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진흙 속의 연꽃 3화 후방기지 카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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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후방기지 카르테섬
비가 내린다.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무심히 두들기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창틀 너머의 거센 바람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아오는 폭우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선전포고와 함께 이루어진 대규모의 원정. 그 출정군의 하나로 조국 코네세타를 떠나온 지도 어느덧 반년이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출병 이후 지금까지 흘러간 날들을 헤아려 보던 페르겐드의 입가에 문득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전투 기회가 거의 없는 후방 원조 부대에 소속되어 있는 그로서는, 이렇듯 따로 날이 가는 것을 세어 보지 않는 한 시간이 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기 힘들었다.
엄연히 적의 영토인 이곳 카르테 섬에 도착한 이후에도 페르겐드의 일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상관을 보좌하고, 전황을 보고하고, 원조 선단의 물품을 구별하여 그 목록을 작성하고, 군수품의 보관 상태를 점검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각 부대에 적절히 배급하는 것을 검사하는 등, 그의 임무는 조국에서 하던 것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작업이었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일의 규모가 확대되었다는 것뿐이랄까.
페르겐드는 시선을 들어 성 너머 검푸른 바다를 쳐다보았다. 사납게 일렁이는 파도가 위태롭게 서 있는 이 성을 잡아먹을 것처럼 난폭하게 부딪혀온다.
‘바람이 너무 거센데. 보아하니 금새 그칠 비 같지도 않고. 역시 나머지 것들도 성안으로 들여놓으라고 할 걸 그랬나.’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음, 배 안에 내버려두었던 것들 중에 습기가 차면 곤란해지는 게 뭐가 있더라···?’
"페르겐드! "
약간 고조된 듯한 상관의 목소리에 그는 흠칫하여 뒤를 돌아봤다. 이 카르테 성의 총책임자이자, 코네세타 군 후방 원조 부대 사령관인 시든 테세르 장군이 회색 콧수염을 매만지며 다소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 건가? 몇 번을 불러도 모르니, 원. "
숙인 머리 너머로, 상관이 나직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
아무래도 대답을 잘못한 것 같다. 자신을 향한 상관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
테세르 장군은 시선을 잠시 돌렸다가 낮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어제 도착한 원조 선단의 물품 목록을 작성해 두라 했었지. 그것을 이리 달라고 했네."
테세르 장군의 날카로운 얼굴은 어느덧 평상시의 근엄한 표정으로 되돌아 있었다. 페르겐드는 자신이 들고 있는 서류철을 내려다보고는 민망한 기색으로 다시 고개를 떨궜다.
"예, 여기 있습니다. "
말없이 그것을 받아 들며, 테세르는 다시 한번 혀를 찼다. 눈앞에 서 있는 이 청년이 유능한 부관이라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도합 30만에 이르는 대군의 보급을 총괄하는 카르테 후방기지의 업무량은 전선에 있는 행정 장교나 참모들에 업무량에 감히 비할 바가 되지 않는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틀도 못 버티고 쓰러지고 말 만큼 많은 일을 맡겨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능란하게 해치우면서도, 자신의 부관 역할까지 빈틈없이 해내는 페르겐드 아닌가. 그가 코네세타 전군을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들만큼 신속하고 정확한 처리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테세르는 진작부터 알아보았고, 그 때문에 벌써 삼 년째 그를 자신의 전속 부관으로 쓰고 있었다. 하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페르겐드는 어떻게 보아도 참모직과는 그다지 어울린다고 할 수 없을 감상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 점은 도리어 그의 뛰어난 능력과 대비되어 한층 더 테세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곤 했다.
"몸이 안 좋으면 차라리 들어가 쉬게. "
지난 삼 년간 무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칠 수 없었던 그 성격이 이제 와 잔소리 몇 마디 에 달라질 것도 아니고 하여, 테세르는 그렇게 내뱉었다. 물론 딴생각에 사로잡혀 방안을 하릴없이 서성이는 페르겐드 때문에 자신마저 주의가 산만해지는 것이 더 큰 이유였지만 말이다.
“아닙니다, 각하. 제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여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쳤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
"그럼 이걸 좀 정리하게. 거기 앉아서. "
부관이 서류더미를 들고 탁자에 앉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는 책상 쪽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는 장수층이 풍부하다는 코네세타에서도 굴지의 군사 행정 전담자라는 평을 받고있는 자답게, 이내 능란한 솜씨로 부관이 작성한 목록에서 각 부대에 필요한 물품과 수량을 계산해 나갔다.
이제 막 마흔이 조금 넘은 이 사내는 군수품을 관리하고, 언제 어느 부대에 무엇이 얼마만큼 필요한가를 간파하는 데 비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가하지 않고서도 상급 장수의 자리에 오른 그를 비방하는 무리도 적지 않았으나, 그들 역시 그가 없었다면 코네세타 군으로서도 보급 문제에 한층 더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역시 그 일이 여파가 크군. "
시든 테세르 장군이 책상 위에 정리된 서류를 탁 소리 나게 던지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바람에 종이더미 맨 위에 놓여 있던 문서 한 장이 책상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페르겐드는 얼른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주워 올리며 짧게 반문했다.
"무슨 일 말씀입니까? "
"아아. 첸트로빌 공략부대가 급습당한 것 말일세. "
페르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공략부대의 식량창이 초토화되지 않았나. 하지만 당시에는 딱히 그 부대에 보낼 식량이 마땅찮아서 로크라테에서 조달하게 했었지. 그게 문제가 되었나 보네. ”
테세르 장군은 펜데스칼로 이동을 끝낸 본진의 총사령관인 크리스토퍼 라콘 대장군으로부터 도착한 서한을 책상 앞으로 쭉 내밀며 말을 이었다.
"로크라테 영주가 그 일을 핑계로 더 이상 펜데스칼에 있는 아군의 본진에 군수품을 대지 못하겠다고 한 모양이야. 여기 대장군으로부터 식량 원조를 요구하는 서한이 도착했네. "
그는 부관의 시선이 대장군의 서한에 꽂히는 것을 응시하며 약간 착잡한 듯 말을 이었다.
"일단 급한 대로 본국에서 도착한 식량들을 긁어모아 급히 펜데스칼로 올려보내야겠어. 로크라테 영주를 설득하는 건 그 이후의 문제가 될 테지. 강요한다 해서 쉽사리 해결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니까. "
테세르는 고개를 돌려 창가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상념을 끊어내듯 단호한 음성으로 지시했다.
“날이 험하긴 하지만, 서둘러야겠네. 부사령관과 참모들에게 이리 오라는 전갈을 보내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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