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전환점 4화 출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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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출전령
재상 관저에서 왔다고 하는 하인의 뒤를 따라서 태자궁이 있는 본성을 나와 외성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걷고 있는 미드프레드의 걸음걸이는 평소와는 달리 다소 흐트러져 있었다.
그를 안내해 가던 하인은 이 어린 녀석이 긴장을 해도 단단히 했구나 하고 내심 코웃음을 쳤으나, 사실 그로서는 긴장할 여유 같은 것도 없었다. 단지 재상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대한 의문만이 줄곧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을 뿐이었다.
그 역시 여왕을 위시한 아체프렌의 적대 세력이 언제까지고 자신을 궁 안에 내버려 두리라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태자의 죽음이 기정사실화되어버린 작금 껄끄러운 상대임이 틀림없는 자기를 계속해서 궁에 두고 볼 여왕도 아니었고, 미드프레드 역시 답답한 마음에 차라리 아무런 언질이 없을 때 궁내부를 나가려 했던 것이다.
물론 태자궁에서 군대로 거취를 옮기는 일조차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몇 달 전에 시종장에게 제출한 사직원은 아직까지도 수리되지 않았고, 당연한 일이지만 사직원이 처리되지 않은 이상 입대 지원서가 받아들여질 리도 만무했다. 그렇듯 미드프레드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방안에 틀어박혀 지낸 지도 벌써 석 달이 족히 넘어서고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 와서 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재상이 그를 갑작스럽게 관저로 불러들일 이유 따위는 없어 보였다. 게다가 어떤 면으로 보아도 그 짐작할 수 없는 이유가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조금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겠지. ’
미드프레드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덕에 그는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상태로 재상의 집무실 앞에 설 수 있었다.
“나으리, 미드프레드 그론레이를 불러왔습니다.”
잠시 후 문 너머 안쪽으로부터 미드프레드의 기억에도 남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여보내거라. ”
“예. ”
하인은 익숙한 손길로 조용히 문을 열고 미드프레드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미드프레드는 침착한 태도로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서서 재상을 향해 깊이 허리를 굽혀 일단 예의를 갖추었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책상에 앉아 손에 든 문건을 살펴보고 있던 노재상이 고개를 들어 그를 힐끗 보았다.
“자네 입대 지원서를 제출했더군. 내 오늘 자네를 이리 부른 것은 그에 대해 전해줄 말이 있기 때문이네.”
그윈 재상은 미드프레드의 인사를 받아주려는 기색조차 없이 책상 한편에 쌓여있는 서류를 뒤적여 몇 개를 골라내며 곧장 용건을 꺼냈다.
“들리는 소리가 있었을 테니 간단히 말하지. 현재 우리 세레즈는 코네세타의 갑작스러운 침공으로 인해 수난을 겪고 있네. 이미 하크스 영지의 상당 부분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고, 이어 로크라테 영지마저 적에게 항복함으로써 상황은 보다 급박해 졌다고 할 수 있지.”
특별히 내던지는 듯한 말투는 아니었지만 무심하게 이어지는 재상의 목소리는 묘하게도 자신을 내리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던져 주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크스 영지의 본성인 첸트로빌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어. 그곳은 이미 적의 수중에 떨어진 남부 영토 중에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거점이라 할 수 있을 테지. 폐하께서는 어려운 상황 아래서도 저항을 그치지 않는 하크스 백성들의 의기를 북돋워 주시기 위해 첸트로빌에 농성 지원군을 파병하시기로 결정하셨네.”
미드프레드는 미간을 좁힌 채 재상이 일부러 자신을 불러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까닭에 대한 의문만을 곱씹었다. 하크스의 지원군 파병과 자신의 입대와 관련성이 있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뿐이다. 하지만 자기가 지원군에 소속되었다 해도 일국의 재상인 그윈이 일개 평민에 불과한 자신을 따로 집무실로 불러들여 전해줄 필요성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 정도 일이라면 군부대 배치 명령서를 하달하는 것이면 충분할 터인데.
그러나 미드프레드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재상이 딱딱하리 만큼 명확한 목소리로 여왕의 명령을 전했다.
“그대는 예를 갖춰 폐하의 명을 받들라. 세레즈의 국왕 세느비엔느 1세의 이름으로 미드프레드 그론레이를 하크스 지원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병력 삼천을 내릴 터이니 출전령을 받는 즉시 하크스로 내려가 영주 로엘 공과 더불어 영지의 수복을 달성하라. ”
왕명을 받기 위해 부복해 있던 미드프레드는 한순간 본인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자신은 그토록 원하던 출전령을, 그것도 한 부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의 직책을 받았다. 가장 확실하게 죽어줄 수 있도록.
병력 3천으로 하크스 영지를 탈환하라는 왕명의 뜻은 명료했다. 명령을 내린 여왕은 물론, 이 자리에서 고압적인 자세로 그 말을 전하고 있는 재상 역시 하크스의 수복 따위는 애초부터 기대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하크스 지원군은 그야말로 정치적인 명분을 달성하기 위해 조직된 완벽한 희생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미천한 평민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폐하께서 자네에게 이러한 기회를 내리는 것은 태자 전하에 대한 자네의 충성심을 가상히 여기시기 때문이네. 그러니 목숨을 다하여 폐하의 성총에 보답해야 할 것이야.”
‘병력 3천으로 말입니까.’
이렇게 되묻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억누른 채 미드프레드는 고개를 숙였다. 움켜쥔 손바닥에 손톱이 아프게 파고들었다. 미드프레드는 어떻게든 버티라 하였던 아체프렌의 말을 떠올렸다.
“섬기던 주인을 따라 죽지도 못한 불충한 몸입니다. 그런 제게 이리 크신 광영을 내려 주시니 폐하의 은덕에 차마 고개를 들 낯조차 없습니다.”
냉정을 유지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갈라져 나오는 것만은 미드프레드 역시도 어쩔 수 없었다.
“암, 생전에 자네를 총애하신 태자 전하를 생각해서라도 그분께 누가 되어선 안 될 게야.”
심술 궂게 느껴질 만큼 느릿한 어조로 재상은 그의 말을 받았다. 미드프레드는 숙인 고개 위로 재상의 조소 어린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어차피 더이상 나빠질 것도 없는 상황이었지 않은가. 이것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기회인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다면, 꼭 해야만 한다면, 당당히 맞서리라.
“하크스 지원부대의 군사 배치와 참모진 명단이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참모장에게 듣게나.”
재상은 책상에서 꺼내온 몇 가지 서류를 그 앞으로 내밀었다.
“출정 전에 폐하께서 친히 불러 격려해 주실 터이니 분발하도록. ”
“예. ”
“선전을 기대하겠네. ”
‘입에 발린 소리! ’
미드프레드는 치밀어 오르는 반감을 가리기 위해 깊숙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한 마디 한 마디 토해내는 기분으로 대답했다.
“미천한 목숨이나마 아낌없이 바쳐 국은에 보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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