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전환점 3화 하크스 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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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크스 구원군
“소관을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
“아, 왔는가. 일단 들어와서 앉게. ”
“예. 감사합니다.”
이런 점이 독특하단 말이야. 재상은 최종적으로 점검 중이던 남부 탈환군의 군사 배치도를 내려놓고 뮤켄이 앉아 있는 의자 쪽으로 다가서며 생각했다.
그 안에 몸담았던 생활이 결코 짧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청년에게서는 군대 특유의 거친 딱딱함을 찾아볼 수가 없다. 짧은 대화 한 마디에게도 그는 굳이 군대식의 단호하고 짤막한 어투를 구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말투 자체는 결코 가볍지 않으며 오히려 대단히 정중하고 절도 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확실하게 자신의 뜻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이란 귀한 것이다. 더구나 군대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이만큼 온화하면서도 확실한 자기 색깔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칭찬거리를 넘어서 실로 탐나는 재능이라 할 수 있었다.
“빠르면 일주일, 늦어도 보름 안에 남부 영지들을 탈환하기 위한 군대가 출발할 예정이네. 자네의 위치도 대략 정해졌고, 내 자네에게 특별히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일부러 청한 것이니 기탄없이 이야기해주면 좋겠군.”
“예, 저 역시 재상 각하께 말씀드리고 싶은 바가 있었으니 기회를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재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앞으로 서류철을 내밀었다.
“폐하께 불려 가서 어디까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남부 탈환군은 안타미젤 전하의 지휘 아래 본진을 비롯하여 총 12개의 부대로 편성될 예정이네. 총 병력이 20만가량이니 한 부대에 1만 5천에서 2만 정도가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
“따로 부사령관을 두지 않고 각 부대 사령관이 바로 전하의 지휘하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서류철을 내려다보는 뮤켄의 얼굴에 약간의 그늘이 스쳐 갔다. 그러나 재상은 그것을 못 본 척하고 말을 이었다.
“중앙군을 맡은 프델로드 장군이 아마 그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겠지. 또한 전하의 직속으로 편성되는 참모진의 구성에 가장 신경을 쓰고 있으니, 그래서 말이네만. ”
재상을 말을 끊고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내 일단 자네를 폐하의 분부에 따라 남부 탈환군의 부대 사령관 중 한 명으로 편성해 놓기는 했지만, 어떤가. 참모진으로 들어가서 활동한 생각은 없는가? ”
“전하의 참모로 말입니까?”
“아, 그야 물론 일차적으로는 각 부대 사령관의 직책만큼 영예롭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 개인적으로 부각되는 일도 아니고 말일세. 하지만 그렇게 때문에 내 일부러 자네에게 부탁하는 것이야. 지난 수도 방위 사령관 임명 건에서 자네가 보인 자세는 자신의 명예보다는 군 전체와 세레즈에 어느 쪽이 더 도움이 되는 것인가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의 태도 그 자체였으니까. 자네 역시 지금 부사령관의 부재를 지적하지 않았는가. 전하에게는 믿음직한 보좌역이 필요하다네.”
뮤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아도 승낙의 표시는 아닌 듯 했다. 무언가를 가만히 생각하는 듯한 그를 지켜보며 재상은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는 폰다 영지에서 2년 동안 사관 생활을 했더군. 그렇다면 안타미젤 전하의 성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 테지. 바로 그런 점에서 자넨 한층 더 전하의 보좌역으로 적역이라 할 수 있네. ”
뮤켄은 이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는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눈살을 모은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크스 영지에 대한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
“응? ”
재상은 순간 평정을 잃고 자기 앞에 앉은 청년 장군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에게서 뜻밖의 당혹스러운 질문이 나왔다. 뮤켄은 여전히 굳어진 얼굴을 풀지 않은 채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재상 각하께서 부르시기 조금 전에 수도에 집결해 있는 군대 중 하크스 영지에 대한 구원병력 3천 가량을 차출해 두라는 명령서를 하달 받았습니다만. ”
“음···. 어찌 되었든 농성 중인 하크스에 지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니. ”
“예, 각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하크스 지원군으로서 남부 영지에 내려갈 것을 희망합니다. ”
“······."
