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애별리고 3화 염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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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애별리고
3. 염색
“아이네즈, 이거요.”
성에서 모집한다는 경비병 시험 일정도 알아볼 겸 나갔다 오겠다고 아침 일찍 나선 슈레디안은 돌아오자마자 제법 두둑한 꾸러미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나물을 다듬느라 더러워진 바닥을 치우고 있던 아이네즈는 이제 오냐며 고개를 들다가 목덜미 아래로 확연히 짧아진 슈레디안의 머리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슈레디안, 머리가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아이네즈의 놀란 표정을 보고서도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길고 걸리적거려서 나간 김에 잘랐어요. 안 그래도 매일 빗질하는 것도 귀찮고 거추장스럽던 참이었는데, 머리칼을 팔면 돈을 주겠다고 하잖아요.”
아이네즈는 할 말을 잃었다. 외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무심한 태도를 보니 그도 사내는 사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도 살까 싶었는데, 아이네즈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집에 필요한 게 뭔지도 몰라서 그냥 돈으로 가져왔어요. 얼마 안 되지만.”
정체 모를 꾸러미는 머리카락을 판 돈인 모양이었다. 아이네즈는 이럴 때 대체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잠깐의 주저 끝에 그녀는 한숨 같은 어조로 말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나한테 주기보다는 슈레디안에게 필요한 것을 사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옷이라든지······. 생각해보면 필요한 게 많을 텐데.”
“나는 이거면 됐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슈레디안은 품 안에서 주먹 크기의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게 뭐예요?”
“황이랑 구운 납 가루랑 생석회 조금이에요.”
대체 무슨 용도로 저런 것을 가져왔나 싶어 아이네즈는 의아한 눈빛으로 슈레디안을 쳐다보았다. 주머니의 매듭을 풀면서 그가 자분자분 말을 이었다.
“장터에 가니 다들 금발을 엄청나게 좋아하더라고요. 장사치들이 머리카락을 팔아볼 생각 없느냐고 계속 붙들고, 어린애들이 자꾸 쫓아다니면서 만지려고 해서 아주 귀찮았어요. 이 동네는 밝은색 머리가 흔치 않나 봐요. 아아네즈, 이 나무그릇 요리에 안 쓰는 거죠?”
“네.”
아이네즈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그녀 주위의 대다수가 머리 색이 짙은 건 사실이지만, 성안에 가면 머리 색이 밝은 이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문제는 밝은색이라 하여 다 같은 게 아니란 점이었다. 아이네즈도 슈레디안을 만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문자 그대로 한 올 한 올 금실로 만들어진 것처럼 화사한 금발을 본 적 없었다. 그녀도 볼 때마다 신기하게 여겼으니 사람들의 유별난 반응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럼 나 좀 빌릴게요.”
“그러세요. 근데 어디다 쓰려고요?”
“염색하려고요.”
“뭐를, 설마 머리를요?”
물에 가루를 개는 슈레디안을 보고 아이네즈는 만류할까도 싶었으나 본인이 귀찮아서 그런다는데 어쩌겠는가 싶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네.”
옷감을 염색하는 건 심심찮게 봤지만, 머리를 염색한다는 건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실과 비슷한 느낌이라면 색이 입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이네즈는 몸을 일으켰다.
“염료가 눈에 들어가면 안 되니까 도와줄게요. 물에 갠 가루를 머리에 바르면 되나요?”
“아, 고마워요. 그리고 눈썹에도요.”
“음, 어차피 그거 나중에 물로 씻어내야 하죠? 그럼 차라리 우물가에서 하는 건 어때요? 그러는 편이 슈레디안도 움직이기 편할 거 같은데.”
“좋은 생각이네요. 내가 의자를 옮길게요. 아이네즈가 그릇을 옮겨줄래요?”
“네. 제가 솔이랑 목에 두를 수건도 챙겨갈게요. 약이 아래로 흐를 수도 있고, 머리칼 전체에 꼼꼼하게 바르려면 손으로 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거 같아요.”
그들은 염색에 필요한 도구를 다 챙겨서 우물가에 자리 잡았다.
“거기 우물 옆에 의자 놓고 앉아볼래요?”
우물가 근처의 넓은 돌 위에 걸터앉아 들고 온 수건을 길게 꼬면서 아이네즈가 말했다.
“이쯤이면 좋을까요?”
“네, 딱 좋을 것 같네요. 염색약을 바르면 움직이기 쉽지 않을 것 같으니까.”
수건을 들고 일어난 아이네즈는 의자에 앉은 슈레디안에게 다가섰다. 가까이 다가오자 꽃향기 비슷한 아이네즈의 체취가 은은한 미풍에 실려 코끝을 간질였다. 좋은 향이었다.
아이네즈의 손이 어깨를 지나 목덜미를 스친 순간 슈레디안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저 수건을 얼굴 위로 둘러주기 위함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그녀의 손길이 닿은 살갗이 순식간에 열기를 품었다.
아이네즈가 한 걸음 물러나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들여다보았다.
“혹시 어디 아픈 거예요? 얼굴이 좀 붉어진 거 같은데.”
세레즈의 태자로 나고 자라 남들의 시중을 받는 건 일상이었다. 왕성에서 일하는 시녀들 중에는 귀족 출신도 많았고, 개중에는 눈에 띄게 아름다운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시중을 받아도 지금 같은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다. 화려한 미인들로 가득 찬 사교계에는 아이네즈보다 뛰어난 외모를 지닌 자도 부지기수였다. 그들 가운데는 그의 관심을 갈구하며 접근해오는 이들도 상당했으나 여태까지 그는 그 누구에게도 흔들린 바 없었다. 오로지 아이네즈 뿐이었다, 그에게 떨림과 설렘을 안겨주는 것은.
“아···. 아뇨. 좀, 더운 것 같아서.”
슈레디안은 저의 목소리가 칼칼하게 잠기는 것을 느꼈다.
“그래요?”
이상하다면 이상하게 여길 수 있는 반응이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아이네즈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슈레디안이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목덜미에 수건을 묶어주었다. 그 후 곧바로 솔에 염색약을 묻혀 머리에 바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머리를 염색할 생각을 했어요? 머리 염료도 팔아요? 나는 장터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가루는 대장간과 약재상에 들러 조금씩 샀어요. 납은 녹이 슬면 색이 어두워지니까 염색이 될 거 같았고요. 진짜로 될지 어떨지, 된다면 무슨 색이 나올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한 번 의식하자 계속 그녀의 손길에 민감해졌지만, 슈레디안은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했다.
“가만 보면 참 엉뚱해요, 슈레디안은. ······어때요? 염료를 발라보니.”
“기분이 좀 이상하긴 하네요. 차갑고 흐물거리고 괴상한 냄새도 나고.”
“움직이면 더 흐를 거예요.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닐 것 같지만 좀 참아봐요. 머리는 거의 다 끝났어요. 이제 곧 눈썹을 할 건데, 눈 뜨면 안 되는 거 알죠?”
“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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