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폭풍전야 6화 주전론을 위한 막후교섭(3장 인물소개)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3장. 폭풍전야
6화. 주전론을 위한 막후교섭
로크라테의 영주 지그프리트 레 콜틴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윈 재상의 여유로운 얼굴을 탐탁하지 않은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재상이 먼 이국에서 진귀한 차를 들여왔다며 자신을 초대했을 때부터 이 초청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바대로 사교적인 모임만은 아닐 것이라는 예상은 그 역시 하고 있었다.
재상도 그도 온갖 모략이 판을 치는 정치판에서 산전수전 겪은 지 벌써 십수 년이다. 하나의 행위에 여러 의도를 섞는 것쯤이야 늘 있었던 일이라 재상이 설령 다른 속셈이 있다 해도 별것이 있겠는가 하고 크게 개의치 않고 받아들인 차 한 잔의 유혹이 이렇듯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 역할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간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어떤 구실을 지어내서라도 이 자리를 모면했으리라고 콜틴은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일국의 정통 계승자께서 적의 관할 아래서 실종됨으로 인하여 현재 세레즈는 전례 없는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네. 그러나 이러한 시국이기에 더더욱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하고 국가의 안녕을 다지기 위하여 우리 신료들이 함께 고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
재상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바지만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 말만은 늘 청산유수라고 생각했으나 콜틴은 내색하지 않은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의 의견을 한데 모아 안으로는 폐하를 충실히 보필하고 밖으로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현명하게 극복해 나가는 것으로, 나라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온 왕가의 평안을 되찾고, 왕실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면 일국의 신하된 몸으로서 그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그건 그렇지요. 허나······.”
콜틴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뒷말을 삼켜버렸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을 대신하듯 그는 자신 앞에 정갈하게 놓여 있는 흰 찻잔을 외면하였다.
상업의 번성을 그 경제적, 정치적 기초로 하는 남부 지방의 특성에 걸맞게 영주들을 상인 출신으로 임명하겠다는 다소 획기적인 정책을 입안해낸 여왕은, 실제로 그러한 방침에 입각하여, 대부분의 남부 영주들을 상인 출신으로 교체하여왔다. 그리고 로크라테의 영주인 콜틴 역시 여왕의 시책에 따라 십여 년 전에 새로이 등용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때 세레즈 재계를 좌지우지했던 대상 출신의 그로서도, 본심을 숨긴 채 말하고자 하는 용건을 빙빙 돌려 표현하는 수도 대신들의 뜬구름 잡기식의 대화 방식에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대가 무얼 근심하는지 내 어찌 모르겠는가. 물론 그대의 염려도 일견 타당성 있는 것이지. 헤시안 전쟁 이후로 코네세타와 커다란 마찰이 없었던 까닭에 적의 군세가 실제로 어느 정도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데다가, 우리 세레즈는 그간의 연이은 내란과 국경 부근의 외침으로 아군에 대한 총 전력 탐색조차 접어온 실정이니 말일세. 하지만 코네세타의 도발이 이렇듯 국가 안위를 위협할 수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추이를 관망하자는 식의 안이한 태도만 취한다면 그들이 우리 세레즈를 어찌 보겠는가. 이 기회에 세레즈의 확실한 우위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코네세타는 물론 우리 백성들마저도 왕실과 조정의 권위를 무시하게 될 걸세.”
비록 재상이 갖가지 대의명분으로 치장하여 용건을 점잖게 포장하고 있다고는 하나, 근 한 시간에 걸친 그의 말을 모두 종합해보면 이는 왕실 내의 세력 싸움에 협조하라는 뜻이나 진배없었다.
세느비엔느 여왕은 아체프렌의 실종을 빌미 삼아 소생의 왕자 안타미젤을 차기 왕위 승계자로 옹립시키기 위한 정략의 일환으로 코네세타와의 전쟁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고, 재상은 각 영주를 상대로 세레즈 왕궁 내에 주전파의 세를 키우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안타미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도록 하기 위한 밀담을 실행에 옮기는 중이었다.
