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분열의 조짐 6화 뮤켄의 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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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뮤켄의 충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가. "
뮤켄은 눈살을 찌푸리며,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 숙이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총사령관이 대낮부터 오수 중이라? 그게 대체 말이나 되는 일인가. 부상을 당한 것도 아니고, 지금 자신을 대하는 호위병의 태도를 보아하니, 안타미젤은 그저 울적한 기분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거부하는 듯 하다. 본진 도착 이후의 상황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로만 가득하다. 짜증스러움이 뭉클하게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는 나직하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원군과 함께 오늘 새벽 나절에 겨우 도착한 펜데스칼 영지의 구릉 지대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아군의 깃발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자리를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코네세타 군기를 절반은 경악해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참담하게 바라보던 뮤켄이 여차저차하여 그레안으로 옮긴 아군의 본진을 찾아낸 것은 불과 한 시간 전의 일이었다.
참람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힘들게 찾아낸 본진의 진형은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할 지경이다. 부대 배치는 전술적 배려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일렬횡대다. 더구나 어처구니없게도 진지 우측방으로부터 중앙부대에 이르기까지 그레안의 젖줄인 루엘 강이 아군 진영을 감싸 안듯 휘돌아 흐르고 있다. 후방은 습지대다. 만약 상대적으로 고지를 점령한 코네세타 군이 몰아쳐 내려오면 아군의 상당수는 후퇴할 곳도 없이 물에 빠져 죽으리라. 우기는 지나갔지만, 설혹 때아닌 폭우라도 내려 강물이 불어나면 진지의 절반은 꼼짝없이 침수될 것이다.
이 부대를 이루고 있는 이십 만 명 중에는 그런 생각을 해본 자가 단 하나도 없단 말인가. 병사들은 제쳐두고서라도, 부대 사령관이나 참모진들이 이런 진형을 구축하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 자체가 뮤켄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장 들어가 전하를 만나 뵙겠다고 말씀 올려라. "
오 백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온통 적군으로 둘러싸여 있는 하크스를 돌파해서 이곳 그레안까지 오느라 지칠 대로 지친 육신 위에 이루 말할 수도 없는 불쾌감이 깃들여져 그의 신경은 곤두설 대로 곤두서 있었다. 보초병을 노려보는 뮤켄의 코발트 빛 눈동자는 그런 그의 기분을 여과 없이 반영하여 한층 사납게 빛나고 있다. 주춤거리며 행동을 미루고 있는 상대를 나직하게 쏘아보던 그는 결국 목소리를 낮춰 으름장을 놓고 말았다.
"본관이 직접 들어가 고할까. "
호위병 하나가 창백해진 표정으로 급히 고개를 흔들더니, 막사 입구를 가린 두터운 천을 걷어올리고 황망히 그 안으로 사라졌다. 뮤켄은 혀를 차고 싶은 심정을 억제하며 상대가 나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들어오시랍니다. "
뮤켄은 묵묵히 상대를 지나 입구 쪽으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가볍게 심호흡을 해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라앉힌 뒤 그는 걷어 올려진 천 안으로 들어섰다.
"마세르! "
안타미젤 왕자가 반색을 하며 몸을 일으키는 게 보인다. 뮤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마세르 라 뮤켄, 참으로 오랜만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왕가를 수호하시는 크세아로드의 비호 아래 한층 더 훌륭히 성숙하신 모습을 뵈오니, 소관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
잠시 멈칫하는 듯하던 안타미젤이 천천히 그 쪽으로 다가서서 손을 내밀어 뮤켄의 손 위에 겹쳤다.
"내게 이리 서먹한 인사하지 말아요. 난 마세르를 친형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마세르도 나를 그냥 안타미젤이라고 불러주면 안 되나요? "
뮤켄은 가볍게 고개 숙여 다시 한 번 예를 차린 뒤, 굳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의 오수를 방해하는 중죄를 지은 소관에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
뮤켄의 경직된 목소리에 안타미젤의 어깨가 움찔한다.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있었군요. 사실은 부대 사령관들을 만나기 싫어서 그랬어요. ···하지만 마세르가 온 줄 알았다면 그리 하지 않았을 거예요. 정말이에요. "
"전하께서는, 제가 지금 밖에서 기다린 일에 대해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주제넘은 충고지만, 만나기 싫다고 평소에 부하들을 거부하면 위태로울 때 사람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
안타미젤의 해쓱한 얼굴에 금방 후회의 빛이 떠오른다. 그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순순히 잘못을 시인했다.
