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효시 2화 전장의 밤
8장 효시
2. 전장의 밤
짙은 구름 사이로 어슴푸레한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수풀 속에 등을 대고 누운 메이샤드는 고개를 약간 돌려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이스터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어두운 밤하늘을 빼곡하게 수놓고 있는 별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야영지 한 끝에서 들리는 말 울음, 보초를 서고 있는 듯한 몇몇 병사들의 어렴풋한 목소리,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나지막한 벌레 울음, 화톳불 속에서 나무가 탁탁 튀며 타는 소리,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동료들의 뒤척거림.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주변의 여러 가지 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그는 생각에 잠겼다.
자기에게 이런 습관이 있었던가. 아홉 살 때 전쟁터에 최초로 몸을 내던진 이후, 전장에서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십 육 년이라는 결코 길지 않은 인생 내내 풍족하고 화려한 삶과는 워낙 인연이 없기도 했지만, 메이샤드 본인 역시 거칠기 마련인 야영지 생활을 좋아했고, 그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편히 쉴 줄 알았다. 숨이 막힐 것처럼 힘든 행군 후나, 새벽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하루종일 전투를 벌인 이후에도, 망토를 베고 드러누우면 그는 이내 코를 골며 잠들었고, 그의 꿈은 그 또래의 다른 이들처럼 소년다운 야망으로 가득 차곤 했다.
그는 베고 있던 두 팔을 위로 쭉 뻗었다. 이렇게 잠들지 못하고 있는 것은, 비단 눈앞으로 다가온 전투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름뿐인 귀족 가에서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해 어렸을 때 들어간 용병대에서 반평생에 가까운 세월을 보내면서, 전쟁터에서 살아 남기 위해 필요한 감각들은 거의 다 익혔다. 상대의 배를 가를 때 적군의 시선을 어떻게 피하는지. 말발굽에 짓이겨진 채 쓰러져 있는 동료의 모습은 어떻게 견디는지. 상대의 가슴팍에 칼날을 찔러 넣을 때, 단 한번의 손목 놀림으로 해치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순간적으로 검을 뺄 때 치솟는 핏줄기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쓰러질 것 같은 피로와 허기를 잊고 적군을 향해 수십, 수백 번 돌격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과는 다른, 설명하기 힘든 묘한 울분 같은 것이 아직은 어린 그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메이샤드는 이러한 생각들을 몰아내기라도 할 듯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전장에서 생각이란 백해무익한 것, 머릿속을 하얗게 비워내고 미친 듯이 뛰어드는 것이 전쟁의 본질 아니던가.
도무지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메이샤드는 몸을 일으켰다. 보초를 서고 있는 동료와 바꿔주던가. 원칙대로라면 그래서는 안 되지만, 뭐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 군대라는 곳이다. 그는 피부 속에 스며드는 밤의 한기를 막기 위해 베개 삼아 둘둘 말아 두었던 망토를 펼쳐 아무렇게나 뒤집어쓰고, 곁에 놓아두었던 무기류를 챙겼다. 그리고 여기저기 피어있는 화톳불 주변에 쓰러지듯 누워 잠든 동료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는 보초병들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디 가나? "
메이샤드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매달린 단검으로 손을 뻗치며 빠르게 뒤돌았다.
“지금은 교대 시간도 아닐 텐데. ”
귀에 익은 차분한 음성의 소유자가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나직하게 덧붙였다. 메이샤드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쥐고 있던 단검을 놓았다. 그리고 달빛에 상대의 얼굴이 채 드러나기도 전에, 자세를 단정히 바로잡았다.
"죄송합니다, 참모장님. 잠이 안 와서 좀 걷는 중입니다. "
달빛을 등진 채 서서 메이샤드의 말을 되뇌는 젊은 참모장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 가는 듯 했다.
"그럼 같이 좀 걸을까. "
조용하지만 올곧은 의지가 그대로 느껴지는 뮤켄의 목소리에 이끌리듯, 메이샤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샤드 군은 보기보다 체력이 강한 모양이야. 행군에, 사냥까지 다녀와서도 멀쩡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걸 보면. ”
같이 지낸 지 불과 십여 일. 설마 삼천이나 되는 지원군 소속 병사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는 건가? 메이샤드는 다소 놀란 눈빛으로 참모장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메이샤드가 미처 입밖에 꺼내지 않은 그 의문마저도 꿰뚫어 본 듯했다.
"왜 모르겠나. 자네는 부대 최고의 말썽꾸러긴데. 게다가 교대시간도 아닌데 제멋대로 나다닐 만큼의 강심장은 흔치 않지. "
뮤켄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소년병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일시적인 이탈이야 자네한텐 아무 것도 아니겠지. 그동안 일으킨 문제들에 비하면 말이야. 그나저나, 난 아까 자네가 날 찌르려는 줄 알았다니까. 자네 단검은 꽤나 날카로워 보이던데. "
어둠 속이었고, 또 반사적으로 행한 행동이라 못 봤을 줄 알았는데.
