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태풍의 눈 3-4화 충성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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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충성서약
에스피아의 명으로 슈레디안이 이스빌렌 영지의 북측 탑에 유폐된지도 한 달이 훌쩍 지났다.
처소는 침대가 달려 있는 방에, 크지는 않았으나 커다란 창이 달린 응접실까지 붙어 있었다. 때가 되면 씻을 물과 끼니가 들어왔고, 살벌한 감시가 뒤따르긴 했으나 오후가 되면 그의 의사에 따라 탑 옥상을 거닐 수 있는 산책 시간까지 주어졌다. 왕실을 기망하여 입대한 반란 귀족에게 주어진 것이라기에는 지나친 호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저를 가둔 에스피아의 의중을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는데다, 그녀의 의심이 채 풀리지 아니하였음을 직감하였기에 슈레디안은 일부러 들어오는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병이 없는 젊은이라고 해도 음식을 끊고 잠도 안 자면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비축해두었던 체력은 얼마 되지 않아 바닥을 드러냈고, 그는 어느 순간 쓰러졌다. 고열에 얼마나 시달리며 앓았을까. 그는 비몽사몽 간에 언뜻 에스피아와 란델을 보았다.
그리고 저의 곁을 지키는 의원과 시녀의 도움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추스릴 수 있게 되자 에스피아가 그를 불러들었다.
"살려달라 애걸하여 살려주었더니 이제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요량이더냐? 너에게는 나의 관용이 그토록 우습더냐?"
에스피아 앞으로 끌려가기가 무섭게 치죄당하듯 슈레디안은 그녀 앞에 무릎 꿇려졌다. 문책하는 음성이 엄중했다. 자신이 일부러 곡기를 끊은 것을 알아차린 것이 분명한 발언이었기에 슈레디안은 변명 없이 다만 용서를 구하였다.
본인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탑을 오가는 이들의 단편적인 대화로 에스피아가 성도인 크롬빌로 환궁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전쟁을 앞두고 입궁 명령을 받아 경황이 없을 그녀가 자신이 아프다는 말에 직접 찾아와 들여다 볼 정도로 저에 대해 신경쓰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이 소란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너를 죽이는 일은 하등 어렵지 않으나 그 목숨을 거두어 나 또한 밀로타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는 오명을 얻게 될까 저어하여 내 마지막으로 네게 선택권을 주고자 한다. 나의 검이 되어 네 죄를 갚으며 새로운 삶을 살아볼 테냐. 아니면 이대로 왕실을 기만하고 왕위 계승자의 관용을 모독한 죄인으로 생을 마칠 테냐. 전자를 택한다면 한때 네가 바랐던 대로 나의 기사가 될 기회를 줄 것이고, 후자를 택한다면 고통없이 너의 생명을 거두어주마. 굳이 번거롭게 아사를 택하여 길게 고통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단두대에 오르면 한순간일 것을."
결코 농이 아니라는 듯이, 에스피아가 손짓하여 슈레디안을 창가로 데려가게 하였다. 창밖에는 외관만으로도 흉흉한 커다란 단두대가 놓여있었다. 끔찍한 생김의 형구였으나 슈레디안은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저것은 다름 아닌 저에 대한 에스피아의 의심이 풀렸음을 증빙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쟁을 목전에 둔 적대국의 왕자라 하여도 코네세타가 자신을 아체프렌으로 의심하고 있다면 포로 협상조차 없이 작위가 없는 죄인을 다루는 형구로 죽일 수는 없다. 단두대에 올리자면 필연적으로 죄인을 엎드리게 해야 한다. 하지만 설령 반역죄를 지었다 하여도 작위가 박탈당하지 않는 한 귀족은 선 채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죄를 지은 귀족의 목숨을 거둘 수는 있어도 본인의 의지에 반하여 명예는 앗아갈 수 없는 까닭이었다. 하물며 자신은 왕자였다. 그녀가 설령 협박용이라고 할지라도 단두대를 동원했다는 것은, 자신을 철저하게 아랫것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였다.
슈레디안은 단두대를 보고 겁을 먹은 것처럼 비틀비틀 걸어와 에스피아 앞에 스스륵 주저 앉았다. 이것이 그녀를 속이기 위한 마지막 연기였다. 슈레디안은 부러 떨리는 음성을 내었다.
