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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연

왕도와 패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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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19.04.01 11:16
최근연재일 :
2020.02.09 22:13
연재수 :
271 회
조회수 :
116,533
추천수 :
2,679
글자수 :
1,047,762

작성
19.04.01 15:25
조회
2,634
추천
34
글자
7쪽

1장 표류 3화 3년만의 손님

DUMMY

3화 3년만의 손님





“또 아픈 거예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의식을 잃고 앓아누워 있었을 때도 그는 몇 번인가 이런 식으로 발작을 일으켰다. 정신을 차렸다 하여 방심한 것이 잘못이었다. 아이네즈는 본능적으로 청년을 감싸 안았다.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쉬이. 괜찮아질 거예요······.”


다친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거나, 난폭하게 몸부림치는 와중에 겨우 피가 멎은 상처 부위가 다시 터질까 봐 겁이 났다. 그녀는 한 손으로 청년의 다친 손을, 그리고 나머지 손으로는 상대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그를 달래었다. 그녀의 품 안에서 거친 요동이 차츰 잦아들었다. 그것은 마치 거센 파도가 한차례 밀려들었다 물러가는 것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숨을 쉬어요, 길게. 더 천천히요, 네, 그렇게요. 다시 한번요, 이제 곧 편해질 거예요.”


가파르게 치솟은 날숨이 가라앉는가 싶더니 청년의 얼굴에 닿은 그녀의 옷자락이 천천히 젖어 들었다. 다 큰 청년이 우는가 싶어 놀랐지만, 아이네즈는 내색하지 않은 채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토닥였다. 이럴 때 몸을 떼어내거나 아는 체를 하면 상대가 당황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한참 후 그가 습기에 젖은 음성으로 운을 떼었다.


“······모르겠습니다.”


상대가 진정이 되기를 기다려 아이네즈가 한 걸음 물러나자, 그가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아무리 떠올리려 애를 써봐도, 모르겠어요.”


반복되는 모르겠다는 말은, 그의 심경을 드러내듯 초조하고도 절망적인 울림을 한가득 담은 채 좁은 공간에 아리게 메아리쳤다.


자신은 누구냐고, 왜 이런 모양새로 이곳에 홀로 떨어진 것이냐고, 이름도 나이도 신분도 저를 설명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데, 여기저기 상처 입고 부서진 몸을 하고서 저를 도와 기억을 되살려줄 만한 이조차 없는 낯선 곳에서 어찌해야 좋으냐고, 그는 쫓기는 듯한 눈빛을 하고서 절박한 표정으로 답을 알 리 없는 그녀에게 소리 없이 묻고 있었다.


흐느낌처럼 잦아드는 모르겠다는 말이 그가 두려움 속에서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한 질문이고,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 공포의 다름 아니란 사실을 그녀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는 대체 뭐라 해야 하는 걸까. 자신은 겪어보지 아니한 일이라서, 하지만 언뜻 그의 처지를 헤아려보는 것만으로도 짐작되고도 남는 끔찍한 두려움 때문에, 섣부른 위로도, 무책임한 동정도, 값싼 연민도 할 수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보이지 않는 창살이 되어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이네즈의 눈에는 청년의 핏기 없는 하얀 피부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한층 더 창백하게 굳어가는 것처럼 비쳤다. 묘하게 안타까운 심정이 되는 건 아마도 그 때문일 거다. 아이네즈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 머무세요. 지금은 머리도 몸도 아파서 잠깐 그런 것일 수도 있잖아요. 몸이 나아지면······. 네, 시간을 두고서 마음을 편히 하면 틀림없이 좋아질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네즈가 어렵사리 고른 위로의 말에, 침대 끝에 고정되어 있던 청년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올라왔다. 깊은 바다 빛 눈동자에 형용하기 어려운 심정이 어려있었다.


아이네즈는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몰아버리기라도 하려는 양 조금 더 힘주어 덧붙였다.


“아버지께서도 그러길 바라실 테니까요.”


고집스럽게 다물려 있던 청년의 입술 새로 나지막한 웅얼거림 비슷한 인사말이 흘러나왔다.


“······고맙습니다. 여러 가지로 정말. ”


“인사받을 만한 일이 아닌걸요. 아픈 사람을 무턱대고 밖으로 내몰 사람은 없답니다. ”


그녀는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채 느리게 대꾸했다.


“그보다도 수프를 다시 가져와야겠네요.”


“아······.”


청년의 눈길이 수프가 쏟아진 이불을 거쳐 엉망이 된 아이네즈의 치맛자락으로 내려갔다. 서서히 움직인 시선이 마침내 발갛게 익은 아이네즈의 발등에 닿았다. 발등의 화상 자국을 본 청년의 얼굴 가득 당혹감이 어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었다.


“미안해요, 저 때문에 발이······.”


청년의 말에 아이네즈도 뒤늦게 고개를 약간 숙여 자신의 왼발을 보았다.