"···하하, 설마요. "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진 메이샤드는 그저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표정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군 생활은 얼마나 했나? ”
“...처음인데요. ”
“아까 그 행동, 반사적인 움직임이지? 그런 건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야. 어디서 배웠는지 물어도 되겠나. ”
바위에 걸터앉으며 무심한 어조로 물어오는 참모장을 향해, 메이샤드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헤스바에서 용병 생활을 좀 했습니다. 육칠 년 정도요. ”
검을 놀리는 것도 예사롭지 않고, 활 쏘는 것도 특출나다 생각했더니만, 역시 용병 출신이었군. 뮤켄은 키만 훤칠할 뿐 아직 어린 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대의 얼굴을 약간은 안쓰러운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육칠 년 전이라면, 자기 키보다도 큰 칼을 쥐고 어른 뒤를 따라다녔다는 소리 아닌가. 하루가 멀다하고 유목민들의 침입을 받는 북부영지에서 이 정도의 실력을 갖출 때까지 대체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을까. 뮤켄은 어쩐지 감상적이 되는 기분을 억누르며 의식적으로 밝은 목소리를 만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죽기에는 이른 나이였던 것 같은데. 성격이 급했나 보지? ”
“아니라고 할 순 없겠죠. ”
메이샤드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배가 고팠거든요. 명색이 귀족인데 도둑질을 할 수도 없고. 선택의 여유가 없었어요. ”
어디까지나 가벼운 어조로 답하며 메이샤드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 움직임을 따라 은은한 달빛에 반사되어 차가운 금속성의 빛을 내는 듯한 그의 백금색 머리카락이 몇 가닥 흔들렸다.
"그러면 북부에서 이곳으로 강제 차출된 것인가? "
뮤켄은 여왕이 안타미젤을 지원군 총사령관으로 하는 남부 탈환군을 편성하기 위해 북부의 군대를 무리하게 끌어내린 일을 상기해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메이샤드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뇨. 용병 일을 그만두고 도성으로 와서 개인 자격으로 입대 지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으로 배치된 거죠. "
"군 생활은 어때? 견딜만 한가? "
“참모장님이 야단만 안 치시면요. ”
망설임 없이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에 뮤켄은 허탈한 웃음을 머금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까만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메이샤드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둠에 묻힐 정도로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이 부대가 세레즈 정규군으로 구성되지 않은 건 아시죠? 물론 개중에는 실제로 전투 경험이 없는 자들도 있지만, 저 같이 입대를 지원한 용병 출신이 더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음. ”
“제가, 아니 저희들이 용병단을 나와 남부 파견군에 지원을 희망한 이유를 아십니까? ”
장난기를 지운 그의 연녹빛 눈동자는 흡사 사나운 금수를 연상케 할 정도로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병사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참전하고 있는지 알아두는 것도 참모장의 소임이겠지. 뮤켄은 메이샤드의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목숨을 내걸고 싸울 바에야, 조국을 범한 코네세타 군과 싸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이 손으로 물리치겠다는 각오로, 용병단을 떠나 이곳으로 내려왔던 겁니다. "
메이샤드는 눈 앞에 보이는 나뭇가지를 격하게 꺾었다. 그리고 그것을 힘껏 내던지며 씹어 뱉는 듯한 어조로 다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지요? 결국 우리는 정규군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이곳으로 배정 받았습니다. 그야 수뇌부 쪽에서는 제대로 훈련도 안 된 신병들이나, 출신도 불분명한 용병 따위 세레즈 정규군 소속의 정예병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존재겠죠. 하지만 우리는 싸우기 위해 지원한 것이지 조국의 손에 의해 사지로 들어가기 위해 참전한 게 아닙니다. "
그는 격하게 치미는 감정을 삭이려는 듯,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메이샤드 군. "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던 뮤켄이 여느 때처럼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물론 코네세타 군과의 전면전은 중요해. 하지만 전쟁이라는 게 전면전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거야. 일례로 하크스에서는 영내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적에게 대항하고 있고, 이 사실은 현재 적군의 압제 하에 있는 수많은 세레즈인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고 난 알고 있네. "
그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는 지금 군부대의 존재 가치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는가 보지만, 나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항거하고 있는 아군에게 조금이라도 의지가 되어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그는 여전히 고개를 떨구고 있는 메이샤드에게 시선을 던졌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고 자네에게 강요할 성질의 문제는 아니겠지. 그러나 메이샤드 군, 정작 중요한 것은 이 부대의 지휘관이 누구인가도 아니고 조정에서 내린 우리 부대에 대한 가치 평가도 아닌 거야. 정말로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 하나는, 우리가 코네세타라는 공통의 적을 갖고 뭉친 동료라는 점일세. "
뮤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늘 말해 왔듯이 나 개인적으로는 이 부대 소속이라는 점을 그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어. 우린 세레즈에서 가장 힘들게 싸우고 있는 부대를 돕기 위해 파견된 군대니까. "
그리고 그는 메이샤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그 어느 때보다도 온화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이제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도록 하게. 잠을 안 자면, 내일 행군이 견디기 힘들어질 테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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