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3장 삼년불비우불명 1-3화 출격과 관전
13장 삼년불비우불명三年不飛又不鳴
세레즈력 387년 5월
세레즈본영에 합류한 미드프레드와 하크스 지원군,
총사령관 안타미젤 왕자의 허가 아래 참모진에 소속되어
적의 공세를 거듭하여 물리치며 공로를 세우다
-제국력 연대기 섭정공 세느비엔느 열전 발췌
1. 출격
세레즈 군의 지휘를 맡은 카리에른은 말 위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휘하 장병들을 둘러보았다. 펜데스칼의 코네세타 진영과 그레안 안쪽의 아군 진영 사이에 펼쳐진 드넓은 벌판 한끝에 도열해 있는 아군 병사들 사이에는 으레 있을 법한 잡담이 없었다.
늘어선 병사들로부터 간간이 들려오는 나지막한 숨소리 하나하나마저도 귀에 거슬릴 만큼, 온몸에 퍼진 신경의 가닥가닥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롭게 당겨져 있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착용한 갑주가 맑은 햇살 아래 차가운 금속성의 광택을 내며 빛난다.
어깨 너머로 길게 둘러맨 상급 지휘관을 상징하는 망토의 붉은 빛이 은빛 갑옷과 대비되어 한층 더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끈다. 말허리 밑으로 날카로운 끝 부분을 내려뜨린 검은 그의 허리춤에 단단히 매달려 있다.
카리에른은 전방을 쏘아보며 이제 눈앞으로 닥쳐온 공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는 펜데스칼에서 아군이 밀려나게 된 원인 제공을 했던 전투를 떠올렸고, 그곳에서 목이 잘려나간 수많은 병사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저 더러운 코네세타 놈들을 칼로 찔러댈 마음의 준비가 끝났음을 느꼈다. 그런 그의 기분을 이해한 모양인지, 조용히 서 있던 말이 앞발을 가볍게 구른다. 그는 이를 악물며 고삐를 틀어쥔 손아귀에 한껏 힘을 주었다.
"전진! "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와 함께 막혀있던 전장의 흐름이 일순간 확 뚫린다. 전진 명령이 늘어서 있는 하급 지휘관들을 통해 빠르게 병사들 사이로 전해진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진형의 돌출 부분에 위치한 경기병들이 힘찬 태세로 적을 향해 말을 몰아쳤다.
온 몸을 감싸고 있는 무거운 갑옷이 말의 속보에 흔들리며 뼈마디를 두들긴다. 심장이 벌렁거린다. 숨이 가빠온다. 전신이 후끈하게 달아오른다. 카리에른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어 정면을 향해 쭉 뻗으며 소리를 질렀다.
"돌격! "
돌격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앞서가던 세레즈의 경기병들이 말 옆구리에 박차를 가하며 지면을 엎어버릴 듯 무지막지한 속도로 바람처럼 내달았다. 땅을 박차는 말발굽에 먼지가 피어올라 바람과 함께, 달리는 기병들의 얼굴을 때린다. 고함을 내지르며 질주하는 기병들의 모습은 용감하기 그지없다.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듯한 기세다.
대열의 선두를 이루고 있던 경기병 무리의 일부가 궁수대의 공격에 쓰러졌지만, 그 뒤를 이은 기병들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활을 맞고 굴러 떨어진 동료들의 몸을 뛰어넘어 그들은 말을 몰았다. 바닥을 뒹구는 아군 동료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다. 이 순간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시신 때문에 말발굽이 걸리는 것을 피하며 질주하는 것뿐이다.
그들 뇌리를 지배하는 돌격 명령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이곳을 넘어 저기,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적의 사지를 거친 말발굽 아래 짓이겨주는 것이다.
"마들라스, 바데 부대 선두 공격! 적을 쓸어버려라!! “
2. 전장의 열기
코네세타 군의 지휘관인 제크로웰은 차가운 눈빛으로 적의 대열에서 돌출되어 아군의 궁병대를 치고 들어오는 거한을 주시했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아온 거대한 몸집의 적의 분대장은 순식간에 활을 장전하려던 아군 병사의 심장에 창을 찔러 넣었고, 그 뒤에 있던 이를 말발굽으로 뭉개버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거침없이 창을 휘둘러 다른 병사들을 아군의 대열에 질러 박았다. 그런 거한의 분투에 힘입어 앞서 나온 세레즈 창기병 무리들이 아군의 궁병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칼날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지난번처럼 어중간하게 물러서지 않겠다는 건가. 예상했던 것보다 피해가 있겠는데.'
정면의 참상을 응시하던 제크로웰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는 가볍게 혀를 차며 검을 그러쥔 손을 힘차게 들어올렸다.
"궁수대 후퇴! 보병대로 전환, 세레즈의 공세를 막아라!! "
광분한 전장의 열기 속으로 제크로웰의 명령이 분대장들을 통해서 득달같이 전해진다. 물결이 갈라지듯 궁수 대열이 흩어지고 후미의 보병 대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친 듯 날뛰던 세레즈의 기병대도 공격의 흐름을 보병 군단에게 내주며 천천히 후미로 퇴각한다.
