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전설의 시작 5-6화 전후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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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후처리
책상머리에 기대선 채 서류를 살펴보는 어린 사령관의 진지한 옆얼굴을 잠시 지켜보던 뮤켄은 문득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살 사이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환하게 부서져 내리면서 방안에는 농성 중인 성의 일부라고 생각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안온한 빛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어쩌면 너무나도 주변 정황에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움에 그는 가볍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사령관 미드프레드를 위시로 한 하크스 지원군이 성 외곽을 둘러싸고 있던 코네세타 군을 돌파하여 첸트로빌 성에 들어온 지도 벌써 이틀이 지났다. 하크스 영주는 만일에 대비하여 성안의 경계를 한층 엄중히 하고 있었지만 코네세타 군은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전선은 일시적이나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병사들이 전투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하며 쉬는 동안 뮤켄을 비롯한 참모부 전원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틀을 보냈다.
전사자와 실종자들의 명단 확보만으로도 절반의 인력이 소요되는 가운데 부상병들의 상태까지 점검하고, 부대별로 공이 있는 자를 파악하고 서류를 작성했으며, 첸트로빌 성안에 있던 기존 병력과의 마찰 없이 명령 체계를 재조정하는 등 일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지금 그가 미드프레드를 찾아온 것도, 사후 처리에 대한 중간보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다 보셨습니까? "
손에 들고 있던 서류들을 책상 위로 내려놓는 미드프레드에게 시선을 돌리며 뮤켄이 짧게 질문했다.
"예, 대강···."
책상 모서리를 돌아 의자에 앉은 그는 앞에 놓여 있는 공훈자 명단을 뮤켄 쪽으로 가볍게 밀었다. 명단에 오른 이름 중 몇몇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보병대 소속 앤스 라 이스메이, 스테이슨 셀커크, 애런 베어드. 기병대 소속 애들라이 카우포버, 레놀 라 슐라이어, 궁병대 소속 크로젤 라 메이샤드를 각 소속 병과 분대장으로 임명하도록 합시다."
물론 전투에 참석한 병사들이 세운 개개인의 전공에 대한 포상도 중요하지만, 사령관인 미드프레드가 공훈자 파악에 열성을 기울이는 것은 부대 지휘 상의 실질적인 필요성 때문이었다. 부대를 분리하여 독립 작전을 수행할 때 소부대를 이끌 일선 지휘관의 부족으로 고심했던 것을 고려하여, 그는 참모장인 뮤켄과 의논 끝에 부대별로 전공을 세운 병사들을 승급시켜 분대장으로 보임케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지난번처럼 참모장 뮤켄을 비롯한 참모부 일원들에게 지휘권을 대리하여 맡기는 것도 방법이었으나, 앞으로도 그러한 임시방편에 의거해서 부대를 이끌어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차라리 이 기회에 확실히 지휘관들을 정해두는 편이 여러모로 좋을 듯했다.
"예, 그리 조처하도록 하겠습니다."
뮤켄 역시 사령관의 지시에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선발 기준이 전공이 되는 만큼 인사에 대한 병사들의 반발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무엇보다 이 임명으로 공에 대한 상급을 대체시킬 수 있으니 사기진작을 위해서도 긍정적이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이번 사후 처리도 그렇지만, 작전 수행에 있어 전반적으로 참모부의 역할이 컸습니다. 적절한 포상을 하고 싶으나 저는 참모들의 승급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장군께 그에 대한 조언을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고심한 기색이 역력한 사령관을 바라보며 뮤켄이 엷은 웃음을 떠올렸다.
"작전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참모진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전공에 대한 화려한 대가를 원해서야 참모부에 몸담을 수 없지요. 저희는 이미 승리로 보답을 받았으니 그에 관해서는 더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던 미드프레드가 가볍게 머리를 흔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노고에 대한 치하의 말이라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저도 할 생각이지만, 일단 장군께서 말씀하시는 편이 더 마음에 와닿을 테니까요. "
그는 책상에 놓여 있는 서류들을 정리하며 빠른 어조로 지시했다.
"가급적 빠른 시일내에 분대장 임명을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수고해 주시고······."
짧고 분명하게 이어지는 노크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문 쪽으로 옮겨갔다.
"들어오시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드프레드를 위해 마련된 집무실의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열려진 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선 사내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영주님께서 장군을 만나 뵙기를 청하십니다. "
보여줄 게 있다더니, 역시 그 일인가. 그는 자신이 하크스 영주 로엘 공에게 코네세타 군의 새로운 무기인 화약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느냐고 물었던 것을 떠올렸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질문을 받은 순간 영주의 반응은 분명 그 무기에 대해 충분한 사전 지식을 갖고있는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것이었다.
"알겠소. 지금 바로 가지요."
미드프레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만약 영주가 언급했던 보여줄 것이 화약을 의미한다면, 이는 만사를 제쳐두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시해야 할 일이었다. 미드프레드는 곁에 있는 참모장에게 시선을 돌려 함께 갈 것을 권유했다.
"밀시언 장군의 부대에서 들었던 무기 이야기, 기억하시지요? 아마도 그 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6. 화약
"이 사람에게 화약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었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소. 나는 코네세타 군이 공격해오기 그 이전부터 그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소. "
한숨을 쉬듯 잠시 말을 끊었다가 하크스 영주 크리스티앙 레 로엘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단순히 알고 있었다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겠지···."
