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애별리고 5화 이주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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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애별리고
5. 이주명령
“일찍 오셨네요, 아버지.”
들고 있던 바느질감에서 눈길을 떼어낸 아이네즈는 부친의 굳어진 얼굴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이네즈가 미처 뭐라고 묻기도 전에 슈레디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역시도 그녀처럼 플로베르의 표정에서 막연한 불안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아이네즈는 슈레디안을 거쳐 부친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아버지?”
“······이주 명령이 내렸단다.”
“이주요? 어디로요?”
“다섯 가구가 안 되는 마을에 사는 영내 사람들은 모두 성안으로 거처를 옮기라는구나.”
“그건 예전부터 말이 있었던 일이잖아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이번에는 이달 말까지 다 옮기라고 하는구나.”
“그렇게 촉박하게요? 대체 왜,”
“······시국이 어수선하니까 그런 게지.”
플로베르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부친의 시선이 머무르는 끝에 어머니의 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아이네즈는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며 아이네즈는 조용히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이사 준비도 문제지만, 일단은 슈레디안이 걱정이구나.”
“제가 왜······?”
“이주가 끝나면 호구 조사가 있을 것 아닌가.”
“아······.”
아이네즈가 핏기가 가신 얼굴로 들릴 듯 말 듯 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슈레디안은 어떻게 되는 거지요?”
그녀의 얼굴은 누가 봐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플로베르는 딸의 얼굴에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무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찌 되었든 슈레디안은 이 지방에서는 낯선 사람이고, 그의 신원을 밝혀줄 만한 사람도 따로 없지 않니? 이주명령에 날짜 제한까지 붙은 걸 보면 호구통제가 다시 강화될 것 같은데, 공식적으로 조사를 받게 된다면 여러 가지로 오해의 여지가 많아질 거다.”
아이네즈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슈레디안이 난처해지도록 내버려 둬서는······. 아니, 그러니까 저기, 전 일단 이것을 다나 아주머니댁에 가져다드리고 올게요. 더 늦으면 안 되니까요.”
아이네즈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 분명한 바느질 뭉치를 주섬주섬 바구니에 집어넣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방안에 두 남자를 내버려 둔 채 급히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두 사람은 말없이 굳은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먼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씁쓸한 웃음을 떠올린 것은 플로베르 쪽이었다.
“아이네즈가 많이 당황한 모양이군. ”
“아무래도 급작스러운 소식이었으니까요.”
차분한 얼굴로 답하는 슈레디안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플로베르는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래, 자네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가? 예전 일은 여전히 생각나지 않는 건가?”
언급하기 껄끄러운 내용이었기에 더더욱 아이네즈가 이 자리에 없어 차라리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슈레디안의 거취를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인 그의 의중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더는 여기에 머물며 걱정을 끼쳐드려서는 안 될 것 같군요.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죠.”
“이 근방에 아는 사람이라곤 우리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자네가 무슨 방법이 있다고.”
눈을 감은 채 한참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던 플로베르는 마침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슈레디안이 떠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플로베르로서도 그를 도울 방도가 아예 없을 것 같지 않았다.
“내 한 번 방법을 알아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잠시 기다려 보게.”
그리고 플로베르는 슈레디안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후 헛기침을 하며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턱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숨 막힐 듯 고요한 적막이 밀려왔다. 정적을 다시 밀어버리려는 듯 슈레디안은 일부러 크게 한숨을 내쉬며 식탁 앞으로 다가갔다. 방안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다음 순간 덜컥하는 소리에 막 촛불을 켜려던 그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네즈?”
여전히 창백한 얼굴의 아이네즈가 두 손으로 바구니의 손잡이를 부서질 듯이 꽉 움켜쥔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한참 걸리리라 생각했는데, 어쨌든 서 있지 말고 어서 들어와요.”
아이네즈는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약간 멍한 표정으로 슈레디안을 올려다보고는 간신히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떠올렸다.
“아, 예. 저기 나, 가다가 뭔가를 두고 온 것 같아서······.”
