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전장에 핀 꽃 1화 굳건한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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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전장에 핀 꽃
세레즈력 387년 4월,
남부탈환군의 총사령관, 안타미젤 폰다 벤 세레스티아,
본진에 도착한 미드프레드 라 그론레이 휘하 하크스 지원군을 직속부대로 수용하다.
-제국력 연대기 섭정공 세느비엔느 열전 발췌
1. 굳건한 성벽
도무지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굳건한 회색 성벽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적군이 줄기차게 쏟아 부어대는 뜨거운 물과 기름 공격에, 성벽을 기어오르던 아군 병사들이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이 클리어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그는 잡고 있던 말고삐를 신경질적으로 손에 감아 쥐며 시선을 내렸다.
혼잡한 전장 곳곳에 쓰러져 있는 병사들의 처참한 모습이 망막을 어지럽힌다. 이대로는 무리다. 성안에 있는 적군은 전력 손실이 전혀 없는 반면, 아군의 피해만 속출하고 있다.
클리어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전방을 쏘아보았다. 성 위로부터 화살 하나가 비틀대며 날아온다. 그는 뽑아 들고 있던 검으로 그것을 한 번 쳐서 날려버리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미 승산 따위는 없다. 더 매달려 봤자 피해만 늘어갈 뿐. 악다문 입술 새로 역한 피비린내가 확 끼쳐온다.
"퇴각! 전군 퇴각하라!! "
클리어트의 갈라진 음성이 허공에 메아리 친다. 자신의 명령을 병사들에게 전하는 분대장들의 고함소리를 뒤로한 채 클리어트는 말머리를 획 돌렸다. 자신을 따라오는 병사들의 숨가쁜 헐떡거림이 그의 뒤통수에 달라붙는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아군이 후퇴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등뒤로 적군의 화살이 빗발친다. 말고삐를 쥐고 있는 팔뚝에 일순 화끈한 기운이 닿는다. 하지만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다. 클리어트는 병사들을 사정권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소리쳐댔다.
겨우겨우 아군의 진영 안으로 들어온 클리어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주위의 병사들을 둘러 보았다. 말고삐를 쥐고 있는 손아귀가 끈적거린다.
하지만 그는 병사들의 수를 대강이나마 어림한 뒤에서야 비로소 시선을 내려 왼팔을 바라보았다. 어깨부터 손목까지를 보호하기 위해 착용한 가죽 보호대의 일부가 깊게 찢겨 있고, 왼쪽 팔뚝은 온통 붉은 피로 흥건하다. 긴장이 풀린 것인가. 새삼스럽게 상처 부위가 얼얼하게 쑤셔댄다. 씁쓸한 웃음이 치민다. 그는 팔뚝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말 위에서 내려왔다.
신경질적인 걸음걸이로 막사 안으로 휙 들어서는 클리어트 뒤를 따라 군의관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뛰어들어온다.
"뭐냐. "
내던지는 듯한 말투에 따라 들어온 군의관이 움찔하며 변명하듯 말을 주워섬긴다.
"각하께서 부상을 입으신 듯 하여··· "
"대수롭지 않은 상처다. 나가서 병사들이나 돌보도록. "
"하지만 곧장 치료하지 않으면 파상풍에 걸리실 수도 있습니다. 하다못해 소독 후 지혈이라도 하시는 것이··· "
"그리 하시지요. 활에 맞은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살이 썩어 들어가 나중에 고생하십니다. "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냉랭한 어조다. 클리어트는 안으로 막 들어선 비쩍 마른 사내에게 메마른 눈길을 던졌다.
"흥, 드로와젤인가. "
그는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어내며 부상당한 팔을 군의관 쪽으로 쭉 뻗었다. 짜릿한 아픔이 전신을 강타한다.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그는 이를 악물어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억눌렀다.
"···빨리 해라. "
"예. 금방 끝낼 테니, 잠시 동안만 움직이지 말아 주십시오. "
주섬주섬 자리를 잡고 선 군의관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클리어트의 가죽 보호대를 분리해내고 상처부위에 노란 고약을 바른다. 클리어트는 따끔하게 밀려오는 고통을 억누르며 짜증스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이 빌어먹을 놈의 성 하나에 대체 몇 명이 매달려 있는 거냐. 재수가 없으려니 별 게 다 발목을 잡는구나. 이곳에 온 뒤로 제대로 되어 가는 게 없단 말이다. "
그는 하크스 영주와 첸트로빌 성을 통째로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다는 듯 거칠게 내뱉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따위 촌구석에 처 박혀 있어야 한단 말이냐. "
초조하다. 답답하고 짜증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다. 본진의 총사령관은 그레안에 있는 세레즈 군을 향해 총공세를 취하려 한다는데, 자신은 얼마 되지도 않는 첸트로빌 성의 적군을 상대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이대로 여기 있어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후방 따위에 물러서 있어서야 뚜렷한 전공을 세울 수 없지 않은가. 전면전이 벌어진 이후에 합류해서는 이미 늦다. 될 수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아니 단 한 시간이라도 빨리 이곳을 정리하고 본진으로 가야만 한다.
"해군을 동원해서 도성이나 쳐버릴까. "
악 다문 입술 새로 씹어 뱉듯 한 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분노와 초조함으로 격하게 달아올라 있는 클리어트의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목소리가 곧바로 막사 안에 울려 퍼졌다.
"다이레비드는 절벽 위에 세워진 성채도시라고 들었습니다만. "
"제기랄 그걸 누가 모르나! "
클리어트는 붕대에 절반쯤 감겨 있는 팔을 거칠게 허공으로 내지르며 악을 질렀다. 순간적으로 몰려온 날카로운 통증이 등줄기를 타고 짜릿하게 번져간다. 자기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다. 당황한 군의관의 비명 같은 부름이 흩어진다.
"각하! "
치료 중인 팔을 멋대로 움직여대는 클리어트의 행동에 불만스러운 기색이던 군의관은 사납게 쏘아보는 그의 눈길에 떠밀리듯 주춤거리면서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시선을 떨구었다.
"그리 과격하게 움직이시면 상처 부위가 덧납니다. "
씨근거리는 클리어트를 담담한 표정으로 지켜보며 드로와젤이 말을 꺼냈다. 지금 부상 따위가 문제냐고 호통을 치고 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억누른 클리어트의 귓가에 감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얼음장같은 드로와젤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부딪혀 왔다.
"정 공격을 하시고 싶다면,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 해군을 이용하여 그레안에 있는 적의 후방을 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세레즈 군 전방에 위치한 대장군의 부대와 협공이 가능할 텐데요. "
그러나 클리어트가 그 의견에 대해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드로와젤의 싸늘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현재로선 일단 안정을 취하시면서 상황을 조율해 가는 것이 우선일 것 같군요. 말씀 드린 방법도 후방이 어느 정도는 잠잠해진 뒤에야 실행하실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
클리어트는 잠자코 눈살을 찌푸리며 힘없이 풀어져 아래로 흘러내린 붕대의 일부에 시선을 던졌다. 잠깐의 시간차를 두고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에는 착잡함의 그늘이 짙게 배어들어 있었다.
"···대장군께서 뭐라고 호통치실 지 눈에 선하군. 빌어먹을 놈의 하크스 같으니. "
클리어트는 두 눈을 감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혼잣말 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공세를 취해야 한다는 그 분의 판단은 옳아.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빨리 본진으로 가지 않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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