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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연

왕도와 패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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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19.04.01 11:16
최근연재일 :
2020.02.09 22:13
연재수 :
271 회
조회수 :
116,488
추천수 :
2,679
글자수 :
1,047,762

작성
19.05.15 09:54
조회
449
추천
10
글자
7쪽

11장 분열의 조짐 5화 패퇴

DUMMY

5. 패퇴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이 매우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가만히 숨을 내쉬기만 해도 후끈한 열기가 온몸을 감싼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착용한 금속 보호대가 맹렬한 땡볕 속에서 팔팔 끓어오른다. 무겁고 뜨겁다. 지금 당장이라도 벗어 던지고 싶다. 투구 속에 가려져 있는 얼굴에서 쉴새 없이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소속 보병대의 여섯 번째 열에 있는 이 병사의 귓가에 와 닿는 것은 전장의 먹먹한 소음뿐이다. 이동하고 있는 거대한 방진의 한 가운데서, 절반은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등을 떠미는 동료들의 힘에 밀려 전진하고 있는 병사 타이너의 입술은 진작부터 긴장과 공포로 메말라 있었다. 그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을 들어 전방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밟고 있는 지면이 울리고 있다. 노도와 같이 몰아쳐 오는 코네세타 군의 말발굽 아래 땅이 진동하고 있었다. 말발굽 아래 피어오르는 땅 먼지가 땀과 눈물로 흐려진 그의 시야를 가득 메운다. 하늘을 울리는 듯한 적군의 거대한 함성이 먹먹해진 귓전을 때린다. 서 있는 다리에 힘이 쭉 빠져나간다.


‘싫어. 이대로 몸을 돌려 도망갈 수만 있다면.’


하지만 등 뒤는 아군으로 빽빽하게 막혀있다. 이대로 전진하면 적의 말발굽에 짓이겨질 것이고, 도망가려 한다면 아군에게 밟혀 죽으리라. 오도 가도 못 하는 처참한 상황 속에서 그는 후들거리는 손가락으로 들려있는 창을 불끈 쥐었다.


전진이 멈추었다. 순식간에 육박해 들어온 적의 기병대와 아군 보병대 선진 간에 백병전이 벌어진 모양이지만, 차마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펴볼 용기 따윈 나지 않는다. 벌려진 입술 새로 희미한 피비린내가 스민다. 밀집된 진형 안에서 자신의 어깨에 동료의 어깨가 닿는 게 느껴진다. 두꺼운 갑옷과 갑옷 사이에 그의 떨림이 미세하게나마 전해진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격하게 뛴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녹아내릴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갑옷과는 달리, 그의 등줄기에는 오싹한 한기와 함께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앞의 대열이 무너진다. 확 트인 시야 가운데, 타이너는 적의 기병대 무리 속에서 자신을 짓뭉개버릴 것처럼 다리를 들어 올린 말 한 마리를 본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본능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창끝에 묵직하면서도 투박한 뭔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닿는다. 조심스럽게 뜬 눈앞으로 자신 앞에 있던 그 말의 한 다리가 잘려나간 게 언뜻 비친다. 이내 무너지듯 자빠지는 말허리에 올라타고 있던 기병이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하고 옆 말의 다리 사이로 굴러 떨어지는 게 보인다.


등 뒤로부터 번개처럼 날아온 아군의 화살이 그 뒤에 있던 녀석의 이마에 적중한다. 미끄러지듯 엎어진 주인을 실은 말은 멈추지 않고 앞에 있는 것들을 밟아버릴 것처럼 무서운 기세로 솟구쳐 오른다.


그는 전력을 다해 창을 말의 다리 사이로 찔러 넣었다.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끔찍한 말 울음이 하늘 높이 울려 퍼진다. 뽑혀 나오는 창을 따라 솟구치는 핏줄기가 미처 피하지 못한 그의 투구에 묻어난다. 망막을 메우는 붉은 액체. 비릿한 피내음이 콧속을 강하게 후벼판다. 토할 것만 같다. 비척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타이너의 귓가에 칼날처럼 날카로운 분대장의 명령이 꽂힌다.


"후퇴해! 후퇴!! "


타이너는 아군과 적군 가릴 것 없이 뒤섞여 있는 난전 가운데서, 조금이라도 안정권으로 들어가기 위해 헉헉대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길을 뚫고자 자신이 미친 듯이 휘둘러대는 창 끝에 뭐가 닿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적군이건, 말이건, 그게 설령 동료 병사라 해도 이미 하얗게 변해버린 그의 머리에는 와 닿지 않았을 것이다.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 온 몸의 신경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다. 살고 싶다. 단 일 분이라도 더. 어떻게 해서든 이 순간을 이겨내고, 살아남고자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타이너의 어깨 쪽으로 누군가의 몸체가 쓰러진다. 마치 상체가 바위로 짓눌리는 느낌이다.


