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부위정경 4화 공주의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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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부위정경 扶危定傾
4. 공주의 부름
“성장 과정이 팍팍했던 것 같은데 검은 어디서 배웠나.”
“입에 풀칠하려고 종자로 들어갔던 데서 몸으로 익혔죠. 공격 자세를 익혀야 방어도 쉽더라고요. 맞으면 아픈 건 누구나 같은데 아무리 돈이 좋아 매품팔이로 들어갔다 해도 되도록 안 아프게 맞는 게 좋잖아요. 무예에 재능이 있다며 거기 계셨던 무술 사범님이 도련님이 안 보실 때 조금씩 가르쳐 주셨습니다. 얼마 못 가 들키는 바람에 결국은 쫓겨났지만 뭐 원망은 안 합니다. 그 덕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제대로 배운바 없이도 이 정도라면 그의 재능은 타고난 것이 맞았다. 엘센은 고심을 하지 않고 슈레디안을 상관인 근위대 대장에게 데려갔고, 대장은 슈레디안에게 병사 몇과 대련을 하게 한 뒤에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바로 특별 입대를 허가했다. 슈레디안은 그날부로 근위대 산하 신병 훈련 담당인 마크 휘하에 배속되었다.
입대를 허가받자마자 무례하게 굴어서 송구했다며 바로 용서를 구한 슈레디안이었으나, 첫 대면의 당돌한 인상이 워낙 짙어 엘센은 우려하는 마음으로 한동안 그를 살폈었다.
되바라진 언행으로 상관에게 대들거나 삐딱한 태도로 동료들과 마찰을 일으킬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슈레디안은 엘센의 우려를 불식시키듯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사고는커녕 입대 이후 그는 한층 더 유순해지고 겸손해졌다. 기초 훈련에도 불평 없이 열심이고, 과묵한 데다 누구에게나 깍듯한 그의 태도 덕에 특별 입대로 구구하게 돌던 불편한 말들도 금방 수그러들었다.
사생아 출신이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자들이 많은데 굳이 먼저 드러내어 밝힐 필요는 없으리라 여긴 엘센을 슈레디안을 불러 나중에라도 입단에 문제가 될지 모를 출신을 감추어 두라 당부했다. 영특한 슈레디안은 그의 뜻을 금방 알아들었다.
엘센은 슈레디안을 겪을수록 그가 마음에 들었다. 언뜻 차가워 보이는 인상과 달리 슈레디안은 착하고 순진한 성격의 청년이었다. 사람에게 함부로 곁을 주지 않는 플로베르가 간곡하게 그를 부탁한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엘센은 생각했다.
갑자기 공주가 정확하게 그와 자신을 지정하여 부른 것이 슈레디안의 출신 탓인가 하여 걱정이 되는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엘센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과 슈레디안 본인밖에 모르는 그 사실을 일국의 공주씩이나 되는 이가 어찌 알았겠는가. 설령 알았다 하여도 국왕과 왕위 계승자를 지척에서 섬기는 귀족 출신의 부대인 친위대와 달리 근위대는 원칙상 무예 실력 외에는 어떠한 출신 제한도 없었다.
의전을 맡게 되는 일이 종종 있는지라 암암리에 입대 희망자의 외모가 선발을 좌우하는 잣대가 되어왔긴 했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문제가 될 턱이 없었다. 훈훈한 용모로 유명한 이스빌렌 친위대 안에서도 슈레디안과 비견될 만한 미모는 없을 터였다. 연무장의 먼지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용모를 지닌 슈레디안이니 제대로 예장을 하면 숨이 막힐 듯 멋질 것이 틀림없었다.
하긴 돌이켜 보면 밀로타의 영주 부인도, 주군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공녀도 참으로 아름다웠다. 땡볕 아래서 몇 시간을 굴러도 조금 발그레해졌다가 말뿐 전혀 그을리지 않는 그의 우윳빛 피부와 남달리 또렷한 이목구비의 원천이 어디에서 기인했을지는 자명했다.
“떨리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야. 나도 처음에는 그랬거든. 공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겐 어려운 분이지만, 어린 연치에도 사리가 분명하시고 합리적이시니 자네가 걱정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것이야. 그저 예에서 벗어나는 일만 없으면 될 걸세.”
엘센이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슈레디안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었다. 예상 그대로의 반응에 그는 치미는 웃음을 삼키고는 보란 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준비된 질문을 꺼냈다.
“지금 제일 걱정되는 것이 바로 그 예의란 것인데, 공주님을 뵙기 전에 인사하는 법이나, 그분 앞에서 하면 안 되는 짓 같은 걸 누가 알려주겠죠? 저자에서 굴러먹던 처지라 제가 가끔 할 말 안 할 말을 못 가려서요.”
“그건 걱정하지 말게. 해도 되는 건 가르쳐주지 않아도, 해서는 안 되는 건 지겨울 만치 세세하게 일러주더군. 그래도 걱정이 된다면 내 적당히 눈치를 주겠네.”
엘센은 그렇게 너스레를 떨고는 다시 본궁 쪽으로 먼저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는 엘센을 따라가며 생각에 잠겼다.