"엔체스터, 포테, 핸슨 부대 돌격! "
마치 그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분대장들의 지시에 맞춰, 흡사 견고한 벽을 연상케 하는 코네세타 군 보병대의 방진이 세레즈 보병 대열의 무리에게로 곧장 부딪쳐 갔다.
전장은 이내 적군 아군 가릴 것 없이 마구 섞인 혼전의 양상으로 바뀌어갔고, 드넓은 벌판에는 온통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양군의 함성이 먹먹한 전장의 소음 사이로 어지럽게 섞여 드는 가운데, 전쟁의 열기는 한층 더 맹렬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3. 관전
안타미젤은 세레즈 군 본진의 총사령관 막사 앞에 위치한 야트막한 둔덕 위에 서서 전방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상체를 약간 앞으로 기울인 채 전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양군의 접전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곁에는,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호위병에 직속 보좌로 명해 두었던 지원군 사령관과 그 참모장이 단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대치 상태에 있던 양군이 격돌하여 난전으로 빠져버리기까지 서너 시간 동안 줄곧 한 자리에 서 있었지만, 그는 눈앞의 전투 외에 다른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거대한 벽과도 같았던 아군의 대열이 적의 공격에 무참히 쓰러지고 있었다.
안타미젤은 힘없이 몇 걸음 앞으로 걸어나가 목책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처음 공격 시만 하더라도 전장의 흐름을 주도하며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아군의 병사들이, 지금은 마치 모래알처럼 허무하게 흩어져 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저 주먹을 말아 쥐며 통탄하는 것 외에는.
거리상 들릴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그의 귓가에 전장에서 병사들이 터트리는 헐떡거림과 신음, 그리고 분대장들의 질러대는 악다구니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목이 탄다. 지나친 긴장 때문인지 혀가 바짝 마른다. 대체 왜 나왔던 것일까. 애초에 보지 말았어야 했던 것을. 그는 목을 감싸고 있는 옷깃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기며 얼굴을 찡그렸다.
비록 세레즈 군의 총사령관 자리에 앉아 있긴 했지만, 출전 이후 지금까지 안타미젤이 전쟁에 대해 뭔가 경험한 것이 있다면, 그건 전투가 끝난 다음에 부상병들이 실려 가는 것을 스치듯 본 것뿐이다.
태자 아체프렌이 실종된 현 상태로는 차기 왕위 계승자로서의 부동에 위치에 서 있는 입장도 그렇거니와, 워낙 혈손이 귀한 왕가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그는 늘 부대 사령관들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겹겹이 둘러쳐 버린 보호막 속에 있어야만 했다. 그 스스로도 군사나 전쟁 문제에 무심한 탓도 있었고, 또 그 보호 속에 있는 것이 익숙해져 그는 전방에 나와 있으면서도 이제껏 단 한 번도 관전이라는 것을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오늘도 아마 뮤켄이 권하지 않았더라면 이렇듯 나와 볼 생각도 하지 않았으리라.
어쨌든 실제로 전투를 지켜본다는 것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참기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아군이 일방적으로 밀린다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올 때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안타미젤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더 이상은 참지 못할 것 같다. 그는 몸을 휙 돌렸다.
"어딜 가십니까?"
돌아선 자신의 뒤통수를 확 잡아당기는 듯한 목소리다. 안타미젤은 내키지 않은 몸짓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들어 올린 시선을 따라 간단한 보호대를 착용한 미드프레드의 상체 위로 가면처럼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보인다. 마노와도 같이 깊은 빛을 드리운 그의 눈동자가 가만히 안타미젤을 마주 본다. 잠깐의 시간차를 두고 굳게 다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떨어지고, 그 사이로 감정을 전혀 읽어낼 수 없는 억양 없는 목소리가 긴장된 공기를 뚫고 안타미젤에게 다가왔다.
"전하께서 출격을 허가한 부대입니다. 끝까지 지켜 보십시오. "
보기 싫어서, 아니 더 이상 지켜 볼 수가 없어서 이만 들어가려 한다는 그 말이, 어쩐 일인지 목소리를 통해 나오질 않는다. 안타미젤은 그저 힘없이 고개를 돌려 미드프레드 너머에 있는 뮤켄을 보았다. 눈길이 마주친 뮤켄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안타미젤은 아랫입술을 피가 배어 나오도록 꽉 깨물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결국, 이도 저도 전부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인가. 제멋대로 출격해 버린 부대 사령관들도, 저기서 죽어 가는 병사들마저도 전부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생명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걸까. 뭔가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이런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외면해 버렸다. 길게 이야기하기 싫어서 그냥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선택의 대가를 지금 자신이 아닌 저들이 치르고 있는 거다. 안타미젤의 창백한 얼굴에 일순 경련하는 듯한 웃음이 스쳐 갔다. 지금도 그렇다. 그저 보기 괴롭다는 이유 하나로 자신은 자리를 회피하려 들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안타미젤은 목책을 거세게 내리쳤다. 숙이고 있던 고개가 들려지고, 그의 메마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더이상 피해를 좌시할 수 없습니다. 엄호 부대를 보내서라도 나머지 병사들을 무사히 후퇴시키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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