“그간 코네세타의 무도한 행위를 줄곧 묵과해 왔던 것도 우리가 평화를 유지해야 할 대국으로서의 의무와 도의에 충실해 왔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도 보아 알 수 있듯이, 더는 인내와 사양만으로는 급변하는 국제 관계 속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해가며 자국의 실리를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네.”
물론 재상의 말대로 국가의 영토적 존엄성과 정치적 주권에 대해 명백하고 충분한 위협이 있다면 그 국가는 즉각적으로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콜틴 역시 충분히 동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전쟁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자국에 대한 타국의 위협이 반드시 급박한 것에 한하여야 했다.
그러나 그윈의 말과는 달리 콜틴의 눈에는 자국에 대한 코네세타의 위협은 아직 위험 순위를 넘지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재상의 주장대로 양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분명 그 대의명분이 될 것이 확실한 태자의 실종 문제만 하여도, 그에 대한 명확한 원인 규명조차 불투명한 실정이었다.
실제로 코네세타가 태자에게 해를 가했느냐 아니냐는 기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 있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해서 자국이 대적해야 할 상대가 코네세타라는 점이었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현재 세레즈가 코네세타를 맞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설혹 앞뒤를 다 무시하고 최종전에서 어찌어찌 승리를 거둔다 해도 세레즈는 승리의 대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타격과 상처를 입을 것이 자명했다. 더구나 혹시 아체프렌이 살아 있어 이 와중에 어디에선가 나타난다면, 이 소동은 이 세상의 모든 전쟁 중에 가장 최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왕위 계승을 위한 소모적인 내란으로 번질 우려도 있었다.
상인 출신인 콜틴이 전쟁으로 인한 군수 물자의 공급과 그것을 군대에 납품함으로써 따르게 될 막대한 이문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전쟁이 자신에게 가져다줄 엄청난 이익에 연차 이자까지 붙여가며 미래를 분홍빛만으로 설계하기에는 그는 지극히 현실적인 성격이었다.
콜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기반은 여왕의 정권이었고 여왕의 뜻과 다른 생각 따위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콜틴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바였다.
그는 불편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어 재상을 응시했다. 본인의 이익에 누구보다도 민감한 재상이 이토록 여왕을 돕는 일에 열성을 보이는 것을 보면,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이 전쟁에 투자하는 것은 나름대로 가치 있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는 본인의 회의를 어떤 식으로든 접어보려 애썼다.
“폐하께서 코네세타와의 전쟁을 염두에 두신다면 신하된 도리로 어찌 어의에 반할 수 있겠습니까.”
항복을 선언하듯 그렇게 운을 떼어낸 콜틴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영토는 필연적으로 보급지와 전장, 이 두 가지 역할 중 어느 하나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저는 여왕 폐하께서 로크라테를 포함한 남부 영지를 어떠한 용도로 쓰시길 원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워낙에 돌려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도 않았지만, 어떻게 말을 바꾼다 해도 진의를 간파하지 못할 상대가 아니기에 콜틴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백번 양보하여 군사나 군수품은 여왕이 원하는 대로 바칠 의향이 있으나,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인 영지가 파괴되는 것만은 그로서도 결코 묵과할 수 없었다.
“줄곧 언급했었네만 코네세타의 무도한 행위는 더는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흔들리는 국제 관계에서 올곧은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라도 이제 우리가 움직여야 할 때가 온 것 같네. 그리고 이 점은 폐하께서도 나와 의견을 같이하시고 있지. 그대도 알고 있다시피 전쟁의 책임이 코네세타에 있는 이상, 세레즈는 더는 침묵할 수 없고, 또 그리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폐하께서는 선전포고를 하시기에 앞서 대국의 위엄을 다하고자 진상 규명과 문책이라는 명목하에 최후통첩을 겸한 공식 사절을 보내실 예정이시라네. 내 어찌 짧은 소견으로 폐하의 어의를 다 짐작할 수 있겠는가만은, 그대가 걱정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영토가 침입받는 일은 없을 것일세.”