"앞으로는 그런 어리석은 일 하지 않을게요. "
뮤켄은 그제야 낯빛을 좀 풀고 의자에 앉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요? 난 마세르가 지원군과 함께 하크스로 떠났다 들었는데. "
"예, 전하께 부탁드릴 게 있어 이리 왔습니다. "
"부탁이라니 무슨··· "
"전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저희 지원군은 본진에서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만. 거두어 주시겠습니까? "
단도직입적인 대답에 멍하니 뮤켄을 응시하던 안타미젤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는 조금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병력 증강이라면 이쪽으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지요. 하지만, 지원군은 하크스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그런 사안이라면 지원군 사령관이 직접 이야기해야 할 터인데, 그도 보이지 않는군요. 함께 온 것 아니었어요? "
"일단 저희 군이 하크스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곳은 현재 농성중이라, 병사가 늘어나면 도리어 식량 사정을 악화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게다가 농성을 도울 수 있을 만큼의 최소한의 병력은 이미 첸트로빌 성에 두고 왔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지원군 사령관은 현재 해로로 이동 중입니다. "
"해로? "
"천 단위의 병력이 육로로 한꺼번에 움직이면 적에게 포착되기 쉬어 일부러 병력을 분할시켰습니다. 사령관은 하크스와 아나브릴을 우회하는 경로를 채택했으니 한 일주일 후 쯤이면 도착하겠지요. 저는 전하께 미리 허락을 구하고자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먼저 온 겁니다. "
"마세르가 데려온 병사들은 얼마나 되지요? "
"오 백 가량 됩니다. "
"그럼 일단 그 병사들부터 수용하도록 하지요. "
안타미젤은 밖에 있는 호위병을 참모부에 보내어 뮤켄이 데려온 병사들에게 막사를 할당해주라고 지시했다.
"이 쪽 상황은 어떻습니까? 듣던 것보다 전선이 많이 후퇴해 있는 것 같습니다만. "
뮤켄은 펜데스칼의 구릉지대에 적의 진지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말을 꺼냈다.
"몇 번의 교전 끝에 후퇴했어요. 나흘 전에 대대적인 퇴각을 하면서 여기에 새로 진지를 구축했지요. "
대답하는 안타미젤의 목소리에 힘이 쭉 빠져있다. 시선을 약간 떨구고 있는 그의 얼굴도 어둡기 그지없다.
"혹시 진영 주변의 지형은 살펴 보셨습니까. "
안타미젤이 고개를 흔든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뮤켄은 입술을 깨물었다. 착잡한 기분이 꾸역꾸역 몰려온다. 총사령관의 책임을 다하기에는 아직 안타미젤은 너무 어리다. 그 점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게 언제까지고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 그가 이 자리에 앉은 이상, 설령 그의 능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라 해도 가능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그럼 이 주변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는 것을 허락하셨단 말씀입니까? "
다시 이어진 뮤켄의 음성은 놀랍도록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다시금 치밀어 오른다. 무책임한 부대 사령관들과 참모들에게 참을 수 없으리만큼 화가 난다. 어째서 그들은 안타미젤을 제대로 보좌할 생각을 하지 않는 건가. 이래서야 지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난 지리 같은 건 전혀 모르고··· "
"모르셔도 나가 볼 생각은 하셨어야지요. 전하께서 이끌고 있는 부대 아닙니까. "
딱 잘라 말하는 뮤켄의 단호한 어조에 안타미젤의 푸른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잠시 말을 멈추고 조용히 왕자를 응시하던 뮤켄은 결국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조금 누그러진 음성으로 덧붙였다.
"현재 본진의 위치와 배치는 너무 위태롭습니다. 긴 말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저와 함께 나가 주변 지형부터 보셨으면 합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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