너무나 뜻밖의 이야기에 재상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앉아 있다가 애써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헛기침을 했다. 입안이 바싹 말라 있었다.
“하크스 지원군이라니 뜻밖이군.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나? ”
그리고 그는 뮤켄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빠르게 덧붙였다.
“어찌 되었건 그 건에 대해서는 자네의 희망을 들어주기가 곤란할 것 같군. 하크스 지원군의 사령관은 이미 미드프레드 그론레이로 내정되어 있다네. ”
“미드프레드 그론레이라면···? ”
재상은 잠시 창백해진 청년 장군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이 던진 말의 효과를 음미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있던 찻잔에 천천히 차를 따라 그 앞으로 내밀었다.
“아체프렌 전하에 대한 그의 충정을 가상히 여기시는 폐하의 성은 덕이라 해야겠지. 나로서도 한낱 노예 출신의 평민에 불과한 그가 사령관이라는 직책을 한 번에 감당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나,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폐하의 뜻이 완강하시더군. ”
뮤켄은 두 손으로 받들었던 찻잔을 천천히 탁자 위로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미드프레드 그론레이의 지원군 사령관직은 확고하다는 것이군요. ”
“그런 셈이지. 세부 배치는 아직 다 끝나지 않았지만. ”
‘콜드베폰 대공의 직계인 자네가 설마 그의 밑으로 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라는 말을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재상은 다시금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가 뮤켄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린 채 여유롭게 창 밖을 응시했다.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
“그러게.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
“하크스 지원군의 병력이 그처럼 낮게 책정된 것은 그 사령관 때문입니까? ”
내가 잘못 보았군. 재상은 변해버린 얼굴빛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써 시선을 창틀에 고정한 채로 숨을 들이켰다. 원만하고 온건한 성격이라니, 잘못 보아도 한참을 잘못 본 것이다. 온건한 성격이기는커녕 이 질문은 군사 배치를 담당하는 자신을 질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그 음성에는 가히 서릿발이 서 있다.
“그 질문은 상관에 대한 거역에 가깝군. 게다가 무례하기까지 하네. ”
뮤켄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문책이라면 어떤 것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들어야겠습니다. ”
“···실질적으로 하크스를 구원하기 위해선 몇만의 병력을 가지고도 모자라네. 그리고 현재로선 그만큼의 병력을 남부 탈환군에서 차출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많아. 그렇다고 하크스를 저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 정도 지원 병력이면 어찌 되었건 농성전에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 ”
“농성 지원 병력이라면 그에 따르는 식량 지원도 필수적일 텐데요. 3천이라면 하크스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적군과 교전을 벌이기에도 벅찹니다. 도달한 이후의 문제는 차치해 두더라도 말이죠. ”
“그만해 두게.”
마침내 재상의 목소리가 약간은 흔들렸다.
“자네만큼 몰라서 일을 그리 진행시키는 줄 아는가. 자네에게는 자네의 길이 있듯이 다른 사람에게는 또 다른 길이 있는 법일세. 무력 충돌만이 전쟁의 전부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 역시 세레즈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 전쟁에 임하고 있다네. ”
“···알겠습니다.”
깊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답하는 뮤켄에게서 시선을 때어낸 재상은 나직하게 혀를 하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하크스 지원군의 참모부에 들어가겠습니다. ”
“그래도···! ”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려다가 재상은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뮤켄의 눈에는 아까와 같은 질책의 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종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큼 진한 완고함이 서려 있다. 내가 확실히 잘못 보았었군. 재상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만일 그래도 허락해 주실 수 없다면 일개 병사로라도···.”
“됐네. 그만하게.”
‘이젠 숫제 나를 협박하려 드는군.’이라는 말을 삼키며 재상은 책상에서 새로운 서류를 꺼내 들었다.
“마음대로 하게나. ”
재상이 자신의 이름을 거칠게 써 넣는 것을 보며 뮤켄은 일어서서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내키지 않는 손놀림으로 서류를 건네며 재상은 청년 장군을 향해 내뱉듯이 말했다.
“살아서 돌아오게. ”
“저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재상을 향한 뮤켄의 웃음 역시 어딘지 씁쓸함이 배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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