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태풍의 눈 8화 안타미젤의 결심(5장 인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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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안타미젤의 결심
“갑자기 군을 차출해두라고 명하시다니요? 그럼 혹시······?”
부지중에 전쟁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려다가, 안타미젤은 그런 자신에게 놀란 듯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레일라스는 생략된 그 말조차 다 알아챈 듯했다.
“잠행을 다녀오셨으니 아시겠지만 태자 전하의 사고가 코네세타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세레즈 전역이 시끄러운 상황입니다. 자원입대의 급증 역시 그에 힘입은 것이겠지요.”
아무도 모르게 성밖에 다녀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오산이었던 모양이었다.
“아시고 있었던 겁니까? ”
목적어가 생략된 안타미젤의 질문에 공작은 온화하게 웃었다.
“물론이지요. 성안에서 벌어지는 일조차 모르고서야 어찌 전하를 제대로 보필한다 할 수 있겠습니까. ”
안타미젤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며칠 전에 수하 몇만 데리고 미복 차림으로 성 밖을 나갔던 일을 떠올렸다. 안타미젤이 폰다 영지의 실질적인 정사를 대신하고 있는 외숙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잠행을 시도한 것은 코네세타가 공해를 지나고 있던 아체프렌의 선박을 습격하여 그를 시해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돌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진위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클레이온 성 인근에 있는 시장 몇 개와 몇몇 마을을 돌아본 안타미젤은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태자를 시해한 코네세타에 복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영내에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남부로 파견될 군대에 자원입대가 증가한 것은 영내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보복 전쟁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기 때문이다.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폰다에서조차 보복 전쟁론의 기운이 이토록 강하게 돌고 있으니 세레즈 전반의 분위기가 어떠할지는 불문가지였다.
“잠행을 통해 민심을 살피고자 노력하시는 점은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할 왕족으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태자 전하의 사고로 현재 세레즈의 상황이 예전과 같지 아니합니다. 감히 입에 올리기조차 참혹한 일이오나 이렇듯 혼란스러운 시국에 대공 전하의 안위마저 위태로워지면 제국의 앞날이 어두워집니다. 부디 전하 한 분께 사백여 년 가까이 이어져 온 왕가의 명맥과 세레즈의 존망이 걸려 있음을 잊지 마시고 자중해주십시오. 제 말씀 이해하시겠지요? ”
조카를 향한 공작의 음성은 더할 수 없이 자상했지만, 안타미젤은 어깨가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거부하기 어려울 만큼 애정이 듬뿍 담긴 음성과 따스한 시선으로 외숙을 위시로 한 주위의 모든 이들이 자신과 아체프렌의 관계를 갈라놓으려 애쓰고 있었다.
아직 아체프렌의 사고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마치 태자가 이미 죽어버리기나 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다음과 같은 논리가 반복되었다.
‘이제 이 나라를 지켜야 하는 이는 너뿐이다. 이 나라의 운명이 네 두 어깨에 달려 있다. 안타미젤, 네가 이 세레즈의 국왕이 되어야 한다. 네 아버지가 그랬듯이, 그리고 네 어머니가 그러하듯이. 아체프렌이 아닌 안타미젤 네가.’
끝없이 이어지는 반복 논리에 항복을 선언하듯 안타미젤이 한숨을 토해냈다.
“앞으로는 주의할게요. 걱정 끼쳐드리지 않도록.”
아체프렌과 안타미젤은 왕위 계승 문제로 대립 관계에 있다는 공공연한 소문과는 달리, 사실 안타미젤은 세레즈의 차기 국왕으로서의 아체프렌의 모습을 단 한시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남다른 포부를 지니고 있으며 탁월한 결단력과 강인한 성격을 가진 아체프렌이 보위를 계승한다면 세레스티아 왕가의 시조인 클로히비츠 Ⅰ세 못지않은 훌륭한 국왕이 되리라 믿어온 안타미젤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하나뿐인 형과 대립하는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인지 그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영민하신 분이니 이게 다 전하를 염려하여 드리는 말씀이라는 걸 아시리라 믿습니다. ”
안타미젤은 대꾸 없이 탁상 모서리에 눈길을 주었다.
정확하게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안타미젤은 어느 시점부터 자연스럽게 모친인 세느비엔느가 아체프렌이 아닌 자신을 왕좌에 올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다정한 모자 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당한 예의와 배려로 서로를 대한다고 생각해왔던 아체프렌과 세느비엔느 사이에 설명하기 힘든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타미젤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적대와 경계 어린 시선의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마저 알게 되었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게 된 후 안타미젤은 자신을 괴롭히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왕이 되고 싶지 않다고, 그 자리는 아체프렌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모친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을 전폭적으로 믿고 있는 어머니의 신뢰 어린 눈빛을 차마 저버릴 수가 없었다. 모친의 기대를 배반할 수 없어서,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안타미젤은 자신의 의사를 숨긴 채 최대한 그녀의 의지에 맞추어 살아왔다.
하지만 제왕학을 배우면 배울수록 안타미젤이 절감하게 된 것은 자신은 왕의 재목이 아니라는 깨달음뿐이었다. 몇 년에 걸친 고민 끝에 그는 약간이지만 방향 전환을 해서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할 수 있었다. 그에게 제왕학이라는 학문은 더 이상 왕이 되었을 때를 대비한 학문이 아니었다. 국왕이 된 형을 보좌하기 위한 공부였을 뿐. 아직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지만 안타미젤의 꿈은 국왕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그마한 영지에서 영내의 백성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그리고 아체프렌이 허락하는 한 곁에서 그를 보좌하는 것. 그것이 안타미젤이 가진 소망의 전부였다.