“보기에만 그래요. 별로 안 뜨거웠으니까 마음에 두지 말아요.”


아이네즈는 수프가 묻은 이불을 수건으로 닦아 방 한편에 접어둔 후에 엉망이 된 바닥을 치우고는, 수프를 다시 끓여오겠다며 방을 나섰다. 집 옆에 있는 우물에서 발을 씻고 나서 청년에게 먹일 수프를 불 위에 올려놓은 이후에야 그녀는 비로소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그릇을 받쳐 들고 청년에게로 다가갔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과부터 해오는 청년에게 아이네즈는 가만히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파서 그런 건데요. 이번엔 식기 전에 드세요. 다 먹은 뒤에 이불은 다른 것을 꺼내드릴게요. 저건 아무래도 내일 빨아야 할 것 같으니까요.”


“염치불구하고 그럼 잘 먹겠습니다.”


아이네즈는 청년이 수프를 떠먹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무심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깨어난 것을 보면 아버지께서도 한시름 놓으시겠지.’


희미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문득 아버지가 핏기없는 얼굴로 실신한 청년을 업고 돌아온 나흘 전 일이 또렷이 떠올랐다.


‘그래, 그 날 저 사람은 삼 년 만에 우리 마을을 방문한 첫 손님이 되었지.’


아이네즈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삼 년 전 이름 모를 전염병이 마을을 휩쓸고 간 후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이사해 버려서 본래 스무 가구 남짓이었던 뮤즈 마을은 이제 행정 구역상 케타로스 영지에서 완전히 잊힌 곳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의 뼈를 묻은 곳을 떠날 수 없다는 부친의 마음을 헤아리며 외딴곳에서 생활해 온 지도 오래였으므로, 걸어서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릴 법한 거리에 있는 장터에 가지 않는 한 그녀가 사람 구경을 할 수 있는 일이란 흔치 않았다.


전염병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아버지와 둘이서 지켜온 이 오두막의 첫 손님인 청년을 아이네즈는 며칠간 제대로 잠도 못 자면서 정성껏 간호했다.


난파당한 그를 자신의 부친이 발견한 것도, 그리고 상처 입은 채 괴로워하고 있는 그를 감싸 안아줄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하며.


아이네즈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창 너머로 땅거미가 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가 거의 다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지방을 나서며 그녀는 청년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다행이야. 정말 잘 되었어. 무사히 깨어나서.’


