수염 탓에 별로 단정치 못한 슈거의 인상은 한층 더 험악해 보인다.
“들고 올 게 뻔하니 이러는 거 아냐. 이젠 다람쥐 스튜라면 지긋지긋해. ”
뚱한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리는 이스터가 조금은 안되어 보였는지, 그 옆에 앉아 단검을 손보던 병사 하나가 다독였다.
"숲에 워낙 널려 있으니까. 시간도 없고, 배도 고프니 어쩔 수 없지."
"가지가지 하는군. 지금 우리가 먹을 거 가릴 상황이냐?”
하크스 지원군이 중북부에 위치한 도성 다이레비드에서 세레즈 최남단에 위치한 하크스를 향해 출군한 지도 벌써 닷새가 지나가고 있었다. 사령관과 참모장은, 하크스 영지로 가는 여러 가지 경로 중, 롤리암에서 아나브릴 영지로 쭉 이어지는 에스트랄 산맥을 통과하는 방향으로 그들의 행군 경로를 채택했다.
행군 도중 적군과의 불필요한 교전을 피하고, 부족한 부대 훈련을 행군으로 대체시킨다는 명목하에 결정된 경로였지만, 무기도 식량도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 험준한 산을 타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출군 당시 챙겨온 식량은 일찌감치 바닥을 드러냈고, 이후 참모진들은 수색대라는 명칭 아래 몸이 날랜 병사들을 추려 모아 부족한 식량을 야영지 근처에서 자급자족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치만 나흘째 다람쥐만 먹었더니, 이젠 그 소리만 들어도 토할 지경인걸. ”
“좀 참고 기다려봐. 오늘은 메이도 나갔잖냐. 그 녀석이라면 뭔가 먹을 만한 걸 잡아오지 않겠어? ”
울상을 짓고 있던 이스터의 얼굴에 약간이나마 희색이 도는 듯했다.
“저번에도 그 녀석 자기 몸통만한 멧돼지를 잡아왔잖아. 그때 내가 얼마나 놀랐던지. ”
“나는 그것보다 다리 고기를 빼돌린 게 더 신기하더라.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모르겠다니까. "
“글쎄 말이야. 한 두 번도 아니고. 뭐 그 덕에 포식했지만서도. "
“보통 배짱이 아냐. 참모장한테 걸렸는데도 계속 그러는 걸 보면. ”
“하여간 수완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해. 그놈 자식은 어디서고 자기가 필요한 건 꼭 구해내거든. 특히 먹을 건 말이야. 이건 불가사의라고밖에 할 수 없어.”
“꼭 마법이라도 부리는 것 같다니까. 그 녀석한테 걸리면 뭐든 눈에 띄니··· 어, 저기 오는군. ”
곁에 앉아있던 병사의 말에 이스터는 반색을 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싱글벙글하며 사냥을 끝내고 돌아온 동료 둘을 향해 과장된 몸짓을 하며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메이! 오늘 저녁은 뭐야? 설마 다람쥐는 아니겠지!"
은색 가루라도 뿌려놓은 듯 찬연하게 빛나는 은백색 머리칼을 한 병사가 짐짓 화가 난 듯 눈을 치켜떴다. 이제 열여섯 살인 메이샤드는 실제로도 무리 중 제일 어렸지만, 자기 나이보다도 훨씬 어려 보이는 동안 때문에, 그 표정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토라져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날 뭘로 보는 거야? 그런 건 노리지도 않아. ”
“그럼? ”
“훗. 사슴 두 마리. 간만에 호화식단을 짜준 내게 감사하도록.”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메이샤드를 향해 와락 달려드는 이스터의 귓가에 빈정거리는 듯한 앤스의 한 마디가 날카롭게 꽂혔다.
“그럼 뭐하나. 구워 먹을 만한 양도 아니고. 어차피 스튜 안에서 다람쥐랑 뒤섞일 텐데. ”
망토를 둘둘 말아 베개 삼아 베고 누워있던 앤스가 얄미울 만큼 느릿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배식병이 네 놈만 사슴고기를 골라줄 것도 아니고. 하지만 뭐 계속 먹다 보면 토끼 고기와도 비슷한 것도 같으니까. 굳이 다람쥐라고 생각만 안 한다면야. ”
앤스와 이스터가 아웅다웅하는 것을 무시하며 슈거는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는 동료들을 발로 툭툭 쳐서 두어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한 자리를 마련했다.
“뭘 멀뚱히 서 있냐. ”
메이샤드는 슈거가 만들어 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두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하루 종일 어지간히 강도 높은 훈련 못지 않을 행군을 하고,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다시 저녁거리를 잡기 위해 몇 시간을 숲에서 뛰어다닌 노곤함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느낌이었다.
“젠장, 빌어먹게 힘드네. ”
같이 사냥을 나왔다 온 브란이 깍지 낀 손을 머리 뒤로 넘겨 드러누우며 중얼거렸다.