“그건 천천히 찾아보고, 일단 좀 앉아요.”
슈레디안은 그리 말을 하면서 약간 강하게 아이네즈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이네즈는 그가 이끄는 대로 다리를 휘청이며 맥없이 의자에 앉아 그가 식탁 위의 초에 불을 붙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녁 어스름 속에서 일렁이는 불빛이 기분 탓인지 흐느끼는 것만 같다고 아이네즈는 생각했다.
“물이라도 좀 마시겠어요?”
힘없이 시선을 든 아이네즈가 고개를 저으려 했으나, 슈레디안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물통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물을 떠다가 식탁 위에 올려놓고 부드럽게 덧붙였다.
“이거라도 마시고 진정해요.”
아이네즈는 떨리는 손을 물컵 쪽으로 뻗었다. 그리고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려 쥐고 있던 컵을 입가로 가져가려다 말고 고개를 들어 슈레디안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왼쪽 어깨에 올려진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안심하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과 불안이 단번에 풀리는 느낌이었다. 아이네즈는 자신을 향해 고정된 슈레디안의 푸른 눈동자에 서린 걱정스러움을 읽어내며 억지로라도 웃어 보이려 했다.
“아, 미안해요. 난······.”
힘겹게 미소를 떠올린 아이네즈가 이제 됐다 싶어 마음을 놓은 순간,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더니 뭔가 따듯한 것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울지 말아요.”
슈레디안의 오른손이 그녀의 오른쪽 어깨로 감싸오듯 다가왔다.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보다 그의 토닥거림에 당황해버린 아이네즈는 황급히 소매를 눈가로 가져갔다.
“아······. 난, 그러니까······.”
그는 자리를 피하듯 일어선 아이네즈의 한쪽 팔을 강하게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가늘게 떨고 있는 아이네즈를 힘있게 감싸 안았다.
“······!”
상체를 감싸는 포근한 온기에 필사적으로 지켜온 인내의 둑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어린애를 다독이듯 자상한 손길에 마음이 약해진 아이네즈는 난생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떼를 쓰고 싶다고 느꼈다. 그에게 떠나지 않으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다. 아니, 이대로 언제까지나 제 곁에 있어 달라고 애걸하고 싶기도 했다. 아비의 말처럼 슈레디안이 이대로 이곳에 머물면 위험해질 것을 알기에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할 말들이 소리 없는 눈물이 되어 아이네즈의 두 뺨을 긋고 쉼 없이 흘러내렸다.
슈레디안은 아무 말 없이 아이네즈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조용하지만 안타까움이 짙게 느껴지는, 조심스럽고도 상냥한 위로의 몸짓이었다. 아이네즈는 눈물이 새어드는 입술을 열어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슈레디안······.”
뿌옇게 흐려진 시야 속에서 슈레디안의 단아한 얼굴이 저의 것만큼이나 고통스럽게 일그러진다 싶은 순간, 슈레디안이 애처로워 못 견디겠다는 듯 고개를 숙여 아이네즈의 속눈썹 위로 제 입술을 내렸다. 굵은 이슬이 아이네즈의 빳빳한 속눈썹을 흠뻑 적시고 슈레디안의 입술 새로 흘러들었다.
“미안해요, 아이네즈.”
그녀의 눈물이 슈레디안의 마음을 찢어놓았다. 슈레디안은 자신이 왜 사과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같은 말을 재차 입에 담았다.
“미안해요.”
그녀를 아프게 한 것에 대해서, 저 때문에 울고 있는 그녀 앞에서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해서, 어쩐지 그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미안해요······.”
당신에게 무엇 하나 밝히지 않고 떠날 심산을 굳힌 주제에 이토록이나 당신을 원하는 이기적인 나라서, 정말 미안합니다. 슈레디안이 얼굴도 깊은 고통으로 얼룩졌다.
말로 표현하지 아니한 사죄를 알아들은 양 아이네즈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슈레디안은 아이네즈의 고개를 두 손으로 감싼 채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겹쳐진 입술 새로 보석 같은 눈물이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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