"공주님의... 자비에 기대어...기회를 얻고 싶습니다. 부디, 전하의 검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이로써 나는 죽을 죄를 지은 너를 두 번이나 살려주었다."
슈레디안의 고개 위로 에스피아의 냉랭한 음성이 떨어졌다.
"약조대로 내 너에게 기사가 될 길을 열어줄 것이다. 허나, 가문이 복권되어도 너는 내 소유의 검이 되어 내가 원하는 자리에서 나의 명을 따르며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나를 지키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네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이다."
"예... 공주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그리 살겠습니다."
슈레디안의 앞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단검이 툭 떨어졌다.
"네 말의 진의를 너의 피로 증빙하라."
충성 서약이라니. 고소가 치밀어 올랐다. 일국의 보위 계승자로 태어나 부왕께도 해본 적 없는 맹세를 살아남기 위해 적국의 공주에게 하게 생겼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 그에게 모욕감과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다. 제어되지 않는 감정 때문인지 단검을 움켜쥐는 손이 잘게 떨렸다. 크지 않은 날붙이가 실제 이상의 무게로 그의 손바닥을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언제고 세레즈로 돌아간다면, 그리하여 정당한 제 자리를 찾고 나면 이 날의 수치를 반드시 되갚아 주리라.
슈레디안은 제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칼날을 제 왼팔뚝에 대고 비스듬히 기울였다. 예리한 날이 샹들리에의 환한 불빛 아래 서늘하게 빛났다.
예정된 고통보다 전신을 장악한 모독감이 더 커다란 파장으로 그를 흔들었으나, 그는 다음 순간 두 눈을 질끈 감고 칼자루를 쥔 아귀에 힘을 실어 제 살을 길게 베었다. 소매의 옷깃이 찢겨지고 화끈거리는 통증이 팔 전체에 퍼져나갔다. 슈레디안은 욱신거리는 팔을 움직여 피가 맺힌 단검에 입을 맞춘 후 두 손으로 그것을 받들어 에스피아에게 바쳤다. 들어올린 팔의 옷깃을 적시고 흘러내린 붉은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주군께서 내리신 검에 대고 맹세합니다. 슈레디안 크론케이터...., 이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전하의 검으로만 살 것을 서약합니다. 이 다짐에 한치의 변심이라도 생긴다면 주군께서 살리신 이 목숨을 다시 거두어 주시길 희망하나이다."
에스피아는 슈레디안의 피가 맺힌 단검을 받아들었다.
"모든 것은 약조대로 이루어질 것이나, 나의 관용을 가벼이 여긴 무례는 묵과할 수 없구나. 크론케이터를 데려가 태형 오십대를 가하라. 그리고 형이 끝나는 대로 란델 프레아제스, 그대가 책임지고 크론케이터를 교육하라. 밀로타 사건을 재조사하여 그의 가문이 복권대는 대로 내 그에게 친위대 입단 시험의 기회를 부여할 것이다."
"예, 소관 주군의 명을 받드나이다."
"그대를 믿는다."
에스피아는 자신의 최측근인 란델을 감시역이자 슈레디안의 교육담당으로 그 곁에 붙여 두고는 왕명에 따라 크롬빌로 향했다.
4. 전력탐색
세느비엔느 여왕은 넓은 탁자에 앉아서 벌써 반나절째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장계와 각종 보고서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공문 중 태반 이상을 이루고 있는 것은 코네세타와의 전쟁 준비 상황을 알리는 보고서였다.
몇 시간 째 주위에 눈길 한 번 돌리지 않고 공문들을 살펴보던 그녀는 잠시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탁자 한끝에 미뤄두었던 책자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책장을 빠르게 넘겨 아직 인가하지 않은 장계의 목록과 미처 살펴보지 못한 보고서의 항목을 훑어나갔다.
코네세타 군비 확충 추이에 대한 첩보 활동 보고, 수도에 집결해 있는 병력과 앞으로 동원 가능한 병력, 남부에 파견해 두었던 군부대의 배치 상태, 남부 영지에 활용 가능한 전략 거점과 작전선 편성 계획, 진지 및 보급선 구축 현황······.
