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부위정경 2화 세레즈의 물밑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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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부위정경 扶危定傾
2. 세레즈의 물밑 접촉
국왕의 직인이 찍힌 왕영 문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에스피아는 눈으로 빚은 듯 희고 고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조용한 내실에 그녀의 나직한 음성이 울려퍼졌다.
“소집령이라······.”
사실 도성 크롬빌에서 부왕께서 보내신 공식 서한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그저 어수선한 시국에 왕위 계승자가 도성을 오래도록 비우는 것은 모양새가 과히 좋지 않으니 하루속히 입궐하라는 의례적인 소환 명령이 적혀있을 따름이었다.
정작 부친인 로그스트 Ⅵ세가 그녀에게 알리고자 한 사안은 소환 명령서에 딸려오듯 전해진 밀봉된 통 안에 담겨 있으리라는 점을 거의 직감적으로 깨우친 에스피아는 약간 굳은 얼굴로 통을 개방했다. 둥글게 말려있던 문서에 적혀있는 부왕의 필체를 따라가는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여느 때 없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모든 일은 나흘 전 세레즈의 세느비엔느 Ⅰ세가 은밀히 보낸 사신이 코네세타의 도성인 크롬빌에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간 세레즈와 코네세타 양국은 조공 전달 외의 목적으로 사절을 교환하거나 사사로이 교역하는 것조차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치·군사적으로 적대적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세레즈의 왕위 계승자가 코네세타의 영해에서 실종되는 국제적 위기 사태를 맞이하여 양국 간의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작금 도착한 세레즈의 사신은 의외로 협상이라는 카드를 코네세타에 제시했다.
상대의 군비 확충 추이를 알아보고자 파견해둔 첩보 활동을 통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는 현 상황에서, 최후통첩이나 선전포고가 아닌 담합을 촉구하는 세느비엔느의 물밑 접촉은 코네세타 측으로서는 분명 아연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세레즈 안팎의 사정으로 미루어 양국 간의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단안을 내린 세느비엔느는 안타미젤 왕자의 등극 이후의 이권을 담보로 코네세타에 협상을 제시해 왔다.
세레즈의 여왕이 협상안에서 코네세타에 제의한 이권은 크게 세 가지였다. 국제 관계에서 양국의 우위 논쟁과 함께 줄곧 시빗거리가 되어왔던 조공을 전면적으로 폐지하겠다는 것과 군도 국가인 까닭에 높은 관세에도 불구하고 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코네세타에게 연간 무역량의 10%에 해당하는 분량의 식량을 무상으로 원조하겠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생필품에 관한 한 관세를 반으로 인하하겠다는 것이 바로 그 협상안의 주된 내용이었다.
이렇듯 파격적이기까지 한 교환조건을 들이밀며 여왕이 코네세타에 요구한 대가는 최종전에서의 세레즈의 승리와 전승국으로서의 위용이었다. 더구나 코네세타가 본인의 제안을 수용하겠다고 할 경우, 전장은 세레즈 제국 내로 한정하겠다고까지 단언했다.
세레즈의 사전 접촉에 대한 사실을 조정 신료들에게 일체 함구한 채 자신의 견해를 들어보고자 입궐토록 명한 부왕의 뜻을 헤아려보며 그녀는 슬며시 웃음을 흘렸다. 듣기에는 달콤하기 이를 데 없는 제안 같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지간히 다급하셨던 모양이야. 세느비엔느 쪽도.”
아무리 제 소생의 왕자를 왕위에 올릴 야심에 사로잡혀 있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일국의 국왕임을 자처하는 자가 백성들의 생명과 영토적 존엄성을 담보로 적국과 사통하려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보다 강대하거나 비등한 세력을 가진 자와 손을 잡는 일이 갖는 위험성은 지배자가 알고 있어야 할 통치술의 기본에 해당했다. 설령 그러한 방식으로 최종전에서 어찌어찌 승리를 거둔다 하여도 그 승리는 온전하게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닐뿐더러, 결국은 함께 뛰어든 타국에게 발목이 잡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될 뿐이라는 점은 지배자의 위치에 서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이다.
‘식량 원조뿐 아니라 국제 관계의 우위마저 양보하겠다? 빈말로도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겨우 그따위 허울뿐인 공약으로 200년간 쌓였던 빚을 탕감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섭정이 된 이후 지금까지 한결같은 태도로 속국 운운하던 세느비엔느가 상황 좀 바뀌었다고 손바닥 뒤집듯 형제라 부르며 협상을 제의해 온 것도 믿을 수 없고 말이야.’
에스피아는 세느비엔느의 진의를 헤아리려 애쓰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적의 군비 확충 추이에 집중하기로 했다.
담합으로든 이기든, 무력으로든 이기든 최종전에서 승리를 거두면 저들은 오늘 그러하였듯 또다시 태도를 바꾸어 고압적으로 나올 것이 확실했다. 전투에서 적을 속이는 것이 비난받을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듯, 그것은 정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세레즈와 신실한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순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태도를 바꿀 수 있는 상대를 배신한다 하여 도의상 가책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지 않겠는가. 어차피 세느비엔느가 어리석은 도박을 청해 왔으니, 자국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는 그 장단에 맞춰주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을 듯 보였다.
낮게 코웃음을 치고 나서 에스피아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슈레디안이라 했던가. ’
차라리 잘 된 것인지도. 그가 설령 아체프렌이 아니라 해도 이토록 위급한 시국에 그와 그렇게 닮은 사람이 자신의 영지 안에 있다는 사실은 천운이 코네세타 쪽으로 기울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에스피아는 부왕의 서한을 읽느라고 일부러 방 밖으로 내보냈던 시녀를 다시 불러들였다. 형세가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니 이제 더는 망설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왕 이리된 바에야 도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줄곧 마음에 가시처럼 걸려 있던 그 병사의 일을 어떻게 해서든 마무리 짓는 편이 현명한 처사일 듯싶었다.
정확하게 어째서 그러한 결론이 나왔는지는 그녀 스스로도 단언할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슈레디안이란 그 청년이 이 위기상황의 시점이며 종점이 될 주요변수가 될 것 같다는 본능적인 직감이 그녀의 전신을 장악해왔다. 그가 진짜 아체프렌이든, 아니든, 그자는 더 늦기 전에 반드시 수중에 넣어야 할 패였다.
그리고 일단 결정을 내린 후라면 그다음의 행동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녀였다.
“연병장으로 사람을 보내서 내 따로 알아보았던 그 병사와 분단장 엘센이라는 자를 들이도록 하라.”
지시를 받고 조용히 물러가는 시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두어들인 에스피아는 아직껏 손에 쥐고 있던 부왕의 비밀 친서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조소가 스쳐 갔다. 그리고 에스피아는 그 서신이 마치 세레즈의 여왕이 보내온 서한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런 주저 없이 불에 붙여 벽난로 속으로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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