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부위정경 3화 거리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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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부위정경 扶危定傾
3. 거리의 아이, 슈레디안
슈레디안은 몇 걸음 앞서가던 마크 엘센의 걸음이 느려지는 것을 감지했다. 깨달음과 동시에 그는 일부러 표정을 굳히며 걸음을 늦추었다. 예상대로 엘센은 곧이어 걸음을 멈추더니 그를 돌아봤다. 근심을 담은 엘센과 눈이 마주치자 슈레디안은 억지로 입술을 끌어올려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긴장을 풀어내고 싶은 양 억지웃음을 짓는 수하를 보고 엘센도 쓰게 웃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반평생을 이스빌렌에서 복무한 데다가, 뛰어난 무예 실력 덕에 평민 출신임에도 근위대에 발탁되어 분대장 자리에 오른 자신조차도 에스피아 공주를 대할 일이 생길 때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어려움이 절로 떠올랐다.
하물며 슈레디안은 몰락 귀족의 사생아로 태어나 어릴 때는 구걸을 하지 않으면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어려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그가 생전 처음으로 왕족을 대면하게 되었는데 어찌 태연할 수가 있겠는가. 떨지 않는 편이 외려 기이하다 해야 할 만한 일이리라.
“맨 처음에 공주님께서 찾으신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적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더니 이제야 실감이 나더냐. 배포 하나는 타고난 네 녀석도 본성이 가까워지니 긴장이 되는 모양이지?”
대체 누가 배포를 타고 난 것인지. 세레즈의 왕위 계승자이자 국왕권을 대리한 외교 사절의 자격으로 이곳을 방문하였던 때만 하여도 감히 저를 고개 들어 올려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을 엘센이 태연하게 슈레디안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놀리듯 농을 걸어왔다.
“놀리시지 마세요, 분대장님. 입대 때 딱 한 번 객기 부려본 거 가지고 여태······. 저 그때도, 지금처럼 죽을 만치 떨렸었다고요.”
진중한 플로베르와 달리 엘센은 쾌활한 기분파였다. 아체프렌, 아니 슈레디안은 상대의 장단에 맞춰 뒷머리를 긁적이며 우는소리를 하였다. 이스빌렌에 닿을 때까지 시장통에서 먹고 지내며 자연스레 익힌 앓는 소리 따위는 이제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공주님, 하,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저 같은 얼뜨기를 왜 공주님이······. 암튼, 그렇게 귀하신 분을 뵙는 건 아무래도 처음이다 보니······. 실수하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뭘 물어보셔도 저따위가 제대로 답을 할 수 있을 거 같지도 않고······.”
상대 앞에서 어리숙한 척을 하는 것은, 속이 빤히 보이는 영악을 떠는 것 이상으로 쉬웠다.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계모의 적의 어린 시선 속에서 자라온 경험은 그가 적국인 코네세타에서 살아남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커다란 틀에서 보자면 본인을 숨기고 상대가 바라는 모습을 연기하면 된다는 측면에서 세레즈의 왕성에 있었을 때의 삶과 이곳에서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고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쓰는 것은 그가 평생 해왔던 일인지라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슈레디안이란 인격을 쓰는 것에 그는 거의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대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연기에, 때로는 자신 안에 원래 슈레디안이란 인격이 별개로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였다.
“설마하니 대답이 맘에 안 든다고 냉큼 목을 쳐라, 뭐 그러는 거 아니겠죠? 겁이 나서 자꾸 떨리고 속이 바짝바짝 타네요. 입술도 마르는 것 같고.”
바짝 얼어붙어 터무니없는 망상을 거듭하는 수하를 보고 엘센은 피식 웃었다. 저렇게 순하고 어리숙한 성품을 하고서 첫 대면에는 어떻게 그리 당차게 대거리할 수 있었는지 지금도 의아할 따름이었다.
하긴 그때도 입대를 허락받자마자 슈레디안은 저의 옷소매를 붙들고 주저앉아 긴장과 두려움으로 가슴이 다 터지는 줄 알았다며 하소연을 했었다. 그리고는 강해 보여야 어디서고 밥술이나 뜬다고 주위에서 하도 뭐라 하여 눈 딱 감고 당돌하게 굴어 봤는데 너그럽게 봐주셔서 감사하다며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기까지 하였다. 시건방지고 괘씸한 녀석이 어쩐지 밉지 않은 귀여운 놈으로 탈바꿈하던 순간이었노라고 엘센은 그때를 회상했다.
슈레디안이 친우인 플로베르의 소개장을 들고 엘센을 찾아온 것은 보름 전의 일이었다.
엘센의 눈에 비친 슈레디안은 길에서 자라온 이들이 대개 그러하듯 당차다 못해 건방져 보였다. 플로베르의 편지에 적힌 대로 그가 친우의 내자인 엘리자베스의 친척이라면 엘센에게는 첫 주군의 일족이었다. 벗과의 의리뿐만 아니라 주종 간의 정리 때문에라도 처소를 마련해주고 일자리 정도는 기꺼이 알아봐 줄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슈레디안이 대뜸 그에게 이스빌렌 근위대에 들어가려면 어찌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만 하여도 엘센은 그를 수하로 거둘 의향이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슈레디안은 자신을 소개할 때에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한 전 밀로타 영주 아들 카일 크론케이터의 사생아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부친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지가 이루어진 서자와 인지조차 받지 못한 사생아는 엄연히 사회적으로 받는 대우가 달랐다. 전자의 경우는 부친의 체면을 고려하여 귀족 대우를 해줄뿐더러 국가에서도 제한적이나마 상속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제 혈육으로부터도, 국가로부터도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했다.
