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애별리고 4화 떨림과 설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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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애별리고
4. 설렘과 떨림
빠른 손놀림으로 머리에 염료를 바르는 일을 마친 아이네즈는 슈레디안의 정면으로 이동했다. 눈썹에 칠할 용도로 따로 챙겨온 작은 솔 위에 염색약을 묻혀 슈레디안의 밀빛 눈썹을 칠하면서 그녀는 그의 속눈썹이 참으로 길고 풍성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가지런히 늘어선 속눈썹의 길이는 족히 한 마디는 넘어 보였다.
사내인데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느 한구석 조물주의 섬세한 손길이 스치지 않은 곳이 없는 수려한 미모였다.
이토록 잘난 아들을 잃어버리고 그의 부모는 지금 어떠한 심경일 것인가.
아이네즈는 문득 안타까움을 느꼈다. 슈레디안이 이곳 뮤즈 마을에 표류한 지도 벌써 한 달 반이 훌쩍 지났다. 자신이라면 바다에 나가신 아버지께서 소식이 끊긴 지 그처럼 긴 시간이 흘렀다면, 지금쯤 제정신이 아닐 것 같았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데, 지금쯤 얼마나 애가 타실까.”
아이네즈의 발언이 누구를 향한 것일지는 자명했다.
안타까운 감정이 물씬 풍기는 목소리에 슈레디안은 무심코 모후께서는 채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부왕께서는 일곱 살 때 승하하시어 애타게 저를 기다릴 부모가 없노라 답할 뻔했다. 두 분 다 워낙 어릴 때 돌아가신지라 양친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었지만, 그에게도 그리운 이들은 있었다.
그러나 약해지는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슈레디안은 이내 애써 밝은 음성으로 덧붙였다.
“기억을 찾아 언제고 무사히 돌아가면 되겠죠.”
일견 그를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무심한 반응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아이네즈는 그를 타박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슈레디안의 감긴 눈썹이 잘게 떨리며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 그의 감정적 동요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듯 보여도 지금 이 상황이 가장 힘겨운 이는 슈레디안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러네요. 언제가 됐든 슈레디안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행복해하실 거예요. 근데 얼마만큼 있다가 머리를 감아야 할까요?”
“일각쯤 있다가 감으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빨리요?”
“안되면 할 수 없고요. 냄새 때문에 견디기가 어렵네요. 머리도 아프고.”
그가 코끝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아이네즈는 물로 손과 나무 주발과 솔을 씻으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하지만 냄새는 금방 익숙해질 텐데.”
“나도 나지만 아이네즈까지 공연히······. 이제 곧 저녁 시간이라 바쁠 텐데 먼저 들어가요.”
민망한 기색으로 슈레디안이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아이네즈는 서툰 슈레디안의 반응에 소리 없이 미소지었다. 같이 있어 주길 바라면서도, 성격상 어리광이 익숙하지 않은 듯 그는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태연한 척을 할 때면 늘 지금처럼 오른쪽 귓불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아이네즈는 그 점이 묘하게 귀엽다고 느꼈다.
“나는 벌써 익숙해진 거 같으니 마음 쓰지 말아요. 조금만 움직여도 염료가 흘러내리는 데다가 냄새에 힘들어하면서 혼자서 어쩌려고 그래요. 게다가 혼자 있으면 심심할 텐데. 저녁 준비도 얼추 다 해놨으니 이왕 돕는 거 머리까지 감겨줄게요. 같이 들어가요.”
달그락거리며 뒷수습을 끝낸 그녀는 물통에 물을 받아놓고, 가루비누 대신 쓰는 해조류 가루를 풀었다. 해조류를 태워 재로 만들어놓으면 음식에 묻은 기름기를 빼기 수월했다. 시간이 날 때 가루를 미리 만들어놓으면 굳이 장에 가서 공연히 돈을 쓰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비록 가루가 풀리는데 시간이 좀 걸리고 향이 없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아이네즈도 혼자 자랐는데 어떻게 그렇게 뭐든 잘하나요. 아저씨가 다 알려준 겁니까?”
아이네즈가 바지런하게 또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조금 시무룩해 보이는 슈레디안을 보고 아이네즈는 미소지었다. 손에 익지 않은 일에 서툰 것이야 당연한 데도, 해보지 않은 일을 조금 못한다고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이네즈로 하여금 그리운 이를 떠올리게 했다.
“있잖아요, 우리 엄마는 정말로 엉망진창이었어요. 빵은 태워 먹기 일상이었고, 바느질은 늘 얼기설기, 그나마도 열 번에 대여섯 번은 바늘에 손을 찔렸을 거예요. 덤벙대는 건 어찌나 심한지, 물건을 옮기다 보면 절반은 흘렸죠. 물론 떨어진 걸 줍고 치우는 건 늘 제 몫이었고요. 그래도 매번 처음인 양 울상을 짓는 엄마를 보면 아버지도 나도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었어요. 정말로 사랑스러운 분이었거든요.”
언뜻 흉을 보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네즈가 이렇게 다정하고 배려심 넘치는 사람으로 자라난 것은 모친의 덕인 듯싶었다.
“돌이켜 보면 엄마라기보다는 사고뭉치 어린 동생을 보는 것 같았어요. 지켜보기가 조마조마하니 어쩌겠어요. 제가 뭐라도 배우고 익혀야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맛있는 음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을 먹고 싶기도 했고. ······이렇게 말을 꺼내고 보니, 엄마가 보고 싶네요.”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아이네즈의 음성이 아련하게 울려 퍼졌다.
“······돌아가셨나요?”
“네, 삼 년 전에, 돌림병으로요.”
아이네즈는 눈가를 소매로 훔치고는 몸을 일으켰다.
“슈레디안은 우리 엄마보다 훌륭한걸요. 꼼꼼한 데다가 한 번 가르쳐주면 잊는 법도 없고.”
“과찬이다 겸양을 부려야 하는 시점인가요, 이거?”
아이네즈는 못 말린다며 작게 웃고는, 슈레디안을 붙들어 일으켰다.
“내가 붙들어 줄 테니 의자에 돌아앉아 등을 뒤로 좀 젖혀봐요. 이리 하는 편이 머리 감기기 편할 거 같네요.”
모후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자신과 지울 수 없는 어미의 그림자로 인하여 슬픈 아이네즈,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가엾은 것일까. 매사에 차분하고 어른스러워 늘 제 나이보다 성숙해 보였던 아이네즈가 처음으로 또래로 느껴졌다.
슈레디안은 저의 두피를 스치는 아이네즈의 부드러운 손길처럼, 내색하지 못했을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얼룩져 있을 그녀의 마음을 자신 또한 다정하게 어루만져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랐다.
어느덧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 하늘이 그들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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