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표류 6화 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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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자각
“다 됐다.”
아이네즈는 자신에게 알려주듯 중얼거리며 마지막 바늘땀의 실을 끊어내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왕이면 원래부터 입고 있던 옷을 손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옷은 장시간 파도에 휩쓸리는 바람에 원래 형태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여기저기 찢어져 있어 도무지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동안 궁여지책으로 아비인 플로베르의 옷을 빌려 입고 있었지만, 키는 훤칠해도 선이 가는 편인 슈레디안에게 건장한 플로베르의 옷이 맞을 턱이 없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려 신경을 쓰다가 저번에 장에 갔을 때 약간 무리를 해서 옷 한 벌 분량을 만들 수 있을 만한 감을 끊어온 것이다.
시침바느질이 얼추 끝나가는 옷을 펼쳐 든 아이네즈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슈레디안이 원래 입고 있던 옷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은 까닭이었다.
슈레디안이 실려 올 당시 입고 있던 옷은 대단히 고급스러웠다. 비록 소금물에 젖고 찢어져 본래 모습을 알아보기가 어려울망정 옷감만으로도 여태껏 접해오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그간 그녀가 소중히 간직해 온 어머니의 옷보다도 훨씬 화려한 느낌, 그 정도라면 귀족이라 해도 어지간한 재력으로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리라. 애써 좋은 옷감을 고른다고 골랐으나 그가 애초에 입고 있던 옷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터였다. 너무 수수한가 싶기도 했지만 아이네즈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뭐,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계속 그 어색한 모습으로 돌아다닐 수도 없을 테고, 벗고 다니기 싫으면 입어야지 별다른 수가 있겠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네즈는 반짇고리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슈레디안, 지금 바쁘지 않다면 저 좀 잠깐 볼래요?”
“예? 무슨 일 있나요?”
대답은 바로 돌아왔지만 슈레디안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침대 위에 몸을 길게 뻗고 창밖을 내다보며 뒹굴고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 옷을 만드는 중이거든요. 잘 맞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잠시 와서 걸쳐봤으면 해서요.”
“꼭 지금 해야 합니까?”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매사에 대체로 친절한 편인 슈레디안이었으나 깊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방해하는 것만은 매우 싫어한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던 터라 아이네즈는 그다지 마음 쓰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로서도 지금이 아니면 따로 시간을 내서 시침바느질을 마치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어라? 다 된 옷이 아니네요?”
아이네즈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아이 같은 물음이었다. 예의범절이 깍듯한 데다가 또래의 다른 이들보다 언행이 점잖고 태도가 진중하여 한없이 성숙해 보이다가도, 이럴 때 보면 또 마냥 어린애 같기도 했다.
“맞는지 아닌지 품을 확인해 보는 거라고 했잖아요. 이쪽이 약간 헐렁하네요. 자, 이렇게······, 핀을 꽂아서 몸에 잘 맞게 하는 거예요. 움직이지 말아요.”
하지만 무언가 불만스러운 표정이던 슈레디안은 그예 몸을 움직여 핀에다 팔을 갖다 꽂고 말았다. 제 실수라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굴만 찡그리는 그를 아이네즈는 일부러 못 본 척했다.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혀끝을 깨무는 것으로 간신히 눌러 참는 그녀를 슈레디안은 못마땅한 듯 돌아봤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겁니까?”
뾰로통한 얼굴로 되묻는 것이 꼭 어린 동생을 보는 기분이었다. 귀여웠다. 하지만 아이네즈는 제 심사를 들키지 않도록 부러 입바른 말을 했다.
“슈레디안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잖아요. 나는 계속 움직여서 치수를 맞춰야 하는데, 어느 쪽이 빨리 끝내고 싶을 것 같아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야단을 맞아본 적이 없었던 슈레디안은 낮은 음성이었지만 또렷또렷한 어조로 혼을 내는 아이네즈의 태도에 그만 기가 죽어버렸다.
최초의 당혹감이 지나간 자리에 차츰 분한 마음이 차올랐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지는 거 같아서 아이네즈에게 무어라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말에 틀린 곳이 없어 무어라 반박할 여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아이네즈가 “다 됐습니다. 수고하셨어요.”라고 말할 때까지 시무룩한 얼굴로 그냥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끝난 겁니까?”
“네, 나중에 본 바느질 끝내고 확인 겸 한 번만 더 입어보면 완성될 거예요.”
“한 번 더요?”
아까 아이네즈의 대꾸에 말이 막혔던 짜증까지 겹쳐 그의 말투엔 뚜렷하게 신경질이 묻어났다. 천을 곱게 접어 집어 들던 아이네즈도 약간 굳어진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그냥 있는 것 입겠습니다. 이런 귀찮은 일, 일부러 하지 마세요.”
“······옷이 마음에 안 드나요?”
“아니 꼭 그렇다기보다는,”
슈레디안은 다시 웅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로서는 그에게 옷을 만들어주느라고 애를 쓰고 있는 셈인데 거기에 대고 차마 귀찮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화를 낸다면 확실하게 그런 일 그만두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이미 있는 것이라 해봐야 모두 아버지 옷이잖아요. 슈레디안의 옷을 좀 더 빨리 만들어주지 못한 것은 나도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나로서도 빨리 만들려고 최대한 노력한 것이니 당신이 그것만큼은 알아주면 고맙겠네요.”
아이네즈는 잠시 말을 끊고 슈레디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맑고 또렷한 그녀의 눈동자는 흡사 제비꽃 같은 느낌의 청보라 빛이었다.
예쁘다.
슈레디안은 무심코 그리 생각했다.
아이네즈의 눈동자가, 그리고 그녀의 표정이 사랑스럽다고 느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마운 은인이며 호기심이 가는 대상이었던 아이네즈가 슈레디안 안에서 단숨에 이성으로 승화하는 순간이었다.
최초에는 충격이, 그다음에는 설렘이 슈레디안의 전신을 메워왔다.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그런데도 도저히 그녀에게서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로 묶여 그녀 하나만을 바라보도록 고정된 것처럼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쨌든 좋지 않잖아요. 자신에게 무언가 해 주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당신이 그걸 기꺼이 받아들여 준다면 한층 더 기쁠 거예요.”
아이네즈는 대꾸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는 슈레디안을 내버려 둔 채 재빨리 돌아섰다. 얼른 등을 돌려 문을 닫을 수 있었던 것은 뺨이 약간 달아오른 그녀에게도 행운이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 작가의말
1부 1장 표류 끝,
열심히 쓸테니 믿고 읽어주시고 추천이나 선호도 꾹꾹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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