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애별리고 2화 현기증
제1부 2장 애별리고愛別離苦
2. 현기증
슈레디안은 자신을 서툴게 만드는 유일한 여인에게 눈길이 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결코 돌아보지 아니하였을 신분의 여인에게, 더군다나 저를 모자란 아이 취급하듯 사사건건 가르치려 드는 상대에게 이러한 감정이라니.
기실은 그 자신도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슈레디안은 난생처음으로 연모를 겪고 있었고, 그 자체만으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갓 피어난 어린 연모의 싹을 똑바로 자각하고, 그 감정을 소중히 여기며 자신외의 존재를 스스로보다 아껴줄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면모를 보이기에 슈레디안은 아직 많이 어렸고 미숙했다. 그렇기에 그가 자신 안에서 폭풍우치는 감정 변화를 순순히 인정할 수 없어하는 것도 어쩌면 극히 당연했다.
아이네즈를 처음부터 남들과 다르다 구분 짓고,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기만 해도 두근거리고, 자신을 향한 그녀의 미소가 사랑스럽다 느끼며, 아이네즈에게 닿고 싶다고 여기면서도 슈레디안은 완고하게 제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이 연심이 아니라고 애써 부정했다.
이 궁벽한 시골에 필요 이상으로 길게 머물렀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 앞에서 기억을 잃은 청년 슈레디안을 연기하는 동안 스스로 만들어낸 인격에 지나치게 동화되어 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혹은 표류하면서 머리를 다친 까닭에 지금 절반쯤 미쳐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조차도 아니라 한다면, 흡사 열에 들뜬 것 같은 이 기분을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이네즈, 그러니까, 내 말은······.”
한참 후 슈레디안은 가슴 속 깊이 감추어온 치부를 실토하는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무심코 던진 눈빛 하나, 우연히 보내는 것 같은 미소 하나, 부지중에 흘렸으리라 짐작할 만한 말 한마디조차 철저하게 계산하여 움직였던 냉정하고 이성적인 아체프렌이라면 결코 하지 아니할 말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러나 그 순간 슈레디안은 도무지 이 기분을 전하지 않는다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보다 앞으로가 문제라는 겁니다.”
가만히 슈레디안의 말을 듣고 있던 아이네즈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양파와 칼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허리를 굽혀 식탁 아래로 굴러떨어진 감자를 집어 들었다.
슈레디안의 말뜻을 헤아리려는 듯 아이네즈의 눈길이 슈레디안을 향했다가 다시 식탁으로 옮겨왔다. 잠깐의 시간차를 두고 늘 그러하듯 약간 느릿하지만 차분한 울림의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 새로 흘러 나왔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난 잘 모르겠네요.”
언제나 자신보다 한 수 앞서 보고, 어른스럽게 매사를 꾸려온 아이네즈가 정녕 자신의 말뜻을 파악하지 못한 것일까. 원래 이런 식의, 감정이 얽힌 문제에는 사내보다 여인 쪽이 더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던가.
아이네즈가 다 알아듣고도 저를 놀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자신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그는 혼란스러웠다.
슈레디안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두서없이 말을 이어가면서도 그는 이런 식으로 상대에게 휩쓸리는 것은 저답지 않은 짓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이네즈도 알다시피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예를 들어 내가 호송 중이던 죄인이라던가, 배에서 탈출한 노예일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아이네즈는 저도 모르게 표류 당시 슈레디안이 입고 있던 옷을 떠올리고 말았다. 또 존대를 사용하고 있어도 묘하게 고압적인 그의 말투와 사소하기 짝이 없는 가사조차 스스로 해본 적 없는 양 매사에 어색해하던 모습을 상기했다.
지푸라기가 묻어 약간 더러워졌으나 여전히 빛을 내는 듯한 금발과 티 없이 맑고 깨끗한 피부, 상처가 남긴 했으나 여인인 저의 손보다도 훨씬 더 곱고 우아한 손가락으로 시선을 미끄러뜨리며 약간은 한심스러운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 해도 그렇지 한 번 보고 들은 것은 결코 잊는 법이 없을 만큼 영민한 슈레디안이 어떻게 저리 터무니없는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당신이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데요.”
“정말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더, 더 문제라고요!”
슈레디안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네즈는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나며 거의 쏘아붙이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어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하자면 나는 남자고 당신은 여자라는 게 문제인 겁니다. 게다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일도 거의 없이 온종일 둘만 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당신은 이게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건 좋지 않아요. 위험하다고요. 더구나 당신은 내가 어디서 온 놈인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인데.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기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이 상황을 끝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대단한 자만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이네즈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지만 뭔가 슈레디안의 흥분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냉랭함이 어려있었다. 슈레디안은 그 차가움에 밀려 자신도 모르게 어조를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내 말을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나는 내가 잘나서 당신이 나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놓여 있는 객관적인 상황 자체가 문제라는 겁니다.”
아이네즈는 빨려 들어갈 듯 새파랗게 빛나는 슈레디안의 눈동자를 마주 보며 어쩌면 그의 걱정이 기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찔하게 밀려오는 현기증과도 같았다.
잠시 후에 이어진 그녀의 말은 기실 슈레디안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향한 자제의 목소리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당신 이야기는 우리가 일부러 피하지 않는 한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서 서로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거잖아요. 하지만 그걸 알고 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요? 그 점을 아는 슈레디안이 자기감정에 휩쓸리는 어리석은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리고 그녀는 식탁 위에 소복하게 쌓여있는 채소를 그릇에 옮겨 담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것들을 씻어올 테니까 식탁 위 좀 치워주시겠어요? 사다리 수리는 이미 끝난 듯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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