“폐하께서 전하를 급히 찾으시니 지금 곧 출발 준비를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시국이 어수선한 관계로 호위를 엄중히 할 생각이오니 다소 번잡하더라도 양해해주십시오.”
“하지만 외숙, 나는 이 시기에 내가 입궁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지 모르겠어요. 물론 어머님은 뵙고 싶지만······.”
안타미젤은 우울한 기색으로 말미를 흐렸다. 아직 어리다고 해도 안타미젤 역시 이 시기에 자신이 도성으로 올라가는 것이 불확실하게 떠도는 아체프렌의 사망설을 기정사실화하는 데 일조하리라는 예측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덧붙여 그 행동이 공공연히 알려진 형과의 대립 구도를 좀 더 강화하리라는 점 역시도. 세레즈 전역의 모든 이들이 그의 입궁을 공식적이며 합법적으로 태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안타미젤의 정치적 포석으로 인식할 터였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국이 어수선할수록 전하께서 자리를 지키셔야 백성들이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
‘하지만 그건 형님인 태자 전하께서 하셔야 일이잖아요. 저는 왕위 계승자가 아니에요.’
그렇게 항변하려다가 안타미젤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말해봤지만 단 한 번도 통하지 않은 소리였다. 그는 그저 우울한 얼굴로 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공문에 눈길을 주었다.
‘폰다 영주, 안타미젤 폰다 벤 세레즈 대공은 본 교지를 받는 즉시 입궁하여 세레스티아 왕가의 정당한 혈통으로서 환란과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로하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 ’
공문 말미에 적힌 글귀가 안타미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엄밀한 의미에서 세레즈 왕실의 정당한 혈통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이는 자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기 왕위 계승자로서 아체프렌이 해야 하고 또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체프렌 아닌 어느 누가 대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그 말을 덧붙인 어머니의 의도를 가늠해보는 안타미젤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사람들이 뭐라 하건 안타미젤은 아체프렌의 사망을 믿지 않았다. 영내에서 떠도는 소문을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근거가 너무도 불충분했다. 불과 일주일 전에 수하를 시켜 따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아직 아체프렌의 행방에 대한 실질적인 수색조차 마무리되지 않았다 하던데 벌써 그가 죽었다고 단정 짓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판단처럼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
한동안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자신이 이상했는지 공작이 조금은 굳은 얼굴로 물어보았다. 안타미젤은 그런 외숙의 얼굴을 마주한 채 생각에 잠겼다.
‘형님의 사고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시는 바가 있는지 물어볼까? 아니다. 외숙은 내가 형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걸 그리 좋아하시지 않지. 설혹 아는 바가 있다고 해도 곧이곧대로 알려주지 않을 공산이 커. 차라리 도성에 가서 어머님께 직접 여쭤보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내가 도성에 도착할 즈음에는 수색작업과 조사가 어느 정도는 진척될 것이고, 그러면, 보다 구체적인 소식을 들을 수 있겠지. 또 어머니께서 내게 거짓말을 하실 리는 없을 테니까.’
“아, 아뇨. 이번에 외숙께서도 함께 가시나요? ”
“아닙니다. 저는 아직 영내에서 해야 할 일이 있는지라 이번에는 전하를 수행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
안타미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군요. ”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그토록 기다려온 때가 온 듯싶었다.
‘이번에 형님께서 무사하시다는 확답을 듣게 되면 난 왕위 계승권을 두고 형님과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을 또렷이 밝혀야지.’
설혹 아체프렌이 잘못되었다면 또 모를까, 그가 건재하는 이상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일은 선조와 백성들을 기만하는 행동이라고 안타미젤은 완고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형님은 무사히 돌아오실 테니 내가 불안해할 필요는 없을 거야.’
어머니를 슬프게 하는 일이 될지라도 이번만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안타미젤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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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태풍의 눈>의 주요인물
*세느비엔느 여왕*
세레즈의 여왕, 기대와 달리 턱없이 미흡한 전쟁준비와 인력난에 처하여 초조해 한다.
*미드프레드 그론레이*
태자궁을 시종직을 사직하고 군입대 자원서를 제출한 것으로 왕성에 소요를 일으키고 있다.
*모리스 레 하제르*
태자궁의 시종장, 미드프레드의 사직서 처리를 두고 보름이나 고민하다가 궁내부 대신에게 짐을 떠넘겼다.
*벤자민 레 프라이스*
궁내부 대신, 가문의 위광 덕에 능력이 부족해도 조정 대신 직함을 무사히 유지하는 경우로 궐 안에는 호인으로 소문이 나있다. 여왕의 신임을 얻고자 백방으로 노력하나 눈치가 없어 바람과는 달리 나날이 여왕과 사이는 멀어지고 있다.
*안타미젤 폰다 벤 세레스티아*
폰다 대공이자 클레이온 성의 형식적인 성주, 현재 14세의 음악을 사랑하는 소년, 선대왕 카르세오 5세와 세느비엔느 여왕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복형인 아체프렌과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에 놓여있으나 내심으로는 그런 상황을 힘겨워하고 있다.
*마들리네 레 폰다*
안타미젤의 외사촌 누이이자 세느비엔느의 조카, 실질적으로 폰다 영지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그레일라스 공의 딸이다.
*그레일라스 레 폰다*
폰다 공작, 세느비엔느의 오빠로 조카인 안타미젤 왕자를 대신하여 영내 행정과 클레이온 사병대를 지휘하고 있다. 조카인 안타미젤의 보위 계승을 바라고 있다.
- 작가의말
5장 끝, 선호와 추천은 글쓴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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