“그런 행군 뒤에 저녁거리를 잡아 오라니, 우리가 무쇠인 줄 아나 보지? 빌어먹을 자식들 같으니. 말만 해대지 말고 지들이 한 번 잡아보라지. 이게 뭐야. 낮에는 행군에, 해 떨어질 즈음이면 먹이 잡겠다고 개떼처럼 몰려다니고. 재수가 없으려니 별짓을 다 하는군. ”
“막말로 말라비틀어진 보리 빵보다는 고기 스튜가 낫지 않아? 행군이 힘든 거야 당연한 일이고, 그나마 대개는 야영할 때 썩기 직전의 볶은 콩이나 잘 씹히지도 않는 빵을 먹어. 그리 툴툴거릴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난. 굳이 사냥을 나가지 않는다 해도 누구나 그만큼의 일은 해.”
딱 잘라내는 듯한 앤스의 발언에 브란도 더이상 불만을 토로하지 못한 채 못마땅한 기색으로 낯을 찌푸렸다.
“그럼. 그릇 닦기보다야 사냥이 백배 낫지. ”
메이샤드는 땀에 젖어 눌러붙은 은백색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씨익 웃었다.
“이런 즐거움도 있고 말이지. ”
그가 망토 자락 밑에서 제법 큰 몸집의 새 한 마리를 꺼대 들자, 좌중에는 일제히 환호성 비슷한 게 솟아올랐다.
“어째 넌 나아지는 게 없냐. 저번에도 걸려서 당할 만큼 당하더니. ”
“나는 한참 자라는 중이니까 잘 먹어야 돼. 안 그럼 키가 안 큰다구. "
태연하게 대답하는 메이샤드의 당당한 얼굴에, 슈거는 그만 뒷말을 잇질 못했다.
“게다가 우리 부대 참모장님은 누구완 달리 도량이 넓으셔서 말이지. ···뭐 막말로 걸린다 해도 말이야. 한 명의 병사도 아쉬운 처지에 이 몸을 내쫓길 하겠어 어쩌겠어? 내가 없어지면 그쪽 손해 아냐. 까짓거 잔소리 좀 들어주면 그만인데. 괜찮아. ”
“말하는 거 하곤. 뭐, 틀린 말은 아니다만. 나 같으면 너처럼 싹수없이 말하는 놈 따윈 당장 내쫓아 버릴 텐데, 계속 데리고 있는 걸 보면 대단한 인내심이야. 아주 존경스러운 분이지, 우리 참모장님은.”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군율 적용이야 엄격하지만 사리가 분명하고 올곧은 사람이잖아. 병사들 사정을 돌봐줄 만큼의 융통성도 있고. "
“그럼. 그 정도면 모시기 편한 상관이지. 사열을 좀 자주 해서 귀찮긴 하지만, 그거야 부대 이탈을 막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일 테니. ”
일순간이었지만,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의 얼굴에 그늘이 스쳐 가는 듯했다. 사실 그동안 참모장 뮤켄은 제대로 훈련조차 받지 못한 채 출전한 병사들이 불안감에 휩싸여 탈영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조석으로 행하는 사열과, 행군 중간중간의 인원 점검 외에도, 그는 깊은 밤 야영지 안을 수시로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돌보았다. 관리 소홀로 이탈되는 병사가 없도록. 행군을 시작한 이래, 그가 부대 안의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보초를 서고 있다는 것을 병사들은 익히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참모장이 하는 말, 의례적인 입발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내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아. ”
손을 내저어 귓가에서 윙윙대는 모기를 내쫓으며 이스터가 말을 받았다.
“설령 그게 모든 지휘관이 하는 형식적인 말이라 해도 난 믿어주고 싶더라. 그 목소리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단 말이야. ”
“모두들 그리 생각하니 여기 남아 있는 거겠지. 사지로 내몰리고 있다는 거, 그리고 결심만 하면 도망가는 것쯤 그리 어렵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
씁쓸한 미소가 앤스의 입가에 떠올랐다.
“아까 귓결로 들었는데. 우리 아나브릴로 갈 것 같다면서? ”
가라앉은 분위기를 일소하듯 이스터가 몸을 앞으로 빼며 다소 야단스럽게 화제를 바꿔버렸다.
“아나브릴이라면, 밀시언 장군님의 부대? ”
“응. 2진 말이야. 그러고 보니 나도 참모들이 말하는 걸 언뜻 들은 듯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야. ”
앤스가 짧게 말을 잘라냈다.
여왕에게 직접 격려를 받고 출전했다고 하나, 솔직히 무기도 식량도 변변히 갖추지 못한 채로 출발한 하크스 지원군이다. 이유야 어디에 있던 간에 산을 통과하는 방법을 채택한 덕택에 그동안 야영지 주변의 숲에서 수렵을 통해 부족한 양식을 메울 수 있었지만, 적군의 점령지가 가까워질수록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반경은 점점 좁아질 터였다. 그리고 적군의 눈앞으로 다가온 지금, 가까이 위치한 아군의 부대에서 식량과 물자를 보급받는 것은, 보급 문제로 난관에 처해 있는 야전 사령관이 떠올릴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해결책이었다.
“2진이라면 이 산만 넘으면 되니까, 내일쯤이면 도착하겠군. ”
“그럼···”
그렇다면 이제 얼마 안 있어 행군을 끝나고 실전에 놓인다는 소리. 비록 브란이 끝까지 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묘한 긴장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자자, 나중 일은 높으신 분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일단 배부터 채우자고. ”
활달한 기색으로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메이샤드를 따라, 그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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