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전장에 핀 꽃 2화 불꽃 같은 여인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2. 사비에, 불꽃 같은 여인
문을 가로막은 천을 걷어 젖히며 듀론의 막사 안으로 들어선 클리어트는 순간 멈칫하고 그 자리에 섰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막사이니 만큼 당연히 아무도 없어야 할 터인데, 사람이 있다. 그뿐 아니라, 클리어트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그 사람은 여자였던 것이다. 군대의 막사 안에 여자, 그것도 젊은 여자라니. 클리어트는 잠시 터무니없는 괴리감에 얼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슨 일인가? "
여인은 대답 없이 머리를 약간 숙여 보이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언뜻 보아도 높은 계급일 게 분명한 그에게 하나뿐인 의자를 양보하는 몸짓이었지만 클리어트는 그 당연한 예의 표시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여기는 민간인 출입 금지 구역이다. 알지 못했나? "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만. "
여자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고 클리어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짙은 갈색 눈동자와 이상하리 만치 붉은 입술이 부담스럽도록 강렬한 인상을 던져주는 얼굴이다.
"그렇다면 이 곳에서 대체 뭘 하고 있나. 무슨 볼일인가? "
스스로도 지나치다 생각될 만큼 엄숙한 목소리. 잠시 멍한 표정으로 클리어트를 바라보던 그녀의 입가가 약간 비틀어지며 엷은 웃음기가 떠오른다.
"막사 주인의 볼일이십니다.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건 아니건 저야 부르심을 받으면 와야 하는 몸이니까요. 오늘은 연락이 엇갈려서 잠시 비만 긋고 돌아가려던 참입니다만, "
그녀는 검은 치맛자락을 벌리면서 약간 과장스럽게 허리를 굽혔다.
"꾸중을 듣게 되니 송구스럽습니다. 비천한 군창(軍娼)은 물러가겠습니다. "
정중한 말투와는 달리, 그녀는 고개를 반듯이 세운 채 빠르고 꼿꼿한 걸음걸이로 그의 옆을 지나쳐 막사 밖으로 걸어 나갔다. 비 냄새에 섞여 끈끈하게 물기 서린 여자의 체취가 순간 코끝으로 확 끼쳐온다. 자기도 모르게 휘청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은 클리어트는 잠시 멍한 눈초리로 여자가 사라진 막사의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을 때 그는 그 서슬에 의자가 밀려 넘어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듀론이 돌아오면 당장 내게 오라고 전해라. "
막사 주변에서 젖은 장작에 불을 피우기 위해 애쓰는 병사들에게 내뱉듯이 명령을 던져놓고 그는 자신의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빗방울은 한결 약해져 있었지만 걸음 걸음 그의 얼굴을 때리며 차가운 기운을 전해주기에는 충분했다.
도대체가, 전시 한가운데인 데다 바로 며칠 전에 첸트로빌 성 공략이 그처럼 어이없게 실패로 돌아갔는데 여자라니, 당치도 않은 일이다. 시원스럽지는 못해도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장수임을 인정해 왔건만, 대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장군의 신분으로 앞장서서 군창의 계집들과 놀아나다니!
듀론 장군은 내일 저녁나절에나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보고에 짜증스럽게 알았다고 대꾸한 후 그의 막사에서 가져온 보급품 일지와 기타 서류를 뒤적여 본진에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면서도 클리어트는 계속해서 속으로 그에 대한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왜 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했지? 생각해 보면, 그 여자의 옷차림이나 화장에는 분명히 사창가 계집들의 특징이 있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라고는 하지만 클리어트 정도의 군 경험이 있다면 충분히 눈치챌 수 있는 일이다. 거기에 대고 엄숙하게 문책을 한 셈이 되었으니, 남의 경험담이라면 그 자신도 비웃어 주었으리라. 그 행동이 스스로에 대한 모욕이 될 듯 하여 억지로 참고 있었지만, 사실 그는 이라도 한 번 부드득 갈고 싶은 심정이었다.
"건방진 계집년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미처 인식하지 못하던 일이지만, 그 여자는 명백하게 그를 바보 취급하며 막사를 나간 것이다. 그 붉은 입술에 떠오르던 비틀어진 미소가 뇌리에 달라붙어 떠나지를 않는다. 클리어트는 어느새 듀론에 대한 비난이 그 여인에 대한 생각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는 부관을 불렀다.
"부대밖에 군창이 머물고 있나? "
"예? 아, 예. 물론. 군대가 머무는 곳에는 없었더라도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패거리가 한 두서너 개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
카데닐은 잠시 젊은 상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오랜 대치 상황에서는 부대의 사기에도 영향을 주므로, 설령 불쾌하시더라도 퇴거 명령은 내리시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여자들의 건강이나 위생 상태는 엄중히 단속시키도록 참모부에도 일러두고 있습니다. "
"···포주는 믿을 만한 자인가? 이곳은 적지다. 여자들이 부대 안을 마음대로 들락날락하게 해서 좋을 일이 없을 텐데. "
"거의가 전쟁통에 징발되거나 팔려 나온 천민 출신이라 그런 정도의 주변머리도 되지 못합니다. 포주는 코네세타에서부터 따라온 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직접 만나 보시겠습니까? "
"아니. 됐다. "
그는 고개를 저으며 짜증스럽게 말을 이었다.
"여자 하나 보내라고 직접 부를 것까지야 없겠지. "
"예? "
부관은 당황한 표정으로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내 막사로 아무나 한 명만 보내달라고 이르게. "
"···예, 하지만, 그런 여자를 대체 뭣에 쓰시려고······. "
"자넨 군창을 어디에다 쓰는가? "
짜증 섞인 일침을 받은 카데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상관을 바라보다가 급히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클리어트는 서류를 책상 위에 던져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안쪽으로 들어섰다. 문을 가로막은 천을 걷어 올리는 행동이 아까의 상황과 묘하게 겹쳐진다.
‘천박스럽지는 않았거든.’
그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아마도 그 이유 때문일 거다. 강렬하고 어딘지 부담스러울 만큼 화려한 느낌이었지만 결코 번드르르하거나 천하지는 않았다. 비에 젖은 낡은 옷차림이었는데도, 묘하게 당당해서 오히려 그 자신이 잘못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봤자 여기저기 굴러먹는 창녀인 주제에, 내 앞에서 건방을 떨었겠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의자 위로 웃옷을 벗어 던졌다. 그런 건, 빨리 지워버리는 게 제일이다.
부관은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인 듯 하다.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천이 걷혔다. 그리고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있던 클리어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변해 가는 느낌이다.
"사비에입니다. 장군님께서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
여전히 약간 물기에 젖은 붉은 머리칼이 어깨 위로 늘어진다. 불꽃 같은 갈색 눈동자에 고집스러운 입매, 유난히 붉은 입술. 단순히 미인이라기보다는 어둠 속의 불빛처럼 눈을 확 잡아끄는 외모.
"···그대를 부르지 않았는데. "
"지나치게 높으신 분의 부름이라 따로 나서는 여자가 없었습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물러가겠습니다만. "
이 여자는 처음부터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던 걸까? 그녀의 눈동자는 이상하게 도전적이다.
"포주에게 얘기해서 다른 여자를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
"···아냐, 됐어. ”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여자에게 손짓을 했다. 비를 맞은 따스한 몸에서는 아찔할 정도의 여취가 피어올랐다.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