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2장 애별리고 1화 마음의 향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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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2장 애별리고愛別離苦
1. 마음의 향방
“슈레디안, 혹시 검 같은 거 다룰 줄 알아요?”
다락방으로 통하는 사다리를 수리하는 데에 여념이 없던 슈레디안은, 뜻밖의 물음에 움직임을 멈추고 식탁 위에 장바구니를 풀어놓고 있는 아이네즈를 쳐다보았다.
장작 패기나 그릇 닦기 같은 일상적인 일조차 서투르기 짝이 없던 자신이 태연하게 검은 다룰 줄 안다고 바로 답하는 것도 이상할 듯하여 그저 가볍게 고개를 저을 생각이었으나, 아이네즈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입에 물고 있던 작은 나이프를 손으로 옮기며 짧게 답했다.
“잘 모르겠는데, 그건 왜요?”
“성에서 경비병을 구한다네요.”
“그런 건 통상 연초에 하지 않나요? 추가로 또 뽑는다고요?”
슈레디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아직 상반기였다. 일반적으로 영주들은 세수에 가장 커다란 몫을 차지하는 농사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하여 추수가 끝날 무렵 모병 공고를 붙이고 농한기인 겨울에 선발 시험을 치르곤 했다. 병력 증강이 필요한 특별한 사정이 생기지 않고서야 한참 씨앗 뿌리기에 바쁠 지금은 신병을 모집할 때가 아니었다.
마주 대할 수 있는 이가 한정되어 있다는 점은 이럴 때 좀 곤란했다. 궁금한 일이 생겨도 그가 접할 수 있는 정보원이라고는 사나흘에 한 번씩 장에 가는 아이네즈가 전부였다. 그녀가 전해주는 몇 마디 말만이 주변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아, 얼마 전에 시장 쪽에 큰불이 나서 불길을 잡느라고 경비병 몇이 다쳤대요. 그래서 빈 자리를 채우느라고 그러나 봐요.”
“그렇군요.”
슈레디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냉정하게 돌이켜보니 자신이 지나치게 앞서 나간 것 같기도 했다. 뮤즈 마을이 속해있는 케타로스 영지는 군도 국가인 코네세타에서도 최남단에 속하는 섬 위에 있었다.
아이네즈 부녀의 도움으로 그가 의식을 찾은 지 이제 겨우 한 달이 조금 더 지났을 따름이다. 자신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이야 이미 세레즈 조정 및 왕실에 전해졌겠지만, 그 사고에 대해 왕실 차원에서 공식 발표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정 대신들을 소집하고 주요 귀족들의 중론을 모아야 했다. 그렇다는 것은 세레즈가 그의 실종에 대하여 코네세타에 어떤 대응을 하고, 그것이 소문의 형식을 띠고 이 궁벽한 시골까지 전해지려면 얼추 반년은 지나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물론 그때까지 이곳에 틀어박혀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번 일을 기회 삼아 밖으로 나서는 것도 나쁘지 않았으나, 그는 아이네즈의 물음에 잘 모르겠다고 답한 것에 맞춰 일단은 조금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의중을 감춘 채 상대의 예상대로 움직여주는 것쯤이야 의지할 바람막이조차 없이 파란 많은 왕궁에서 자라온 그에게는 하등 어려울 것이 없는 일이었다.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과연 내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마 채용 전에 시험을 보겠죠?”
“그건 그렇겠죠. 혹시 시험이 많이 신경 쓰이나요?”
아이네즈는 식탁에 앉아 채소를 다듬으며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그녀가 그리 묻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슈레디안은 그동안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궁금해질 만큼 일상적인 일조차 스스로 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영리하고 순발력이 있어 한 번 가르쳐주면 금방 몸에 익히긴 했지만, 아주 어린 아이조차 수월하게 해내는 일조차 처음 보고 겪는다는 듯 구는 그 때문에 아이네즈는 내심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이네즈는 슈레디안을 대할 때마다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늘 상기하려 애썼다. 그러면 그의 철없는 투정도, 서툰 몸짓도, 묘하게 자기중심적인 말투도,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신경질적이 되는 성격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이네즈는 어리고 아픈 아이를 대하는 어미처럼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어진 그녀의 목소리는 상대에게 부담이 될 만큼 과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의지가 될 수 있을 만큼 따스한 울림을 드리우고 있었다.
“굳이 평가받는다고 여기지 말고, 슈레디안이 할 수 있을지 어떨지 한 번쯤 알아본다는 기분으로 접해보면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기실 슈레디안이 시험을 근심한 까닭은 쓸데없이 잘해서 공연히 눈에 띄게 될까 싶어서였으나 조용히 사다리로 눈을 돌리며 동조를 표했다.
“틀린 말은 아니군요. 게다가 제가 조금이라도 빨리 떠나는 편이 여러모로 좋을 테니까요.”
양파의 껍질을 까던 아이네즈의 손이 멈칫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해요?”
이럴 때 이곳에서 지내는 게 불편하냐고 돌려 묻지 않는 점이 아이네즈다웠다. 슈레디안은 난로 옆에 쌓여있던 그물 조각 뭉치를 들고 와 사다리의 거친 표면을 문지르며 망설이는 기색으로 답했다.
“언제까지나 여기에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제가 여기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폐를 끼치게 될 텐데요.”
“폐라면 지금까지도 충분히 끼쳤잖아요.”
슈레디안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그물 조각을 떨어뜨리고 아이네즈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그에게 눈도 돌리지 않은 채 느릿한 어조로 덧붙였다.
“나는 그게 폐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슈레디안은 한숨을 내뱉으며 사다리 손질을 포기하고 그 옆에 주저앉은 채, 아이네즈의 빠른 손놀림을 멍하니 지켜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성별을 떠나서 아이네즈만큼 그를 당혹스럽게 한 자는 없었다.
세레즈의 왕위 계승자로서 그는 늘 자신만만하고 능수능란했다. 그것은 끊임없이 그를 제거하기 위한 간계를 꾸며온 계모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그가 아이네즈 앞에서만 서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애처럼 변해 버렸다. 그것은 비단 손에 익지 않은 가사 때문이 아니었다.
해본 적이 없어서 익숙하지 않은 것이야 배우면 그만이었다. 그간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익히지 아니하였지만,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인 기술이 된 이상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며 익히기를 거부할 만큼 그는 아둔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밭을 매거나 장작을 해오거나 집안의 가구를 수리하는 법을 배웠으며, 아이네즈를 도우며 끼니를 준비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고, 식용의 과실과 약초와 독초를 구분하는 방법같이 생존에 필수적인 지식과 능력을 차례로 갖추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한 달 전과 마찬가지로 그는 사고방식도, 가치관도 완전히 다른 이 여인 앞에서 여전히 무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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