타이너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몸의 중심을 잡았다. 여기서 쓰러지면, 후퇴하는 아군에게 짓밟힌다. 그는 이를 악물며 손으로 자신의 몸에 기대고 있는 아군 병사의 시신을 떠밀었다. 순식간에 쓰러진 동료 병사의 몸체 위에 수십여 개의 발자국이 남는다. 머릿속이 어지럽다. 속이 뒤집혔다. 타이너는 눈을 질끈 감으며 앞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여기서 죽어선 안 돼. 죽을 수 없어. 그는 위태롭게 비틀대면서도 창을 쥐고 있는 손아귀가 으스러지도록 힘을 주었다.


후퇴하는 아군을 향해 코네세타 군이 궁수 부대를 동원하여 활을 날린다. 등 뒤에서 거대한 화살이 빗발친다. 하지만 차마 뒤돌아볼 용기도 여력도 없다. 그는 거의 반사신경에 몸을 내맡기며 앞으로 달리고 달렸다.


"세레즈 군을 밟아라! "


먹먹한 소음 가운데서도, 적장의 목소리만큼은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와 닿는다. 이어서 터져 나오는 우레와 같은 적의 함성에 타이너는 순간 발이 땅바닥에 굳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포위당했다! 전군, 밀집대형!! "


찢어질 듯한 분대장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이미 이성 따위는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타이너는 분대장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옆으로 뒹굴었다. 비틀대며 일어선 그가 가까스로 화살을 피했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려던 찰나 날카로운 검날이 눈앞을 스쳐 간다.


복부에 느껴지는 뜨거운 기운에 그는 흠칫했다. 물론 아프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이미 들어 안다. 전장에서는 부상 정도를 알 수 없다. 아픔이란 건 결국 긴장이 풀린 다음에 몰려오는 것이므로.


타이너는 아까 바닥에 뒹굴면서도 놓지 않고 있던 창을 떨어뜨리고 두 손을 복부 쪽으로 가져간다. 손가락이 배에 닿자 깨끗하게 절단된 금속 보호대가 툭 하고 발등 위에 떨어진다. 종전과 마찬가지로 아픔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들어 올린 손아귀에 끈적거리는 피가 뭉클하게 묻어 나온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나온다. 그는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시야를 아래쪽으로 떨구었다. 배어 나온 핏덩이 사이로 흘러나온 내장의 일부가 보인다. 벌려진 그의 입술에서 처절한 절규가 터져 나온다.


다리에 힘이 쭉 빠져나가며 그는 미끄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차츰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분대장의 외침 소리가 흩어지고 있었다.


