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태풍의 눈 5화 계륵과도 같은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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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계륵과도 같은 패
다이레비드 본궁의 국왕 집무실에는 대신들과 일대일 접견이 가능한 소규모 응접실이 붙어 있었다. 복도를 통하지 않고 집무실에서 응접실로 곧바로 모습을 드러낸 여왕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궁내부 대신 프라이스를 지나쳐 그의 맞은편 의자에 단정히 앉았다.
“무슨 일인가. 경이 급한 용무로 알현을 청하였다 들었소만.”
“예, 실은 다름이 아니오라······.”
세느비엔느는 피곤한 기색을 한 채, 마른 침을 삼키느라 끊어진 상대의 다음 말을 차분히 기다렸다.
“황감하옵게도 신이 예정에 없이 급작스럽게 알현을 청한 이유는 이것을 폐하께 전해드리기 위함이옵니다.”
여왕은 별다른 말 없이 상대가 조심스럽게 건네는 문서를 받아 들었다. 건네받은 문건을 읽어내려가는 세느비엔느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여왕은 할 말을 잃었다. 궁내부 대신이 중대한 용건이라며 자신을 찾아와 황급히 건넨 문서는 어처구니없게도 미드프레드 그론레이의 사직원과 입대 지원서였다.
“프라이스 경.”
순간 이러한 것까지 자신에게 갖다 바치는 조정 대신들의 과잉 충성과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궁전 안의 역학적 권력 구도에 염증을 수반한 쓴웃음이 배어 나왔지만, 세느비엔느는 애써 표정을 감추었다.
“예, 폐하.”
자신을 향한 상대의 눈빛에 묘한 기대감이 어려있는 것을 본 세느비엔느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역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유서 깊은 가문 덕에 능력도 없이 조정 내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면 최소한 눈치라도 있어 주면 좋으련만, 궐 안에서 제 수족처럼 움직여주어야 할 궁내부 대신이란 작자가 이토록 위태로운 시국에 겨우 이따위를 급한 용건이라며 찾아오다니, 제정신이 박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프라이스 후작 가문이 세느비엔느가 보위에 오르기 이전부터 그녀의 친정인 폰다 가문과 오랜 정치적 동반자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가 가져온 그론레이의 사직원을 그의 얼굴에 내던지며 호통쳐 내쫓아버렸으리라.
“이게 무어요?”
읽어보기 전이라면 모르되 다 살펴본 후에 새삼스럽게 이게 뭐냐고 묻는 여왕의 의도를 언뜻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프라이스는 잠시 대답을 미룬 채 탁자 위에 서류를 내려놓는 여왕의 손가락을 당황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대답해 보시오.”
조용하지만 규탄의 의미가 짙게 깔린 그 어조에 기가 눌린 것인지 프라이스의 얼굴에 늘 떠다니던 부드러운 웃음이 어느 시점부터 깨끗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황공하오나 미드프레드 그론레이의 사직원과 군 지원서인 줄 아옵니다······.”
여왕의 재촉에 떠밀린 그가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답했다.
“그렇다면 경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면서 짐에게 가져왔다는 것이오? ”
되묻는 여왕의 음성은 평소와 엇비슷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불쾌함의 농도는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아둔한 신으로서는 폐하께서 어인 연유로 신을 문책하시는지,”
미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왕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이렇게 답답할 데가! 경은 짐이 방금 집무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였단 말인가?”
느닷없는 호통에 프라이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국가의 중대사를 살피느라 조석으로 고심하고 있는 짐에게 하급 시종의 일을 가져오다니! 프라이스 경, 그대가 과연 조정 대신으로서 자각이 있는 자란 말인가?”
“하오나 폐하, 그론레이는 십 년 이상 태자 전하의 측근이었지 않사옵니까? 그런 만큼 소신은 그의 일거수일투족 모두 폐하께 고해 드리지 아니하였다가, 행여나 그의 무분별한 행동이 폐하의 성총에 누를 입히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저어되어 그만······.”
“지금 경의 발언이 대체 무슨 의미인가?”
여왕의 푸른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일개 평민에 불과한 자가 어찌 군왕의 치세를 흐리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또 그가 태자의 측근이었단 이유로 짐이 그에 대해 사사건건 보고 받아야 할 이유란 대체 무엇인가? 그대가 지금 모자 관계를 이간하려 함인가?”
“신이 감히 그런 불충한 생각을 품을 리가 있겠나이까? 단지······!”
