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폭풍전야 3화 밀실정치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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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폭풍전야
3화 밀실정치 上
“오랜만이오, 재상.”
육중한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고 여왕인 세느비엔느 Ⅰ세가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재상은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예. 신 부르노 레 그윈, 참으로 오랜만에 폐하께 문안 인사 여쭈옵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는 노재상에게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네고 상석에 앉으면서도 세느비엔느는 그가 자신을 찾아온 연유에 대하여 고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뭔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없다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인간, 그것이 그윈 재상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아체프렌이 코네세타로 떠난 이후 반년이 넘도록 그는 노환을 구실로 단 한 번도 조정 조회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왕명의 형식으로 전해진 조정의 부름까지 거부한 채 본인의 영지인 그레안에 틀어박힌 그윈이 권력을 등에 업은 상행위와 고리대로 재산 축적에만 골몰해 있다는 소식쯤이야 진즉부터 접해왔다. 그렇기에 더더욱 세느비엔느에게는 예기치 않은 상대의 방문이 한층 더 의아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다.
“짐은 재상의 병이 중하여 거동조차 쉽지 않다 들었는데 그간 많이 쾌차하신 모양이오. 한 나라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재상의 병은 곧 나라의 근심인지라, 내 내심으로 그에 대해 시름이 참으로 많았다오.”
얼핏 듣기에는 상대방의 안부까지 포함한 평범한 인사인 듯 보였으나, 재상은 여왕의 말속에 가려져 있는 날카로운 빈정거림의 가시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육십 평생을 파란 많은 황성에서 버텨온 그의 노회한 얼굴에는 한 점 동요도 스치지 않았다.
“송구하옵니다. 하오나 신의 병이 아무리 중하다 한들 조석으로 백성들과 나라의 안위를 근심하시는 폐하를 두고 어찌 편히 영지 안에서만 안돈할 수 있겠나이까. 세레즈를 보우하시는 수천의 신들께서도 하루라도 빨리 쾌차하여 폐하를 보필하고자 하는 노신의 충정을 헤아려 주신 듯하옵니다.”
거듭되는 왕명조차 귓등으로 들어넘긴 것이 언제였냐는 재상은 철면피한 태도로 말을 받았다. 언죽번죽한 그의 치렛말에 내심으로는 뱀 같이 간교한 작자라 여겼으면서도 여왕 또한 스스로의 감정을 숨긴 채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어찌 되었건 조정 대신들의 수장인 재상의 병이 완치되었다니 이는 나라에 있어 실로 홍복이 아닐 수 없소. 짐 역시 이처럼 재상의 강건한 모습을 대하게 되니 기쁘기 한량없군.”
“황감하옵니다. 소신 역시 다시 폐하를 보좌하여 국사를 돌볼 수 있게 되어 흔열하기 그지없사옵니다.”
재상은 만면에 희색을 띠며 들고 온 진상품을 여왕 앞으로 내밀었다. 의례적인 안부도 물었으니 지금이 선물을 꺼내기에 딱 좋은 시점이었다.
태자인 아체프렌과 제 여식인 스와닐다의 약혼 건으로 아직까지 자신에게 서운한 감정이 남아있을 여왕이었다. 왕국 최고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선왕과 약혼을 하고, 사교계의 정점에 서서 만인의 숭앙을 받으며 떠받들려 성장한 만큼 원래부터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극히 감정적인 세느비엔느였다. 로제스티나라는 복병이 나타나 선왕인 카르세오가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덜컥 세느비엔느와의 파혼을 선언하기 전까지 그녀의 인생에는 그 어떤 실패도 좌절도 박탈도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가문의 위세를 빌려 로제스티나를 제거하고 본래 자신의 자리를 되찾은 세느비엔느는 그나마 세상 물정 모르고 천진한 편이었던 선왕의 약혼녀 시절과는 비교조차 불가하리만큼 독해지고 영악해졌으며 독단적으로 바뀌었다.
그런 만큼 기분을 풀어줄 만한 어떠한 조치도 없이 제 생각을 말한다면 여왕은 자신의 의도와 상반된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신의 여식이 폐하의 강건하심을 기원하며 알레이시아 신전에서 백일 간 축수 발원 드린 성포에 직접 자수를 놓은 수파이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는 듯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여왕의 푸른 눈동자를 또렷이 응시하며 재상은 그녀의 궁금함에 대한 답을 건네주었다.
“저런, 스와닐다 공녀가 짐을 위해 손수 만들었단 말이오?”
여왕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는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진상품의 붉은 비단보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손에서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재상이 천천히 덧붙였다.
“신의 여식이 아직 어리고 여러 가지로 모자란 까닭에, 황송하옵게도 어린 시절에 잃은 어미를 대신하여 폐하를 어머니처럼 여기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그 마음을 과히 어리석다 여기지 마시고 크나크신 혜의로 보듬어 주사 부디 여식의 정성을 물리치지 말아 주시옵소서.”
비단보를 풀자 세레즈 여인들의 평안을 보우하고 예술을 관장하는 신이자 풍요와 대지의 여신이기도 한 알레이시아와 그를 따르는 요정들의 모습을 상아와 벽옥으로 섬세하게 박아 넣은 반짝이는 재질의 흑단 함이 나왔다. 조각해 넣은 신의 모습은 물론이요, 함의 한쪽 끝에 황금으로 우아하게 그려 넣은 왕가의 문장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장인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스치지 않은 데가 없었다.
재상의 말과는 달리 선물의 초점이 상자 안이 아니라 밖에 있었음을 간파해낸 세느비엔느는 애써 쓴웃음을 감췄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함을 열어 공단으로 우아하게 수놓아진 손수건을 꺼내 들고 재상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짐 역시 스와닐다 공녀를 두 왕자 못지않게 괴이고 있는데, 어찌 공녀의 성의를 물릴 수가 있겠소? 재상이 공녀에게 내가 진심으로 흡족해하더라고 전해주시구려.”
“폐하의 은혜로우신 말씀을 전하면 제 여식 또한 크게 기뻐할 것이옵니다.”
흑단 함 안에 손수건을 도로 집어넣으며 여왕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혹 공녀가 도성 안에 돌고 있는 부언유설에 마음을 쓰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소.”
비록 겉으로는 스와닐다를 염려하여 꺼낸 말인 듯 보이나 그 질문의 초점이 본인의 의중을 떠보고자 함에 있다는 것을 재상은 어렵지 않게 간파해낼 수 있었다.
“비록 신이 도성에 올라온 지는 얼마 되지 아니하나 아체프렌 전하의 실종에 관한 일이라면, 비단 신의 여식뿐 아니라 성내 귀족들 역시 크게 우려하고 있는 듯 보였사옵니다.”
재상은 흰 수염을 훑어 내리며 여왕을 흘끗 바라보았다.
“대국 세레즈의 정통 계승자가 행방불명 되었는데 어찌 조정이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곧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절체절명의 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온 도성이 술렁거리는 것은 피치 못할 일이라 생각되옵니다.”
조정과 다른 귀족을 운운하고 있으나 기실 그 발언은 태자 아체프렌의 실종을 받아들이는 재상 본인의 입장표명이나 다름없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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