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전환점 5화 보이지 않는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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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보이지 않는 벽
“하크스 지원군 사령관이십니까?”
집무실 밖 복도에 팔짱을 낀 채 기대고 서서 대리석 바닥에 시선을 주고 있던 한 청년이, 막 문을 열고 나오는 미드프레드를 보고 한 걸음 다가서며 질문을 던졌다. 확고하고 절도 있는 어조나 흔들림 없는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상대는 이미 자신을 알고 있는 듯 했으나, 미드프레드로서는 눈 앞에 서 있는 청년에 대해 아무런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 상대의 물음에 대한 답을 대신하고는 다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그는 오른 손을 가슴께로 들어올리며 미드프레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지원군 참모부 소속 라펠 라 케니하크입니다.”
“순서가 조금 뒤바뀌었지만 정식으로 인사하지요. 이번에 사령관직을 맡게 된 미드프레드 그론레이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
케니하크는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되쏘듯 빠르게 답했다.
“각하를 사령관실로 안내하라는 재상 각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리고 그는 상대의 대답 따위는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미드프레드도 그를 따라 끝없이 이어진 복도를 따라 걸었다. 고요한 정적을 깨는 그들의 발걸음 소리만이 복도를 타고 울려 퍼지고 있었다.
미드프레드는 자신보다 한 뼘 정도는 더 커 보이는 청년의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생각에 잠겼다. 여왕이건 재상이건 간에 자신에게 일단 군대를 맡기고 난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어떤 배려도 해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미 사령관실이나 참모부까지 모두 배치되어 있는 상황에 자신에게는 이제야 언질이 내려왔다는 것이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 아닌가. 그는 이제부터 자신이 이끌어야 할 군대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하다못해 케니하크가 안내해 주지 않는 이상은 자기 집무실조차 찾아갈 수 없는 처지다. 입술 사이를 비집고 쓴웃음이 흘러 나왔다.
끝없이 이어진 복도를 걷고 있는 동안 계속해서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홀의 모퉁이에 위치한 새하얀 문 앞에서 앞서가던 청년이 멈춰섰다.
“여깁니다. ”
케니하크는 뒤따라오던 미드프레드를 돌아보며 잘라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들어가시지요. ”
집무실 문을 열어주며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선다. 열려진 문 너머로 그리 크지 않은 방과 가구들, 책상과 책장 그리고 자그마한 탁자와 그 둘레에 놓여 있는 몇 개의 의자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미드프레드는 케니하크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차피 이제는 물러설 수 없게 된 일이다.
집무실의 분위기는 처음으로 사람을 맞게 된 곳이라는 것을 표시하듯 묘하게 싸늘하고 휑뎅그렁했다. 특별히 이를 드러 낸다기보다 그저 차갑고 묵묵하게 응시하는 느낌이랄까. 그것은 아까 재상의 집무실에서 느꼈던 묘하게 내리누르는 위압감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는 책상 쪽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짓눌리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니다. 절망스러운 현실이라 해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어떻게든 다음 일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랫입술을 깨문 채 재상이 건네준 하크스 지원군의 지휘 체계도와 군사 배치도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미드프레드의 머릿속에 문득 재상의 한 마디가 스쳐갔다. ‘자세한 이야기는 참모장에게 듣게’ 그는 고개를 들어올려 아직 자신 앞에 서있는 케니하크에게 물었다.
“서류에는 참모장이 뮤켄 장군으로 되어있는데, 그는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까? ”
예상하고 있던 질문인 듯 케니하크의 입에서는 망설이는 기색 없이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뮤켄 장군께서는 수도 방위 본부의 인수인계 건으로 부임이 조금 늦어진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
미드프레드는 힘없이 고개를 돌려 창가로 시선을 던졌다. 역시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시작하려고만 하면 항상 거대한 벽이 자신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듯 하다. 시종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도, 군대 지원서를 제출했을 때도, 지휘관으로 임명된 지금도 늘 그의 앞에는 벽이 서 있었고, 그 뒤에 무엇이 있을지는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어차피 하크스 지원군은 버릴 목적으로 만들어진 군대다. 이미 결정된 버림돌 위에 보기 싫은 나까지 한꺼번에 몰아 치워버리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내 밑의 군사들까지 그렇게 받아들여 줄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나 때문에, 내가 지휘관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사지로 떠밀린다고 생각하겠지.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이제 어찌해야 할까.’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케니하크를 바라보았다.
“병사들의 훈련 상황을 보고 싶은데, 나를 하크스 지원군의 연병장으로 안내해 줄 수 있겠습니까? ”
“그렇게 하십시오. ”
참모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미드프레드가 하크스 지원군의 연병장 근처에 임시 막사를 세우고 그곳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것도 벌써 일주일가량 지나가고 있었다. 재상에게서 출전령을 받은 직후 지원군 소속 수석 참모인 케니하크의 안내를 받아 연병장을 돌아보다가, 사령관실과 일반 사병들이 이리 떨어져 있어서야 군을 지휘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게 없다고 판단하여 그 자리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지금이라고 하여 크게 나아진 상황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처음 미드프레드가 외성 안에 버젓이 사령관실을 두고서도 굳이 연병장에 막사를 세우는 부산을 떨어가며 집무실을 옮기기를 고집했을 때 병사들은 곱지 않은 눈길로 쳐다보았었다.
비록 입 밖에 내어 수군거리지는 않았지만 케니하크를 비롯한 참모진 역시도 그 지시에 딱히 협력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발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 미드프레드로서는 지원군 전체가 ‘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연병장에서 자기가 버텨봐야 얼마나 버티겠느냐’ 는 식의 삐딱한 시선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미드프레드는 병사들과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런 그의 한결같은 태도에 병사들도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 시찰이라는 명목하에 그가 연병장을 돌아다니는 것에 노골적인 반감을 표출하곤 하던 병사들도, 이제는 그가 지나칠 때마다 경례를 붙이는 최소한의 예의는 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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