하지만 선전포고를 하고 선제공격을 가하게 된다고 하여도 주력이 육군인 세레즈가 막강한 코네세타의 해군과의 접전에서 패하여 전선이 후퇴하게 된다면 세레즈 남부 영지의 항구들 역시 봉쇄될 터였다. 그리고 로크라테와 같이 교역에 기반한 영지에서 상권 형성의 핵심 요소인 해로가 막혀 버린다는 것은 곧 전쟁터에서의 보급로 역할은 말할 것도 없고, 영내의 재정조차 어려워지는 위기 상황을 의미했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가정이었지만 코네세타의 해군이 아군을 치고 세레즈 남부 영지를 점령이라도 하게 되는 날에는 영주로서 적군의 군수품 공급을 거부하고 영지의 파괴와 영내 백성들의 학살을 방과하느냐, 아니면 제국을 배신하여 적군의 병참기지 노릇을 하느냐의 최악의 양자택일의 상황에 몰리게 될 우려도 있었다. 양극단에서 그가 정치적 생명을 지키고자 한다면 영내 백성들의 신망을 잃을 것이고, 영지를 지키고자 적에게 협조했는데 코네세타가 최종전에서 패한다면 여왕은 결코 그와 그의 가문을 좌시하지 않을 터였다.
‘세레즈에 군수 물자를 공급하는 것이야 세레즈 백성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임과 동시에 전시에 이득을 획득한 것에 대한 영주로서의 성의 표시겠지만······. 최악의 경우 나는 대체 영주로서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콜틴은 고개를 내저어 자신의 머리를 휩싸고 도는 갖가지 가정을 물리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한 번 더 묵직한 한숨을 토해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굳이 비관적으로 생각해보아야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전론을 일으킨다는 것은 허울 좋은 명분 외에 어느 것도 얻지 못할 우려가 있어 많이 망설여집니다만······. 저는 세레즈 백성의 일원이자 여왕 폐하의 신하로서 제가 할 수 있는 한 신의와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그 후의 일은 안타미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후 폐하의 성의를 믿지요.”
========================================
<3장 폭풍전야>의 주요인물
*줄리에트 레 폰다 / 세느비엔느 1세*
세레즈에서 가장 풍요로운 전 폰다 대공의 고명딸로 태어나 선왕의 계비로 간택되었으며 선왕의 차남인 안타미젤을 낳았다. 부군의 사후 친가의 세를 이용하여 섭정에 오르고, 이어 유력 귀족 및 왕실 종친들과 담합하여 여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본인 소생의 왕자 안타미젤의 보위 계승을 위하여 양자이며 태자인 아체프렌과 정치적으로 대립중이다.
*미드프레드 그론레이*
18세 / 반란귀족의 후예로 노예로 강등되었던 것을 태자 아체프렌의 청원으로 국왕으로부터 은사령을 받아 노예에서 해방되었다. 현재 태자궁 소속 아체프렌의 전속 시종으로, 태자인 아체프렌과는 신분을 뛰어넘은 친구 사이이다.
*부르노 레 그윈 /그윈 재상*
그레안 영지의 영주이자, 세레즈 조정 신료들의 수장인 재상이다.
물욕이 많은 타산가로 정평이 났으나 무남독녀 스와닐다에게는 좋은 부친이다. 아체프렌의 사망을 전제로 여왕과 밀담을 한 뒤 그녀를 도와 조정 내 주전파의 세를 키우고자 노력한다.
*지그프리트 레 콜틴 /로크라테 영주*
대상 출신으로 남부의 상업 번성을 위한 여왕의 시책에 따라 로크라테 영주가 되었다. 아체프렌의 복수전쟁에 회의적이다.
*헤라스*
그윈의 집사
*폴트*
그윈의 하인
- 작가의말
3장 끝
선호와 추천은 글쓰는 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