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폭풍전야 2화 그윈 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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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폭풍전야
2. 그윈 재상
“주인님, 짐을 옮기는 일이 다 끝났습니다.”
세레즈의 도성 다이레비드의 외성 내에 있는 재상의 집무실에 들어선 그윈 가문의 집사 헤라스는 주인에게 정중하게 절을 올리며 운을 떼었다. 모처럼 여왕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거의 반년 만에 성도로 올라온 주인의 시중을 들기 위하여 그레안 영지에서부터 따라온 헤라스는 재상이 사적인 볼일을 이유로 자리를 비운 사이 가문의 하인들을 부려 도성 안 재상의 처소에 짐을 옮겨 놓는 일을 총괄했다. 사적인 용도로 쓰일 물건이라면 성 밖에 따로 마련된 재상관저에 두는 것이 통상적인 일일 것이나 그곳을 자주 이용하는 이는 그윈의 무남독녀인 스와닐다 공녀로, 재상 본인은 외성의 집무실을 더 편히 여겼다. 오랜 기간 그윈 가문에서 봉사하며 주인의 성향에 대해서는 아주 사소한 것마저 속속들이 간파하게 된 헤라스는 스와닐다의 옷가지와 장신구를 제외한 모든 물건을 이곳, 외성의 숙소로 미리 옮겨 놓았다.
“수고 많았네, 헤라스.”
“여기 물품의 상세 내역을 적은 표목이 있사오니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헤라스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하나하나 비교 확인한 물품 내역서를 주인에게 공손한 손놀림으로 전해 올렸다.
“자네의 일 처리는 늘 꼼꼼하군. 내 추후 살펴볼 테니. 먼저 조심해서 돌아가게나.”
“예, 주인님. 댁에는 언제쯤 돌아오실 예정이라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흐음. 그건 아직 확실히 모르겠군. 내 돌아가기 전에 인편을 보낼 터이니 그리 알아두라 이르게.”
“예, 그럼 돌아오실 때 뵙겠습니다.”
헤라스는 다시금 깊숙이 절을 하고는 물러갔다. 재상은 그가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물품 목록을 집어 들어 항목을 재차 확인해 나갔다.
먼저 자신과 스와닐다의 소지품이 마차 세 대가량이었고, 그중에서도 스와닐다의 옷가지와 장신구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윈 같은 수전노’라는 말이 왕국 내에 공공연히 나돌 만큼 그의 인색한 탐욕은 정평이 나 있었으나, 하나뿐인 외동딸에게는 신기하리만큼 후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나머지 마차 중 한 대에는 금화가 다섯 자루가 실려있었다. 그 정도면 적어도 반년 정도는 무리 없이 수도에 머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동안 약간만 손을 쓴다면 일 년 치의 체류 비용이 나올 만큼 돈을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영지 내에서 활동하는 닳아 빠진 상인들과 우는 소리 만큼은 기가 막힌 부농들과 비교한다면 체면치레에 급급한 수도의 귀족들은 오히려 상대하기 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수도에 올라온 것은 그런 자잘한 소일 때문이 아니었다.
재상은 마지막 마차에 실려있던 물품들의 항목을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점검했다. 차분히 목록을 훑어 내려가던 그의 눈길이 한 지점에서 머물렀다. 한동안 그 품목을 바라보고 있던 재상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책상 위에 놓인 펜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펜을 들어 해당 항목을 그어버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집무실 안의 서랍장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상자를 가져와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재상은 상자를 열어 우아한 광택의 붉은 비단보로 감싸인 물건을 바라보다가 문득 미간을 찌푸리며 상자를 닫았다.
“주인님, 폴트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재상이 막 상자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나머지 물품을 확인하기 위해 재차 목록에 손을 뻗었을 때, 문 너머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소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하인은 정중히 허리를 굽혀 보이곤 재상이 그에게 명한 소임에 대하여 고했다.
“분부대로 궁내부에 가서 폐하께 알현 신청을 하고 왔습니다.”
“그래, 궁내부에서는 뭐라더냐. 내 이른대로 여왕 폐하의 의사는 타진해 보고 왔느냐?”
재상은 목록에서 눈길을 떼어내지도 않은 채 되물었다.
“예. 폐하께서 알현을 허락하셨으니 오후에 다실로 듭시라 하더이다.”
일순 재상의 주름진 얼굴에 심술궂은 웃음이 스치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평소의 표정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다른 일은 없더냐.”
그윈은 살펴보던 물품 목록을 가지런히 접으며 책상에서 일어섰다.
“예, 달리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습니까. ”
낮게 되묻는 하인에게 그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다. 볼 일이 생기면 다시 부를 터이니 이만 물러가도록 해라.”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문밖으로 나서는 하인의 뒷모습에서 눈길을 떼어낸 재상은 현 상황을 무난히 타개해 나가기 위한 방책들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태자 아체프렌의 실종으로 인해 왕궁을 비롯한 세레즈 상류 사회가 온통 술렁거리고 있었지만, 사실 그런 문제 따위는 재상의 안중에도 없었다. 아체프렌이 있건 없건, 그에게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아체프렌이 있었을 때는 미래를 생각하여 일단 자신의 외동딸인 스와닐다와 태자의 약혼을 주선하여 성사시킨 그윈이었으나, 그의 생사마저 확실치 않은 이 시점에는 분명 여왕인 세느비엔느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간의 전후 사정을 살피건대 이제 아체프렌이 해상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만큼 확실해진 데다가, 평소 그토록 안타미젤을 보위에 올리고자 안달하였던 여왕이 이러한 천재일우의 기회를 가만히 두고 볼 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재상은 그 비극적인 사고의 배후 있는 것이 태풍이나 코네세타가 아닐 것이라 확신했지만, 재상은 이번에는 모르는 척 여왕의 손을 들어 주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감정적이고 의심이 많은 여왕이니만큼 그간 아체프렌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자신이 태도를 바꿔 그녀의 그늘에 깃들고자 한다 하여도 곧이곧대로 믿어주지 않을 공산이 컸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이번 알현이 더욱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작년에는 여왕을 조금 더 압박하여 스와닐다를 태자비로 만들지 못한 것이 아쉬웠는데 정황이 변하고 보니 당시 스와닐다와 아체프렌의 행사가 그저 약혼만으로 그친 것이 새삼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비록 스와닐다의 마음이 아직 아체프렌에게 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순진한 딸의 마음이야 언제든지 손쉽게 돌릴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하늘이 보호하심인지 안타미젤은 자신의 외동딸에게 희미하나마 어떤 특별한 감정을 보인 바 있었다. 어찌 보면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한 아체프렌보다는 손안에 넣고 주무를 수 있는 안타미젤 쪽이 왕위에 오르는 편이 그로서도 좋을지 몰랐다.
스와닐다 옆에 아체프렌 대신 안타미젤이 서게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재상은 책상 한편에 미뤄두었던 상자에 다시 한번 눈길을 던졌다. 여왕과의 자리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마련한 진상품의 매끄러운 표면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는 재상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 짙게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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