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태풍의 눈 6-7화 안타미젤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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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안타미젤 왕자
2층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은은한 피아노 선율에 막 계단을 오르려던 마들리네 레 폰다 공녀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비쳤다.
‘또 피아노를 치시는 모양이군.’
그녀는 연한 크림색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살짝 들어 올린 채 계단을 올랐다. 2층의 복도를 지나 조금만 더 안으로 들어가면 클레이온 성에서 정원의 전경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사촌 동생의 방이 있었다. 마들리네는 얼굴에 한껏 미소를 떠올린 채 경쾌한 발걸음으로 그의 방으로 향했다. 매번 다른 하인들을 물리고 아버지의 심부름을 손수 전하길 자청할 정도로 사촌 동생인 안타미젤은 그녀에게 있어 소중한 존재였다.
“공녀님! ”
마들리네가 수행 시녀조차 대동하지 않고 홀로 이곳까지 온 것이 의외였던 모양인지 문 앞에 서 있던 근위병들이 놀란 기색으로 부산하게 예를 차렸다.
“지금 곧 전하께 알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
황급히 자신의 내방을 알리려 하는 그들을 눈빛으로 막아선 마들리네는 아무 말 없이 한 걸음 더 다가서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나 복도의 소란을 듣지 못한 것인지 문 안쪽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는 전혀 그칠 기색이 없어 보였다. 대답을 기다리며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황망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던 근위병 중 하나가 다시 나섰다.
“아니야. 방해하지 마라. 내 알아서 들어갈 터이니. ”
그녀는 들어오라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문고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린 것도 알지 못한 채 연주에 몰입하고 있는 열서너 살 되어 보이는 소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소년의 피아노 소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선 마들리네는 늦 오후의 햇살을 받아 한층 더 윤기가 나는 검은색 광택의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온화한 인상의 소년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약간 아래로 숙인 이마 아래로 살짝 흘러내린 몇 가닥의 금갈색 머리카락과 그 자신이 만들어낸 선율에 심취한 듯 가볍게 감은 눈을 거쳐 희고 검은 피아노 건반 위를 마치 물결을 타듯 부드럽게 오가는 그의 가늘고 긴 손가락까지, 그야말로 예술의 신 알레아시아의 총아라는 후문이 무색하지 않을 만치 음악과 자연스레 어우러진 모습이었다.
순간 마들리네는 올해 열네 살의 이 소년이 도성 다이레비드 못지않은 웅장함으로 소문난 이 클레이온 성의 성주임과 동시에 세레즈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세력지인 폰다 영지의 주인이라는 사실과 현 여왕 세느비엔느의 유일무이한 아들이자 선대왕 카르세오 Ⅴ세의 피를 이은 적통 왕자로 세레즈 왕위 계승 서열 2위의 대공 전하라는 점을 완전히 잊고 말았다. 단지 그녀는 때로는 맑은 샘물처럼 청아하게 또 때로는 아름다운 새의 지저귐처럼 경쾌하게 이어지는 피아노 선율에 흠뻑 빠져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십 여분 정도 흘렀을까. 피아노와 함께 한 폭의 그림처럼 녹아들어 있었던 소년의 손이 문득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방안에 흘러넘치던 피아노 소리도 그쳤다. 방금까지 연주하였던 선율처럼 맑고 깨끗한 느낌의 음성이 감상에 빠진 그녀를 일상으로 불러들였다.
“오신 줄도 모르고 있었네요. 언제 오셨어요? ”
“조금 전에 왔습니다. 허락 없이 들어온 누이의 무례를 용서하세요, 전하.”
마들리네는 반색을 하는 안타미젤에게 치맛자락을 잡고 짐짓 장난스레 허리까지 굽혀 보였다. 짓궂은 장난기 어린 사과의 말에도 천진한 안타미젤은 민망스러운 기색으로 손까지 휘휘 내저었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세요. 오신 것을 알렸다면 이렇듯 기다리시게 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전하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싶어 일부러 막았답니다. 그런 제 욕심이 전하께 방해가 된 것은 아니겠지요? ”
마들리네는 미소지으며 안타미젤의 온화한 눈을 응시했다.
“방해라니요. 이렇듯 누님께서 먼저 찾아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
그녀를 향한 그의 얼굴도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마들리네는 아직도 앳된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안타미젤의 보송보송한 얼굴을 따듯한 눈길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은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 드리려고 이렇게 전하를 찾아온 것이랍니다. ”
“외숙께서 왜···? ”
반문하는 그를 안심시켜 주기라도 하려는 듯 마들리네는 어조를 조금 더 부드럽게 가라앉혔다.
“폐하께서 전하께 입궁하시라 공문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그 일로 아버지가 전하를 뵙고 싶어 하세요.”
7. 소환령
“이것이 전부인가요? ”
안타미젤은 공문을 받아들며 작게 물었다. 여태까지 도성에서 그에게 보내온 서한에는 내용의 중요도 여부와는 상관없이 늘 모친으로부터의 안부 서찰이 따라왔기 때문에 안타미젤으로서는 외숙이 건네준 서한이 공식 명령서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의아해진 까닭이다.
“네, 전하. 왜 그러십니까? ”
“아무것도 아니에요. ”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양이었으나 대답하는 조카의 목소리에서는 어쩔 수 없이 서운한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무리 왕자니 대공이니 하여도 이럴 때의 안타미젤은 그저 어린 소년일 뿐이다. 떨어져 사는 어머니로부터의 편지를 애타게 기다리는 어린아이, 폰다 공작 그레일라스는 측은한 심정이 되어 부드러운 어조로 그를 달래었다.
“태자 전하의 불미스러운 사고로 인하여 폐하께서도 매우 황망히 지내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어머님을 이해하셔야지요. ”
“아······. 네. ”
안타미젤은 힘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어리광을 피우면 안 돼. 어머님은 바쁘시니까.’
애써 이렇게 생각을 돌려 보려고 하여도 왕실 공영 문서에 궁내부 대신의 대필로 적힌 소환령을 보니 다시금 기운이 빠졌다. 어머니께서 애정을 담아 그저 이름 한 마디만이라도 불러주었다면 이리 섭섭하지는 않았으리라.
속이 상하다 못해 도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는 사촌 누나의 말을 전해 듣고 잔뜩 기대를 품고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국왕의 자리는 힘들고 외로운 것이랍니다. 하나뿐인 아드님께서 폐하의 고충을 알아주시지 않으면 그 누가 있어 폐하께 의지가 되겠습니까. ”
아무래도 공문을 내려놓는 손길에서 불만스러운 감정을 느낀 모양이었다. 폰다 공작이 다시 한번 타이르는 듯 덧붙였다.
“어머님께서 많이 힘들어하신다는 것은 잘 알아요.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
안타미젤은 조용하게 대답하고는 창가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활짝 열려 있는 창을 통해 향기로운 꽃내음이 은은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함성이 부드러운 바람에 실려 희미하게 들려왔다. 멀리 떨어져 있는 연병장에서 병사들이 훈련받으면서 내는 소리였다.
“병사들의 하기 훈련을 벌써 시작한 건가요? ”
공작 역시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네. 요즘 자원입대가 늘어 훈련 시기를 조금 앞당겼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폐하께서 군대를 차출해두라고 명하셔서 난감해하고 있던 차였는데 마침 잘된 일이지요. 이대로라면 폐하의 분부대로 일단의 병력을 도성으로 올려보내도 폰다 영지의 상비병 비율은 예년과 엇비슷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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