이스빌렌 영지에 도착한 이래로 감쪽같은 연기로 모두의 눈을 속여 온 슈레디안이었으나, 지금은 여느 때처럼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 위한 연기가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도 긴장하고 있었다.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플로베르나 아이네즈 앞에서 기억을 잃은 시늉을 했던 것이나, 엘센 앞에서 태연하게 몰락 귀족의 사생아 노릇을 한 것과 달리 에스피아는 세레즈의 왕위 계승자인 아체프렌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먼발치에서 몇 번 스치듯 만났다 해도 신경이 쓰일 법한 상황이거늘, 에스피아와 아체프렌은 유년기부터 서로의 성장 과정을 지켜봐 온 사이였다. 에스피아에게 있어 최초의 이성 친구는 자국민이 아닌 아체프렌이었듯, 그 점은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선왕께서 보위에 계시어 양국 사이가 지금처럼 험악하지 않았을 적에는 동갑내기 왕자와 공주 사이에 혼담이 조심스레 오가기도 했을 정도로 그들 사이에는 장구한 세월이 존재했다. 양국의 외교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자연스레 그들 사이도 소원해졌지만, 에스피아는 아체프렌에게 여러모로 상대하기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아이네즈의 도움 덕택에 머리 염색이 잘 되어 지금의 그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갈색 머리칼을 하고 있었지만, 눈썰미가 좋고 예리한 에스피아라면 얼굴 생김만으로도 그를 알아봤을 개연성은 충분했다.
슈레디안이 케타로스 영지에 표류한 지도 벌써 석 달이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에스피아에게도 그의 실종에 대한 정보가 입수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에스피아가 성안에서 저를 보았다면, 때마침 본인의 영지에 나타난 적국의 태자와 동일한 외모를 지닌 사내의 존재를 간과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에스피아가 자신을 알아보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의전행사가 없는 한 연병장에 들른 적이 없다던 에스피아가 며칠 전에는 이유조차 알리지 않은 채 한 식경 가까이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는 연병장 한 편에 우두커니 서서 신병 훈련을 지켜봤다고 하지 않던가. 그는 공주를 알아본 동료 몇이 흥분된 기색으로 속닥거리던 것을 상기했다. 그러니 그의 정체는 그때 들켰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터였다.
신중한 그녀가 알아보고서도 바로 움직이지 아니한 것은 본인의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외모가 닮았다 해도 실종이라 알려진 적대국의 왕위 계승자가 다른 곳도 아닌 하필 이스빌렌에, 그것도 하급 병졸의 모습으로 머물고 있는데, 그 사태를 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떠한 사유로도 받아들이기 어려우니만큼 본인이 잘못 보았겠거니 여기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웠으리라.
그러나 철두철미한 성정의 에스피아라면 잘못 보았다 생각을 하면서도 그에 대해 알아봤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에스피아는 세레즈에 대해서도, 실종된 아체프렌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가 연기하고 있는 슈레디안 크론케이터란 인물에 대해서도 그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임시방편으로 지어낸 섣부른 거짓말 따위가 그녀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정체에 대하여 한없이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하고 있을 에스피아 앞에서 저는 어찌해야만 하는가.
지금 그가 아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정체가 드러난다면 전쟁을 앞두고 포로로 사로잡혀 적대국에 유리한 패로 이용당하리라는 점, 그것 하나만은 분명했다.
세레즈의 왕위 계승자로서 국가와 백성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할 상황이 온다면, 기꺼이 웃으며 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작 이 정도 위기조차 스스로 헤쳐나가지 못하여,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 때문에 세레즈가 코네세타에 정치적 경제적 이권을 잃고 외교적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세레즈의 왕위 계승자인 것이 자랑스럽지 않은 적 없었던 그에게 있어 조국인 세레즈의 수치는 그 자신의 치욕보다 더 아픈 상처였다. 그에게는 언제나 나라의 명예가 개인의 자존심보다 우선이었다.
반드시 에스피아를 속이고 자력으로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온전히 그 일을 해내야만 그에게 만인지상의 왕좌에 앉을 자격이 있다 할 수 있으리라.
고민 끝에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아체프렌을 완전히 버리기로 다짐하였다. 그 스스로 지어낸 거짓말대로 몰락 귀족의 사생아이자 코네세타에서는 거리의 아이로 통하는 어리보기 슈레디안이 되는 것만이 현 사태에서 그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로 보였다.
어느새 본궁의 거대한 입구가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슈레디안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궁의 입구에는 보기만 해도 화려하다는 느낌이 절로 묻어나는 은백색의 휘장을 단 제복을 입은 친위대 소속의 젊은 장교가 서 있었다. 엘센은 지휘 체계상 상급자인 친위대 장교에게 절도있게 예를 표했다. 마찬가지의 자세로 인사를 받은 친위대 장교는 그들에게 다가오며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근위대 5분과 분대장 마크 엘센님과 슈레디안 크론케이터님이시지요. 저는 대공 전하의 친위대 소속 장교 란델 프레아제스라고 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소관이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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