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전설의 시작 2화 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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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습
동이 터오기 직전 새벽녘의 짙은 안개가 마치 형체 없는 긴 휘장처럼 어슴푸레하게 물든 첸트로빌 성 앞의 야트막한 둔덕에 부드럽게 드리워져 있었다. 가시 거리라고 해봐야 기껏 십 오륙 미터나 될까. 두꺼운 안개 탓인지 바로 앞에 있는 하크스의 본성마저도 실제 거리보다 훨씬 더 많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첸트로빌 공략 부대 좌측 입구 가까이에 위치한 천막 하나에서 병사 하나가 기지개를 펴며 졸린 표정으로 나왔다. 그는 새벽녘의 축축하고 습기 찬 공기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교대를 위해 자신이 맡은 위치로 다가갔다.
"젠장! 어두워서 아직까지 한밤중인 줄 알았잖아. "
그는 늘 그러하듯 들고 있던 창을 진영 입구 기둥에 기대 놓은 채 다시 한번 늘어지게 하품을 해댔다. 그러나 그의 맞은편에 서 있던 동료 몬셀로는 그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직 어두운 새벽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봐! "
에딘은 몬셀로의 어깨를 가볍게 쳐서 그의 주의를 돌렸다. 뭔가에 이끌리듯 고개를 내린 그가 멍한 눈빛으로 에딘을 보았다.
"으응. 왔구나. "
"대체 왜 그래? 정신 나간 놈처럼. "
에딘이 동료의 옆구리를 장난스럽게 툭 치며 농담조로 물었지만, 몬셀로는 얼굴에 드리워진 심각한 그늘을 지우지 않은 채 아직 어둡기만 한 새벽 하늘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게 뭘까? "
"응? 뭐 말이야? "
에딘이 고개를 돌리며 되묻자, 그는 한층 더 심각한 어조로 답했다.
"저기, 저 반짝이는 거. "
보이긴 뭐가 보이냐고 투덜대면서도 에딘은 동료의 손가락이 향하고 있는 지점에서 뭔가를 발견하기 위해 몇 번이고 두 눈을 끔벅였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걸?”
잠시 그쪽을 보던 에딘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몬셀로의 시선은 못이라도 박힌 양 아직껏 새벽하늘에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또 있다. 저쪽에도······.또.”
가느스름하게 두 눈을 좁히던 그가 혼잣말하듯 나직하게 웅얼거렸다. 마지못해 다시 하늘로 시선을 던지는 에딘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기색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동료가 말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찾던 에딘이 순간적이나 뭔가를 보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굳어진 듯 가만히 하늘을 보고 있던 몬셀로의 입에서 나직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뭔가 형체를 확실히 알 수 없는 검은 물체들이 희뿌연 안개를 뚫고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것을, 에딘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보았다. 몬셀로는 멍하게 서 있는 에딘을 거칠게 밀어젖히며 비상시를 대비하여 진영 입구에 비치해 둔 커다란 가죽 북이 매달려 있는 쪽으로 내달렸다.
"기습이다!"
그는 미친 듯이 북을 치며 목청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질렀다. 둥둥 하는 묵직한 북소리가 절규하듯 반복되는 몬셀로의 외침과 함께 진영 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전원 기상! 적의 공격이다!! "
***
새벽하늘을 가르고 빠른 속도로 날아온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코네세타 군 진영 안에 떨어지며 지면을 울렸다. 간발의 차이로 그 돌덩이를 피한 듀론이 막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또 하나의 바위가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군막 위에 떨어졌다.
그때까지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 있던 천막 하나가 부대 좌익 후방 너머로부터 무서운 기세로 날아온 바위에 맞아 힘없이 주저앉았다. 시커먼 바위와 함께 번들거리는 기름 단지가 진영 곳곳에 떨어지며 고요하던 진지 안은 온통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둥둥.
소란스러운 부대 안에서 병사들의 집합을 알리는 묵직한 북소리가 지치지 않고 이어진다.
진영 너머 저 멀리서부터 섬찟한 함성이 울린다. 미처 피하지 못한 채 쓰러진 막사 안에서 비명을 지르는 병사들. 소란통에 북소리가 잠기는가 싶더니 전율을 일으키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코네세타군 첸트로빌 공략부대의 좌익 후방에 거대한 투석기를 수십 대 배치하여 하늘을 시커멓게 수놓던 세레즈군의 투석이 잠시 멈칫하는 듯 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등 뒤가 밝아진 듯한 느낌이었다.