그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다가 시선을 들어 정면에 앉아 있는 미드프레드를 마주 보았다.
"내 말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화약이라는 것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요. 일부분에 충격이나 열을 가하면 순간적으로 엄청난 소리와 열을 내면서 타버리는 물질이오. 그를 일러 폭발이라고 하지."
가만히 듣고 있던 미드프레드의 미간이 보일 듯 말듯 좁혀지는 듯했다.
"커런스에서는 거의 백여 년 이상이나 일찍부터 폭발 물질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고, 우리가 자국 내의 전란 때문에 무기 개발에 둔감해 있었던 사이, 코네세타 역시 커런스에서 그 기술을 어느 정도 배워 온 듯 하오."
"···261년에 켈리토스라는 자가 황과 생석회, 석유 등의 물질을 혼합하여 '커런스의 불'이란 이름의 폭발성 물질을 만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적군이 갖고있는 것이 그와 비슷한 겁니까?"
영주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미드프레드를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화약이라는 것을 보지도 못한 그에게 그 존재에 대해 어떻게 설명을 한다 해도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가 보유한 지식은 일반적인 상식 수준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긴 했지만, 어찌 되었건 설명하기가 한층 더 편해지겠다고 여기고 로엘 공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다르다고 할 순 없겠지. 지금 적군이 갖고있는 것은, 일단 코네세타 화산 지대에서 나는 자연황과 커런스 서부 건조 지역에서 산출되는 초석을 섞은 물질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소.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해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실례되는 질문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영주님께서 어떻게 이토록 그에 대해 자세한 지식을 갖고 계시는지 궁금하군요. "
정색을 하고 물어오는 뮤켄을 향한 노영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모를 리가 없지, 하크스에서는 오래전부터 커런스로부터 발화성을 가진 물질들을 상당량 들여놓고 자체적으로 연구를 진행해 왔으니 말이오. "
"그럼 지금 이 첸트로빌 성안에도 화약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되돌아오는 질문에 영주는 가타부타하지 않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미드프레드와 뮤켄을 재촉하듯 다소 빠른 어조로 말을 꺼냈다.
"같이 가십시다. 이 정도면 대략적인 설명은 된 것 같으니, 이제는 눈으로 확인해야 하지 않겠소?"
기나긴 복도를 지나, 그들은 지하 창고로 들어섰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한 공간 사이로 좁게 트여진 가파른 계단을, 오로지 앞선 병사의 램프의 불빛에만 의지하여 내려오기 시작한 것도 벌써 한참이 지난 듯했다. 멀리서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점차 강해지는 습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고요한 정적 사이로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문득 영주가 걸음을 멈추었다. 끝없이 이어져 있는 것만 같던 계단 끝을 거대한 철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병사는 램프를 내려놓은 뒤 그 철문을 앞으로 밀어 열어준 후에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 모두 안으로 들어오 시오. "
영주는 스스럼없이 그 안으로 성큼 들어서다가, 고개를 약간 돌려 병사를 향해 주의 주듯 덧붙였다.
"자네는 램프를 들고 거기 서 있게. 아무래도 불은 위험하니까. "
램프를 들고 서 있는 병사를 뒤로하고 철문 안으로 들어선 미드프레드의 시야에 몇 개의 거대한 나무통들이 들어왔다. 그는 영주의 손짓을 따라 그 거대한 통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변이 어두운 탓도 있었지만, 유난히 거무스름한 빛깔의 가루가 그의 시야를 확 잡아당겼다. 영주는 나무 통 위에 매달려 있는 날개 모양의 회전 장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안에 들어있는 것이 화약 가루이긴 하지만, 실전에 이대로 사용하는 건 아니오. 이처럼 물에 적셔 만든 나무통 속에 집어넣고, 위에 있는 회전 장치를 돌려 알갱이로 만든 후에 사용하지."
로엘 공은 통 안에서 약간 걸쭉한 느낌의 가루를 약간 집어 그들에게 좀 더 가까이 보여주며, 나직한 음성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아까 말했듯이 코네세타 군의 화약은 초석과 황을 섞은 물질로 추측되고 있고, 우리가 만든 이 화약은 거기에 목탄을 섞어 만들었다고 생각해도 많이 틀리지 않을 거요. 이 영지에서는 자연산 초석을 구할 수 없어 퇴비에서 걸러낸 물질을 사용하고 있지만, 초석과는 성질이 거의 비슷하니까 말이오."
뮤켄과 미드프레드는 아직까지 약간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노영주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역시 아직까지 연구 부족으로 가장 적절한 배합 비율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오. 물론 예상대로의 반응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정확한 비율을 수치상으로 얻어낼 수만 있다면 훨씬 손쉽게 생산량을 늘릴 수 있을 터인데······."
영주가 아쉬운 듯 말 끝을 흐렸다. 영주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허리를 숙인 채 통 안의 가루를 만져보던 미드프레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
멀리 있는 램프가 드리우는 흐릿한 빛을 반사 시켜 스스로 빛을 내는 듯한 미드프레드의 황옥색 눈동자를 마주 보며 노영주가 입을 열었다.
"뭔가. "
"아주 약간이면 됩니다. 이 화약의 성능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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