몇 번이고 되뇌는 아이네즈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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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12장 전장에 핀 꽃 7화 지원군의 본진 합류(12장 인명록) 19.05.23 414 10 9쪽
74 12장 전장에 핀 꽃 6화 출격요청 19.05.22 613 9 8쪽
73 12장 전장에 핀 꽃 5화 전장의 꽃 19.05.21 434 10 7쪽
72 12장 전장에 핀 꽃 3-4화 이반의 조짐 19.05.20 536 12 10쪽
71 12장 전장에 핀 꽃 2화 불꽃 같은 여인 19.05.19 426 8 8쪽
70 12장 전장에 핀 꽃 1화 굳건한 성벽 19.05.18 453 8 8쪽
69 11장 분열의 조짐 7-8화 최종단안(11장 인명록) 19.05.17 440 9 12쪽
68 11장 분열의 조짐 6화 뮤켄의 충고 19.05.16 504 8 9쪽
67 11장 분열의 조짐 5화 패퇴 19.05.15 450 10 7쪽
66 11장 분열의 조짐 3-4화 양동작전 19.05.14 429 10 10쪽
65 1부 11장 분열의 조짐 1-2화 후방기지 괴멸 소식 19.05.13 511 9 11쪽
64 10장 진흙 속의 연꽃 7화 투항 제의 (10장 인명록) 19.05.09 465 8 13쪽
63 10장 진흙 속의 연꽃 5-6화 접전 19.05.08 519 8 7쪽
62 10장 진흙 속의 연꽃 4화 적의 공격에 대처하는 각자의 자세 19.05.07 464 8 8쪽
61 10장 진흙 속의 연꽃 3화 후방기지 카르테 19.05.07 483 7 7쪽
60 10장 진흙 속의 연꽃 2화 이해 19.05.07 480 8 8쪽
59 1부 10장 진흙 속에 핀 연꽃 1화 불만 19.05.07 525 6 7쪽
58 9장 전설의 시작 7화 조력요청(9장 인명록) 19.05.06 524 7 12쪽
57 9장 전설의 시작 5-6화 전후처리 19.05.06 569 8 12쪽
56 9장 전설의 시작 4화 최초의 승리 19.05.06 551 7 11쪽
55 9장 전설의 시작 3화 교전 19.05.05 517 9 9쪽
54 9장 전설의 시작 2화 기습 19.05.04 504 12 9쪽
53 9장 전설의 시작 1화 위장잠입 19.05.03 496 8 10쪽
52 8장 효시 7화 작전계획(8장 인명록) 19.05.02 557 11 12쪽
51 8장 효시 6화 용기, 혹은 이길 수 있다는 신념 19.05.02 539 8 11쪽
50 8장 효시 5화 아나브릴 방어군에서 얻은 정보 19.05.02 486 9 9쪽
49 8장 효시 3-4화 사령관과 참모장 19.05.01 508 11 13쪽
48 8장 효시 2화 전장의 밤 19.05.01 534 10 11쪽
47 8장 효시 1화 행군시작 19.04.30 560 12 11쪽
46 7장 전환점 7화 최초의 동료(7장 인명록) 19.04.30 569 8 11쪽
45 7장 전환점 6화 입바른소리 19.04.29 539 11 8쪽
44 7장 전환점 5화 보이지 않는 벽 19.04.29 558 11 7쪽
43 7장 전환점 4화 출전령 19.04.28 572 10 7쪽
42 7장 전환점 3화 하크스 지원군 19.04.28 648 11 9쪽
41 7장 전환점 2화 정치적 포석 19.04.27 609 12 10쪽
40 1부 7장 전환점 1화 연전연패 19.04.27 579 11 8쪽
39 6장 개전 8화 승진 거절(6장 인명록) 19.04.26 586 11 8쪽
38 6장 개전 7화 뮤켄장군 19.04.26 631 13 9쪽
37 6장 개전 6화 개전 이후 19.04.25 572 9 7쪽
36 6장 개전 5화 선제공격 19.04.25 625 10 7쪽
35 6장 개전 4화 선전포고 19.04.24 639 13 7쪽
34 6장 개전 3화 어머니와 아들 下 19.04.24 572 16 11쪽
33 6장 개전 2화 어머니와 아들 上 19.04.23 598 12 7쪽
32 1부 6장 개전 1화 진상규명요구 19.04.23 631 10 11쪽
31 5장 태풍의 눈 8화 안타미젤의 결심(5장 인명록) +2 19.04.22 696 15 12쪽
30 5장 태풍의 눈 6-7화 안타미젤 왕자 19.04.22 697 10 8쪽
29 5장 태풍의 눈 5화 계륵과도 같은 패 19.04.21 633 12 9쪽
28 5장 태풍의 눈 3-4화 충성서약 19.04.21 735 11 13쪽
27 5장 태풍의 눈 2화 사직서의 파장 19.04.20 744 14 11쪽
26 1부 5장 태풍의 눈 1화 사직원 19.04.19 743 15 7쪽
25 4장 부위정경 7화 생존전략(4장 인명록) 19.04.19 752 16 16쪽
24 4장 부위정경 6화 속고 속이는 싸움 19.04.18 764 19 10쪽
23 4장 부위정경 5화 기만 19.04.18 871 14 13쪽
22 4장 부위정경 4화 공주의 부름 19.04.17 822 19 10쪽
21 4장 부위정경 3화 거리의 아이 19.04.17 852 18 10쪽
20 4장 부위정경 2화 세레즈의 물밑 접촉 19.04.16 829 20 7쪽
19 1부 4장 부위정경 1화 코네세타의 공주 19.04.15 869 19 10쪽
18 3장 폭풍전야 6화 주전론을 위한 막후교섭(3장 인물소개) 19.04.14 907 21 12쪽
17 3장 폭풍전야 4화 밀실정치 下 +2 19.04.13 1,013 21 7쪽
16 3장 폭풍전야 3화 밀실정치 上 +2 19.04.12 1,002 23 7쪽
15 3장 폭풍전야 2화 그윈 재상 19.04.11 1,049 23 8쪽
14 1부 3장 폭풍전야 1화 태자의 실종 19.04.10 1,192 21 11쪽
13 2장 애별리고 7화 이별(1-2장 인물소개) +4 19.04.10 1,200 33 8쪽
12 2장 애별리고 6화 고작 마음 하나 +2 19.04.09 1,253 21 9쪽
11 2장 애별리고 5화 이주명령 19.04.09 1,399 26 9쪽
10 2장 애별리고 4화 떨림과 설렘 +4 19.04.07 1,393 25 7쪽
9 2장 애별리고 3화 염색 +2 19.04.05 1,470 24 7쪽
8 2장 애별리고 2화 현기증 +2 19.04.04 1,485 28 7쪽
7 1부 2장 애별리고 1화 마음의 향방 19.04.03 1,535 26 7쪽
6 1장 표류 6화 자각 +2 19.04.03 1,647 32 7쪽
5 1장 표류 5화 바다를 닮은 여인 +6 19.04.02 2,070 33 8쪽
4 1장 표류 4화 슈레디안의 고민 19.04.01 2,285 37 8쪽
» 1장 표류 3화 3년만의 손님 19.04.01 2,635 34 7쪽
2 1장 표류 2화 신분 은폐 19.04.01 3,542 46 7쪽
1 <제1부 펜데스칼 전쟁> 제1장 표류 1화 난파당한 청년 +4 19.04.01 6,792 6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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