"퇴각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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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12장 전장에 핀 꽃 7화 지원군의 본진 합류(12장 인명록) 19.05.23 414 10 9쪽
74 12장 전장에 핀 꽃 6화 출격요청 19.05.22 613 9 8쪽
73 12장 전장에 핀 꽃 5화 전장의 꽃 19.05.21 434 10 7쪽
72 12장 전장에 핀 꽃 3-4화 이반의 조짐 19.05.20 536 12 10쪽
71 12장 전장에 핀 꽃 2화 불꽃 같은 여인 19.05.19 425 8 8쪽
70 12장 전장에 핀 꽃 1화 굳건한 성벽 19.05.18 452 8 8쪽
69 11장 분열의 조짐 7-8화 최종단안(11장 인명록) 19.05.17 440 9 12쪽
68 11장 분열의 조짐 6화 뮤켄의 충고 19.05.16 503 8 9쪽
» 11장 분열의 조짐 5화 패퇴 19.05.15 450 10 7쪽
66 11장 분열의 조짐 3-4화 양동작전 19.05.14 428 10 10쪽
65 1부 11장 분열의 조짐 1-2화 후방기지 괴멸 소식 19.05.13 510 9 11쪽
64 10장 진흙 속의 연꽃 7화 투항 제의 (10장 인명록) 19.05.09 464 8 13쪽
63 10장 진흙 속의 연꽃 5-6화 접전 19.05.08 518 8 7쪽
62 10장 진흙 속의 연꽃 4화 적의 공격에 대처하는 각자의 자세 19.05.07 464 8 8쪽
61 10장 진흙 속의 연꽃 3화 후방기지 카르테 19.05.07 482 7 7쪽
60 10장 진흙 속의 연꽃 2화 이해 19.05.07 479 8 8쪽
59 1부 10장 진흙 속에 핀 연꽃 1화 불만 19.05.07 524 6 7쪽
58 9장 전설의 시작 7화 조력요청(9장 인명록) 19.05.06 523 7 12쪽
57 9장 전설의 시작 5-6화 전후처리 19.05.06 568 8 12쪽
56 9장 전설의 시작 4화 최초의 승리 19.05.06 550 7 11쪽
55 9장 전설의 시작 3화 교전 19.05.05 516 9 9쪽
54 9장 전설의 시작 2화 기습 19.05.04 503 12 9쪽
53 9장 전설의 시작 1화 위장잠입 19.05.03 496 8 10쪽
52 8장 효시 7화 작전계획(8장 인명록) 19.05.02 556 11 12쪽
51 8장 효시 6화 용기, 혹은 이길 수 있다는 신념 19.05.02 539 8 11쪽
50 8장 효시 5화 아나브릴 방어군에서 얻은 정보 19.05.02 485 9 9쪽
49 8장 효시 3-4화 사령관과 참모장 19.05.01 508 11 13쪽
48 8장 효시 2화 전장의 밤 19.05.01 533 10 11쪽
47 8장 효시 1화 행군시작 19.04.30 560 12 11쪽
46 7장 전환점 7화 최초의 동료(7장 인명록) 19.04.30 568 8 11쪽
45 7장 전환점 6화 입바른소리 19.04.29 538 11 8쪽
44 7장 전환점 5화 보이지 않는 벽 19.04.29 557 11 7쪽
43 7장 전환점 4화 출전령 19.04.28 571 10 7쪽
42 7장 전환점 3화 하크스 지원군 19.04.28 647 11 9쪽
41 7장 전환점 2화 정치적 포석 19.04.27 609 12 10쪽
40 1부 7장 전환점 1화 연전연패 19.04.27 579 11 8쪽
39 6장 개전 8화 승진 거절(6장 인명록) 19.04.26 585 11 8쪽
38 6장 개전 7화 뮤켄장군 19.04.26 631 13 9쪽
37 6장 개전 6화 개전 이후 19.04.25 572 9 7쪽
36 6장 개전 5화 선제공격 19.04.25 625 10 7쪽
35 6장 개전 4화 선전포고 19.04.24 638 13 7쪽
34 6장 개전 3화 어머니와 아들 下 19.04.24 572 16 11쪽
33 6장 개전 2화 어머니와 아들 上 19.04.23 597 12 7쪽
32 1부 6장 개전 1화 진상규명요구 19.04.23 630 10 11쪽
31 5장 태풍의 눈 8화 안타미젤의 결심(5장 인명록) +2 19.04.22 695 15 12쪽
30 5장 태풍의 눈 6-7화 안타미젤 왕자 19.04.22 697 10 8쪽
29 5장 태풍의 눈 5화 계륵과도 같은 패 19.04.21 633 12 9쪽
28 5장 태풍의 눈 3-4화 충성서약 19.04.21 734 11 13쪽
27 5장 태풍의 눈 2화 사직서의 파장 19.04.20 743 14 11쪽
26 1부 5장 태풍의 눈 1화 사직원 19.04.19 743 15 7쪽
25 4장 부위정경 7화 생존전략(4장 인명록) 19.04.19 752 16 16쪽
24 4장 부위정경 6화 속고 속이는 싸움 19.04.18 763 19 10쪽
23 4장 부위정경 5화 기만 19.04.18 871 14 13쪽
22 4장 부위정경 4화 공주의 부름 19.04.17 821 19 10쪽
21 4장 부위정경 3화 거리의 아이 19.04.17 852 18 10쪽
20 4장 부위정경 2화 세레즈의 물밑 접촉 19.04.16 829 20 7쪽
19 1부 4장 부위정경 1화 코네세타의 공주 19.04.15 868 19 10쪽
18 3장 폭풍전야 6화 주전론을 위한 막후교섭(3장 인물소개) 19.04.14 906 21 12쪽
17 3장 폭풍전야 4화 밀실정치 下 +2 19.04.13 1,013 21 7쪽
16 3장 폭풍전야 3화 밀실정치 上 +2 19.04.12 1,002 23 7쪽
15 3장 폭풍전야 2화 그윈 재상 19.04.11 1,048 23 8쪽
14 1부 3장 폭풍전야 1화 태자의 실종 19.04.10 1,192 21 11쪽
13 2장 애별리고 7화 이별(1-2장 인물소개) +4 19.04.10 1,199 33 8쪽
12 2장 애별리고 6화 고작 마음 하나 +2 19.04.09 1,252 21 9쪽
11 2장 애별리고 5화 이주명령 19.04.09 1,399 26 9쪽
10 2장 애별리고 4화 떨림과 설렘 +4 19.04.07 1,392 25 7쪽
9 2장 애별리고 3화 염색 +2 19.04.05 1,470 24 7쪽
8 2장 애별리고 2화 현기증 +2 19.04.04 1,484 28 7쪽
7 1부 2장 애별리고 1화 마음의 향방 19.04.03 1,534 26 7쪽
6 1장 표류 6화 자각 +2 19.04.03 1,647 32 7쪽
5 1장 표류 5화 바다를 닮은 여인 +6 19.04.02 2,069 33 8쪽
4 1장 표류 4화 슈레디안의 고민 19.04.01 2,284 37 8쪽
3 1장 표류 3화 3년만의 손님 19.04.01 2,634 34 7쪽
2 1장 표류 2화 신분 은폐 19.04.01 3,541 46 7쪽
1 <제1부 펜데스칼 전쟁> 제1장 표류 1화 난파당한 청년 +4 19.04.01 6,791 6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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