슉슉.
화살이 새벽 공기를 찢고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후방에서 가해지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진지를 방어하기 위해 전 부대가 반전된 지금으로는, 무방비 한 등 뒤, 즉 첸트로빌 성에서부터 화살들이 쏟아진다. 하크스의 본성에서 쏘아대는 대팻밥과 타르를 입힌 거대한 불화살에 맞아 공략부대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천막들이 기름을 뒤집어쓰고 불화살에 맞아 시커먼 연기를 내며 타오른다. 불길에 더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는 군막 속에서 병사들이 아우성친다. 미처 무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뛰쳐나오는 병사들의 참혹한 모습. 불길에 놀라 찢어질 듯 울어대는 말들.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규합하려는 분대장들의 악다구니. 부대 안의 처참한 광경에 듀론은 이를 악물며 사령관의 막사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각하! 적의 기습입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보고하는 젊은 부사령관을 약간은 피곤한 기색으로 바라보며 사령관 쉐트인이 나직하게 물었다.
"어느 방향인가?"
순간 땅을 울리는 광음이 들려온다. 빌어먹을 놈들이 다시 투석을 개시한 모양이다. 잠시 소리가 들린 방향을 노려보던 쉐트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묵묵히 갑옷의 잠금쇠를 조였다.
"진영 후미 중앙에 적의 보병 군단이 나타났다 합니다."
사령관은 침착한 태도로 침상 쪽으로 걸어가 그 기둥에 걸어두었던 장검을 끌러 내렸다.
"보급창고는?"
멀리서 함성이 들려온다. 멈칫한 채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불안한 시선을 돌리는 부사령관을 응시하며 사령관이 다시 확인 차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보급창을 엄호할 부대를 보냈는가?"
아들만큼 어린 연치의 부사령관이 당황한 기색으로 시선을 떨구는 것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뱉은 그는 낮지만 확고한 음성으로 지시했다.
"우익의 기병 부대 중 일부를 식량창과 무기창으로 보내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도록. 그럼 나가도록 하지. "
쉐트인 장군은 더이상 듀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막사 안을 나섰다.
***
"적군이 몰려온다! "
"궁수대 집합! "
"보병대 뭐하나! "
쿵 하는 광음과 함께 거대한 돌덩이들이 떨어지는 가운데, 차츰 옅어지고 있는 새벽 안개 사이로 일단의 군대가 보였다. 하늘을 찌를 듯한 장창을 앞세운 적의 보병 군단이 흐트러짐 없이 진지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궁수대 장전! 발사 준비! "
궁병대장들은 급하게 집합시킨 궁병들을 5열 장방형으로 배치하여 전방의 적 보병 군단을 향해 발사 준비를 시켰다. 그러나 세레즈 군은 마치 전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궁수부대의 화살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은 듯, 무너진 제방을 타고 사납게 흘러내리는 급류처럼 빠른 속도로 돌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미친놈아!! 성 마르게 굴지 마!"
주춤하는 기색 없이 맹렬하게 돌진하는 적군을 보고 지나치게 긴장한 궁병 하나가 미처 발사 명령이 내리기 전에 활시위를 놓았다. 지시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던 궁병 대장 하나가, 제멋대로 날아간 화살이 얼마 못 가 힘없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그 병사를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욕설을 퍼부었다.
"대기! 발사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대기하란 말이다!! "
얼굴까지 붉히며 소리를 빽 지른 그는, 주눅이 들어 고개를 푹 숙인 든 병사의 모습을 보고서야 언성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적이 사정권 안에 들어온 뒤 발사해도 늦지 않다!"
그 순간에도 적은 일정한 빠르기로 다가오고 있었다.
"발사!"
궁병 대장이 전면을 향해 칼을 뽑아 들며 우렁차게 외쳤다.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장방형으로 앉아 대기하고 코네세타 궁병대 제1선에서 일제히 화살이 뿌려졌다. 한 번 활시위를 놓은 병사들은 곧 몸을 웅크려 그 뒤에 선 2선의 궁병들이 활을 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발사!"
또 한 차례 장전되어 있던 수많은 화살들이 궁수 부대의 활시위를 퉁기고 경쾌하게 날아갔다. 숙련된 궁병들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궁병대장들의 발사 명령에 따라 2,3초 간격으로 활시위를 놓았다. 그때마다 사 미터는 족히 될 법한 장창을 들고 돌진하던 적의 보병들이 하나둘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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