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개전 2화 어머니와 아들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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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어머니와 아들 上
안타미젤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 몸이 푹 잠길 만큼 푹신한 의자에 주저앉으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도착이 예상보다 훨씬 빨랐던 모양인지 당황한 궁내부 신료들이 몇 분 동안 여기저기로 연락을 취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궁내부 대신 프라이스 경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모습으로 안타미젤 앞으로 달려왔다. 안절부절못하며 일 초라도 빨리 여왕에게 그의 도착을 알리려 하는 궁내부 대신에게 안타미젤은 다른 영주들과 마찬가지로 폐하께 정식 접견을 신청하겠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릴 테니 접견이 받아들여지면 알리라고 명한 뒤 이곳으로 들어선 것이다.
안타미젤은 알현을 허가받을 때까지 천천히 기다리고자 앉은 자리에서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그가 미처 책의 첫 번째 장을 다 넘기기도 전에 대기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대공 전하.”
벌써 차를 내온 것인가. 책을 읽고 있던 안타미젤은 상대방의 음성에 이끌리듯 고개를 들었다.
“전하의 강건하신 모습을 다시 뵙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안타미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서 인사를 건넨 여인은 뜻밖에도 도성 다이레비드에 있는 이백여 명의 시녀들을 총괄하는 본궁의 시녀장 한나 레 란데 부인이었다.
“나 역시 도성에 도착하자마자 시녀장을 만나게 되어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현 여왕이 폰다 공녀라는 이름으로 이곳 다이레비드에 입궁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무려 십팔 년 동안 한결같은 태도로 그녀를 모셔왔던 이 노부인은 안타미젤에게도 유모나 다름이 없는 존재였다.
“기별을 좀 더 일찍 받았다면 다이레비드 성 밖에서 영접했을 것인데 이렇듯 본궁에서 전하께 인사를 올리게 되어 송구하기 그지없사옵니다.”
“무슨 말씀을요. 누구보다도 가까운 자리에서 어머님을 보필하여야 할 시녀장이 어찌 한 시라도 자리를 비울 수 있겠습니까.”
안타미젤은 웃는 낯으로 의젓하게 답했다. 젖내 풍기는 아기였을 때부터 안타미젤을 보아온 그녀에게는 실로 감회가 새로울 만한 성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약간 젖은 눈으로 자신의 소중한 왕자님을 바라보다가 그가 기다리고 있었을 소식을 전해주었다.
“폐하께서 접견 신청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전하를 응접실로 안내하라는 어명을 받았사오니 소인을 따라오시면 되옵니다.”
안타미젤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님께서 지금 응접실에 계시나요?”
“예, 전하. 폐하께서 그리로 듭시라 하셨나이다.”
안타미젤은 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 가까스로 삼켰다. 도성에 도착하면 자신을 맞이해 주곤 하였던 내실이 아니라 국왕 집무실 바로 옆에 달려있는 응접실로 오라고 한 것은 모친이 다른 이와의 접견 도중에 자신을 불러들였다는 의미였다.
모친의 교지를 받는 즉시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올 만큼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이야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그러한 욕망을 억누르고 가능하다면 어머니의 일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고 한 안타미젤이었다.
이제 그도 열네 살, 사랑하는 어머니가 한 나라의 군주이며, 자신이 사사로운 욕심에 따라 그녀를 독차지하고자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 만큼 성장하였다. 그렇기에 안타미젤은 비정상적으로 빨리 받아들여진 알현 신청의 의미를 절감할 수 있었고, 자신의 존재가 국가적 위기 사태를 맞이하여 여러모로 경황이 없을 모친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에 몹시도 착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공 전하?”
조심스러운 태도로 자신을 부르는 시녀장의 음성에 안타미젤은 무심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어디 편찮으신 곳이라도 있사옵니까?”
안타미젤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별일 아니니 개의치 마세요.”
일단 세느비엔느가 접견을 수락한 이상 어떠한 이유로든 안타미젤이 움직이지 않으면 시녀장인 란데 부인이나 궁내부의 시종 시녀들 같은 애꿎은 사람들이 그 뒷감당을 하게 된다. 전혀 잘못이 없는 그들이 공연히 고초를 겪게 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안타미젤은 응접실로 들어가야만 했다. 설령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기다리는 일이 생기더라도.
“어머님께서 여기에 계시다고 했지요?”
안타미젤은 자신을 향해 허리를 굽히는 두 명의 근위병에게 따스한 미소를 지어주고는 확인 차 시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예, 전하. 폐하께서 기다리실 터이니 어서 안으로 드소서.”
시녀장은 재빨리 근위병들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한 걸음 옆으로 물러 나왔다. 근위병들 역시 정중한 태도로 문을 열고 란데 부인처럼 옆으로 물러 나와 다시금 안타미젤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들을 뒤로하고 안타미젤은 응접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문이 열리자 응접실 중앙에 있는 탁자에 앉아 국무대신인 유크로젤 공과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던 세느비엔느의 시선이 문 쪽으로, 아니 안타미젤 쪽으로 옮겨왔다. 모친의 입가와 눈매에 온화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두 눈에 담은 안타미젤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폰다 영주 안타미젤 폰다 벤 세레즈, 폐하를 뵈옵니다.”
“오, 이제 왔느냐. 안타미젤.”
“예, 폐하.”
반가움에 넘치는 세느비엔느의 목소리가 무색해지리만큼 안타미젤은 모친을 꼬박꼬박 폐하라고 불렀다.
“신 폰다 영주, 폐하의 교지를 받들어 도성에 도착했음을 보고 드리고자 이렇듯 알현을 청하였습니다.”
세느비엔느의 뒷말을 차단하듯 안타미젤은 모친에게 시선을 떼어내어 그 옆에 묵묵한 표정으로 서 있는 국무대신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들어오는 것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선 국무대신은 무표정한 얼굴만큼이나 무뚝뚝한 태도로 고개 숙여 장황한 인사말을 대신했다. 안타미젤 역시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다시 눈길을 세느비엔느에게 돌렸다.
“신이 아둔하여 폐하께서 국정을 살피시는 도중에 들어오는 우를 범했사옵니다. 폐하께서 소신의 무례를 용서하신다면 대기실에서 정무를 살피시는 것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 하옵니다만, 허락하여 주시겠나이까?”
나가서 기다리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자 자신을 일부러 어머니가 아닌 폐하라고 칭하는 어린 아들의 심사야 처음부터 꿰뚫어 보고 있었지만, 세느비엔느의 녹색 눈동자에는 어찌할 수 없는 서운함이 조금씩 녹아들고 있었다.
“그럴 필요 없단다.”
탁자에서 몸을 일으킨 세느비엔느는 응접실 한쪽의 의자를 가리키며 따스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이제 곧 끝나니 거기 앉아서 잠시 기다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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