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분열의 조짐 5화 패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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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패퇴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이 매우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가만히 숨을 내쉬기만 해도 후끈한 열기가 온몸을 감싼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착용한 금속 보호대가 맹렬한 땡볕 속에서 팔팔 끓어오른다. 무겁고 뜨겁다. 지금 당장이라도 벗어 던지고 싶다. 투구 속에 가려져 있는 얼굴에서 쉴새 없이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소속 보병대의 여섯 번째 열에 있는 이 병사의 귓가에 와 닿는 것은 전장의 먹먹한 소음뿐이다. 이동하고 있는 거대한 방진의 한 가운데서, 절반은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등을 떠미는 동료들의 힘에 밀려 전진하고 있는 병사 타이너의 입술은 진작부터 긴장과 공포로 메말라 있었다. 그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을 들어 전방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밟고 있는 지면이 울리고 있다. 노도와 같이 몰아쳐 오는 코네세타 군의 말발굽 아래 땅이 진동하고 있었다. 말발굽 아래 피어오르는 땅 먼지가 땀과 눈물로 흐려진 그의 시야를 가득 메운다. 하늘을 울리는 듯한 적군의 거대한 함성이 먹먹해진 귓전을 때린다. 서 있는 다리에 힘이 쭉 빠져나간다.
‘싫어. 이대로 몸을 돌려 도망갈 수만 있다면.’
하지만 등 뒤는 아군으로 빽빽하게 막혀있다. 이대로 전진하면 적의 말발굽에 짓이겨질 것이고, 도망가려 한다면 아군에게 밟혀 죽으리라. 오도 가도 못 하는 처참한 상황 속에서 그는 후들거리는 손가락으로 들려있는 창을 불끈 쥐었다.
전진이 멈추었다. 순식간에 육박해 들어온 적의 기병대와 아군 보병대 선진 간에 백병전이 벌어진 모양이지만, 차마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펴볼 용기 따윈 나지 않는다. 벌려진 입술 새로 희미한 피비린내가 스민다. 밀집된 진형 안에서 자신의 어깨에 동료의 어깨가 닿는 게 느껴진다. 두꺼운 갑옷과 갑옷 사이에 그의 떨림이 미세하게나마 전해진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격하게 뛴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녹아내릴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갑옷과는 달리, 그의 등줄기에는 오싹한 한기와 함께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앞의 대열이 무너진다. 확 트인 시야 가운데, 타이너는 적의 기병대 무리 속에서 자신을 짓뭉개버릴 것처럼 다리를 들어 올린 말 한 마리를 본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본능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창끝에 묵직하면서도 투박한 뭔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닿는다. 조심스럽게 뜬 눈앞으로 자신 앞에 있던 그 말의 한 다리가 잘려나간 게 언뜻 비친다. 이내 무너지듯 자빠지는 말허리에 올라타고 있던 기병이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하고 옆 말의 다리 사이로 굴러 떨어지는 게 보인다.
등 뒤로부터 번개처럼 날아온 아군의 화살이 그 뒤에 있던 녀석의 이마에 적중한다. 미끄러지듯 엎어진 주인을 실은 말은 멈추지 않고 앞에 있는 것들을 밟아버릴 것처럼 무서운 기세로 솟구쳐 오른다.
그는 전력을 다해 창을 말의 다리 사이로 찔러 넣었다.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끔찍한 말 울음이 하늘 높이 울려 퍼진다. 뽑혀 나오는 창을 따라 솟구치는 핏줄기가 미처 피하지 못한 그의 투구에 묻어난다. 망막을 메우는 붉은 액체. 비릿한 피내음이 콧속을 강하게 후벼판다. 토할 것만 같다. 비척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타이너의 귓가에 칼날처럼 날카로운 분대장의 명령이 꽂힌다.
"후퇴해! 후퇴!! "
타이너는 아군과 적군 가릴 것 없이 뒤섞여 있는 난전 가운데서, 조금이라도 안정권으로 들어가기 위해 헉헉대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길을 뚫고자 자신이 미친 듯이 휘둘러대는 창 끝에 뭐가 닿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적군이건, 말이건, 그게 설령 동료 병사라 해도 이미 하얗게 변해버린 그의 머리에는 와 닿지 않았을 것이다.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 온 몸의 신경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다. 살고 싶다. 단 일 분이라도 더. 어떻게 해서든 이 순간을 이겨내고, 살아남고자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타이너의 어깨 쪽으로 누군가의 몸체가 쓰러진다. 마치 상체가 바위로 짓눌리는 느낌이다.
타이너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몸의 중심을 잡았다. 여기서 쓰러지면, 후퇴하는 아군에게 짓밟힌다. 그는 이를 악물며 손으로 자신의 몸에 기대고 있는 아군 병사의 시신을 떠밀었다. 순식간에 쓰러진 동료 병사의 몸체 위에 수십여 개의 발자국이 남는다. 머릿속이 어지럽다. 속이 뒤집혔다. 타이너는 눈을 질끈 감으며 앞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여기서 죽어선 안 돼. 죽을 수 없어. 그는 위태롭게 비틀대면서도 창을 쥐고 있는 손아귀가 으스러지도록 힘을 주었다.
후퇴하는 아군을 향해 코네세타 군이 궁수 부대를 동원하여 활을 날린다. 등 뒤에서 거대한 화살이 빗발친다. 하지만 차마 뒤돌아볼 용기도 여력도 없다. 그는 거의 반사신경에 몸을 내맡기며 앞으로 달리고 달렸다.
"세레즈 군을 밟아라! "
먹먹한 소음 가운데서도, 적장의 목소리만큼은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와 닿는다. 이어서 터져 나오는 우레와 같은 적의 함성에 타이너는 순간 발이 땅바닥에 굳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포위당했다! 전군, 밀집대형!! "
찢어질 듯한 분대장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이미 이성 따위는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타이너는 분대장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옆으로 뒹굴었다. 비틀대며 일어선 그가 가까스로 화살을 피했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려던 찰나 날카로운 검날이 눈앞을 스쳐 간다.
복부에 느껴지는 뜨거운 기운에 그는 흠칫했다. 물론 아프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이미 들어 안다. 전장에서는 부상 정도를 알 수 없다. 아픔이란 건 결국 긴장이 풀린 다음에 몰려오는 것이므로.
타이너는 아까 바닥에 뒹굴면서도 놓지 않고 있던 창을 떨어뜨리고 두 손을 복부 쪽으로 가져간다. 손가락이 배에 닿자 깨끗하게 절단된 금속 보호대가 툭 하고 발등 위에 떨어진다. 종전과 마찬가지로 아픔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들어 올린 손아귀에 끈적거리는 피가 뭉클하게 묻어 나온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나온다. 그는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시야를 아래쪽으로 떨구었다. 배어 나온 핏덩이 사이로 흘러나온 내장의 일부가 보인다. 벌려진 그의 입술에서 처절한 절규가 터져 나온다.
다리에 힘이 쭉 빠져나가며 그는 미끄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차츰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분대장의 외침 소리가 흩어지고 있었다.
"퇴각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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