부친의 인지가 없으니 귀족으로 인정받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모계에 따라 평민이나 천민 취급하기에는 그 반쪽짜리 고귀한 혈통이 걸려 나라에서도 사생아의 신분을 정하길 포기하였다. 결국 나라와 제 혈육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사생아들은 사회의 어느 계급에도 속하지 못하는 ‘거리의 아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지가 없는 상황에서 태연하게 부계의 성을 가져다 쓰는 슈레디안의 뻔뻔한 태도에 엘센은 무심결에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사회적 통념에 따른 자연스러운 거부감의 발로였다. 그런 엘센의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했던 양 슈레디안은 원색적인 말로 빈정거렸다.
“어차피 몰락해서 아무도 쓰지 않는 성을 제가 좀 가져다 쓰면 안 됩니까? 인지요? 발정 난 개새끼처럼 아무나와 흘레붙어서 책임지지도 못할 씨앗을 뿌리는 멍청이의 혈통 따위 하등 자랑스럽지 않으니 그 작자가 살아온다 해도 인지 같은 건 제 쪽에서 걷어찰 겁니다.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 인간에게 받은 게 아무것도 없어요. 생전 처음으로 덕이란 걸 본 게 지금 대장님이 갖고 계시는 소개장입니다. 그러니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쩌겠어요? 빌어먹을 핏줄이 아니라면 당장 어디 비빌 구석도 없으니 내키지 않아도 그 고귀하셨다는 분의 성을 잠시 빌려 쓸 수밖에요. 그래야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생아란 꼬리표를 달고서 평생을 살아온 제가 좀 덜 억울하지 않겠어요.”
슈레디안에게 설득당한 건 천박한 말이 뒤섞인 조소에 양심이 찔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벗의 간곡한 부탁 때문도 아니었다. 이십여 년 전에 죽은 옛 주군에 대한 충정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본인의 거취를 좌우할 수 있는 사람 앞에서도 조금도 기죽지 않은 슈레디안의 눈빛 때문이었다. 부탁하는 자 특유의 비굴함도, 비천하게 자라온 자들 특유의 주눅도 느껴지지 않은 새파란 눈은 세상 모두를 발아래 두고 있는 양 오연하기 그지없었다.
슈레디안의 눈동자가 그의 몸에 흐르는 고귀한 혈통을 천 마디 이상으로 여실하게 증빙하고 있었다. 엘센은 한순간 그 눈이 귀족, 아니 왕의 눈빛 같다고 느꼈다. 그 눈동자에 담긴 기백에 밀려 자칫 한 걸음 물러설 뻔한 엘센은 헛기침을 한 뒤 이렇게 대꾸하고 말았다.
“이스빌렌 근위대에 들어오려면 일단 그 점잖지 못한 말투부터 고쳐야 할 걸세.”
슈레디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음기를 머금으니 독기를 품고 따지고 들 때와는 전혀 다른 인상으로 보였다. 그와 동시에 삐딱하던 자세도, 비꼬임으로 가득 차 있던 말투도 순식간에 깍듯하게 바뀌었다. 과연 거리의 아이다운 약삭빠름이라고 엘센은 생각했다.
“기회만 주신다면 말투가 아니라 무엇이라도 고치겠습니다.”
“그 말은 입단 시험을 보고 싶다는 뜻인가?”
“예. 하지만 정식 입대 시험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분대장님의 재량 아래 특별시험을 볼 기회를 부여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검술, 창술, 궁술, 기마술, 어느 것이라도 좋습니다. 제 실력이 미심쩍어 주저되신다면 지금 시험해 보셔도 괜찮습니다.”
엘센은 슈레디안을 목검 연습용 회전 나무 막대 모형이 있는 쪽으로 데려갔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십여 개의 나무 조각을 일정한 각도로 받아쳐야 하는 기계장치였다. 병장기 개발로 유명한 커런스의 기술자를 초빙하여 만들어낸 이 최신식 기계장치는 반응 속도가 조금만 느려져도, 받아치는 각도가 약간만 틀어져도 반드시 다음 막대에 얻어맞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자동으로 움직인다면 끝날 때까지 총 소요 시간은 겨우 일각 남짓이었으나 이 훈련을 받고 난 병사들은 늘 땀범벅이 되곤 했었다.
엘센은 슈레디안에게 나무 목검을 주고, 머리를 보호할 수 있는 투구를 내밀었다. 작동 요령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들은 슈레디안은 투구는 됐다며 목검 하나만 들고 장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장치가 작동하는 동안 단 하나의 막대도 놓치지 않고 완벽하게 다 받아치고는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아니한 말끔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검을 잡는 것은 물론이요 위로 올려치거나 아래로 내려칠 때도, 길게 베어내고 짧게 찌를 때도 흡사 교본에나 나올 법한 정확한 자세여서 지켜보고 선 엘센조차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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