보고서 목차를 따라가던 그녀의 시선이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여왕의 눈길이 ‘해상 원정에 동원 가능한 해군력에 대한 통계 보고서’라는 목차에서 멈추었다.
여왕은 오랫동안 한 자세로 앉아있어 굳어진 몸을 일으켜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있는 보고서가 놓여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부지런히 장계를 뒤적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그녀는 소파로 다가가 쿠션을 집어와 의자 뒤에 놓고는 각종 통계와 수치로 가득한 두꺼운 보고서의 낱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얼굴이 언짢은 기색을 담아 점차 굳어졌다. 결국 여왕은 보고서의 마지막 몇 장을 남겨둔 채,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덮어버렸다.
“이렇게 해군이 부족해서야 어디 전쟁 시늉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
세느비엔느는 보고서를 내던지듯 탁자 밑에 내려두었다. 답답한 마음에 절로 한탄이 나왔다. 첩보 활동을 통해 알아본 코네세타의 해군력에 비해 이 보고서에 실려 있는 세레즈의 해군 현황은 차마 군대라고 표현하기 민망하리만큼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열세도 이런 열세가 없었다.
한 나라의 국왕임을 자처하는 그녀가 전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코네세타의 해군력을 무시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코네세타가 주변국의 외침을 단지 해상 전투만으로 물리칠 수 있을 만큼 강대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세느비엔느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군의 전력에 대한 구체적인 탐색이 있기 전까지 비록 해군은 코네세타에 뒤질지라도 영토가 넓으며 인구수가 많으므로 미흡한 해군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전력 면에서는 적과 비등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의 희망과 달랐다. 자신에게 올라오는 보고서로 유추해 보건대 해군은 고사하고서라도 기병과 보병, 즉 적을 맞아 영토에서 백병전을 치를 수 있는 병력수 역시 코네세타에 비해 우위를 호언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여왕은 의자에 깊숙하게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 공문을 읽느라고 피곤해진 눈가로 두 손을 가져갔다. 가장 큰 문제는 해군이 압도적으로 열세에 놓여있다는 점이었지만, 현재 왕실에 출입하는 귀족 가운데 최전선을 담당할 장수로 파견할 만한 인재가 없다는 사실 역시 그녀의 마음속에 우울한 그늘을 만들어 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군부대를 맡길 수 있는 신뢰할 만한 무관 귀족이 없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해군의 부족보다도 한층 더 심각한 문제이기도 했다. 그녀는 가슴속에 있는 갑갑함을 풀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도성에 출입하는 젊은 귀족 가운데에는 왕가의 혈손이기도 한 브라우웰 라 아르헨돌프처럼 제법 유능한 자도 있었다. 문제는 그를 비롯한 능력 있는 신흥 세력들은 대부분 아체프렌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어 그녀 자신이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이들을 키워주자니 앞으로 전쟁 이후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미래가 두렵고,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당장 자신이 처해있는 난관을 타개해 나갈 만한 재원이 마땅치 않았다.
세느비엔느는 거듭 한숨을 토해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코네세타에 미리 사전 접촉을 해두었기에 망정이지 그런 최후의 방비조차 없이 개전이 되었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이 상태로 전면전을 맞았다면 전쟁의 승패는 물론 국가의 존망조차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위태로운 상황에 놓일 뻔하지 않았는가.
그녀를 상념에서 일깨우듯 복도 너머로부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짧게 몇 번 들려왔다. 여왕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시녀를 탐탁하지 않은 눈빛으로 보았다.
“내 국정을 살피는 중에는 함부로 들지 말라 일렀거늘.”
깊이 허리를 숙이는 시녀에게 세느비엔느는 힐책하듯 한마디 던졌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며 시녀는 한결 더 조심스러운 음성을 말을 이어갔다.
“송구하오나 궁내부 대신이 폐하께 긴히 아뢸 말씀이 있다 하여서 이렇듯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 올리나이다.”
“궁내부 대신이라면 프라이스 경이 들었다는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잠시 궁내부 대신이 자신에게 급히 전할 용건을 떠올려 보았으나 별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어 세느비엔느는 조금 누그러진 안색으로 지시했다.
“알았다. 그를 응접실로 안내하라. 검토 중인 사안만 마무리 짓고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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