“그만하라! 자숙하며 용서를 구하여도 관용을 베풀기 어렵거늘, 어찌 이 자리에서 노노발명하려 드는가? 그대가 후작 가문의 위상을 믿어 그토록 오만방자한 것인가?”
여왕의 음성이 높아지자, 프라이스는 자리에서 내려와 그 앞에 고두하였다.
“송구하옵니다. 부디 신의 아둔함을 용서하시옵소서.”
“국정을 살피고 있는 국왕에게 일개 시종의 일을 중대한 보고라며 가져 오는 것이 대체 어느 나라 법도란 말인가?”
엎드린 프라이스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짜증스럽게 내뱉은 여왕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조정을 떠받치고 있는 대신이 이래서야 짐이 누구를 믿고 정사를 볼 수 있단 말인가?”
혀를 차며 화를 고른 세느비엔느는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부들거리는 프라이스를 돌아보고는 일어나라 명하였다.
“경의 행위가 조정 대신으로서의 자성이 결여된 행동임은 두말할 나위 없는 분명한 사실이나, 태자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는 작금, 그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시종을 앞뒤없이 내친다면 내 무심한 어미라는 비난을 받아도 반박의 여지가 없을 터. ”
냉정한 어조였지만 여왕의 음성은 종전에 비해 많이 수그러져 있었다. 여왕은 궁내부 대신에게 스치듯 시선을 던졌다.
“짐이 조금 더 상량해 본 뒤에 확답을 내리겠으니 경은 이만 물러가시오.”
아무 말도 못한 채 물러가는 궁내부 대신을 굳은 듯 앉아 응시하고 있던 여왕은 문이 닫히는 것과 거의 동시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는 탁자 위에 올려 두었던 문서를 다시 집어 들며 의자에 깊숙이 기대고 앉았다.
사직을 청한 날짜와 군대에 지원서를 제출한 일시로 미루어, 여왕은 그가 시종 일을 그만둔 것이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가 소속을 원하는 부대는 남부 파견군 아닌가. 이미 전쟁을 예감하고 최전선에서 전공을 세우려는 계산임이 틀림없었다.
어쨌든 미드프레드 그론레이는 가만히 있으면 자연히 얻을 수 있는 궁내부의 사무직 따위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승진의 기회를 미련 없이 내버리고 군대로 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 아니겠는가. 아체프렌 왕자의 시종이었을 때부터 그를 무르게 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그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영악한 자였는지도 몰랐다. 그동안 죽은 듯 지내온 것은 합법적으로 왕자궁을 나올 수 있을 때까지 주변의 주목을 피하기 위한 속임수였단 말인가. 마치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움직이기 시작한 미드프레드의 행동을 두고 여왕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만일 미드프레드가 최종적으로 원하는 것이 출세라면 그 바람은 자신이 이뤄줄 수도 있다. 하지만 속단은 금물이었다. 여왕 스스로도 지금 자신이 겉으로 드러난 상황을 가지고 본인에게 유리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손을 이마에 올린 채 여왕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자칫 들뜨려 하는 기분을 애써 가다듬었다. 프라이스가 언급했다시피 미드프레드는 십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아체프렌이 변함없이 믿고 의지했던 유일한 측근이었다. 아체프렌과 교류가 있었던 그 어떤 사람도 미드프레드만큼 그에게 절대적인 신망과 총애를 받지는 못했다.
사실 여왕은 풍문으로만 몇 번 접한 미드프레드의 능력과 가능성 같은 것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아직 어떠한 경로로도 확실히 증빙된 바 없는 그런 가능성에 집착을 보일 만큼 그녀 자신 미드프레드라는 존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다. 다만 그녀의 주된 관심사는 그를 자신의 진영에 끌어들이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상징적인 효과에만 집중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궁 안에 파다하게 소문이 날 정도로 미드프레드를 아끼던 아체프렌이다. 그런 미드프레드 마저 태자를 배신하고 안타미젤 휘하로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염세적이고 허무적인 발상이 다이레비드 성안을 강타하여 아직 근절되지 않았던 아체프렌의 옹호 세력이 급격히 감소할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기에는 자신이 미드프레드라는 자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너무 없었다. 손을 내밀어 붙들기에도, 미련 없이 내버리기에도 참으로 곤란한 패가 굴러들어오지 않았는가.
‘재상에게 자문을 구해 보면······?’
세느비엔느는 잘게 입술을 깨물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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