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충각사(忠覺寺) (4)
- 웅성웅성.
법당 내의 분위기는 사찰의 총책임자인 건정(建程)대사와 강도진이 잠깐 나눈 대화로 인해 급속도로 냉각됐다.
만약 그의 이실직고가 사실이라 치면, 중앙대륙 최고 문파의 수제자, 아니 무림에 떠오른 신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인물이, 불가의 절학으로 적지 않은 살생을 포함한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 행적은 본 사찰에 누명과 오명까지 잔뜩 유발시키며 연이어진 사건이었이므로, 장내에 드리운 파장은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었다.
‘가만... 본인 스스로가 끝까지 숨기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감추고도 남았었을 터인데...’
다행히 건정대사는 그 오랜 연륜만큼 생각 역시 짧지 않았다. 또한 엎드려 사죄하는 강도진의 모습에서 다른 사연이 있음을 직감한 까닭이기도 했다.
'대체... 어이하여...'
솔직히 그는 무슨 꿍꿍이일까란 의심도 품었었다. 하지만 다른 명문세가들처럼 겉만 휘황찬란하거나 볼품 좋은 차림새로 거드름 피우는 것도 아니었거니와, 그의 차분한 어조나 눈빛은 겉과 속이 상이한 닳고 닳은 악인들의 그것과는 확실한 차이점이 있었던 터라, 그를 조금 더 지켜보며 판단키로 했다.
그렇게 얼마간 생각과 마음을 고르고 난 건정대사는 강도진을 향해 물었다.
“소승이 강 시주께서 본찰의 무공을 어떤 경로로 알게 되셨는지부터 묻고 싶습니다.”
“맹영단과... 긴한 인연이 있었습니다.”
“맹영단?! 허허... 맹연단이라니..."
건정대사의 표정이 기억하기도 싫은 허물을 문득 떠올린 죄인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세월이 그렇게나 더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그 과오의 잔재는 흐릿해질 기미가 도무지 보이질 않는군요.”
"...과오의 잔재라니요?"
이 말을 들은 강도진은 순간 감정이 울컥해졌다.
“주지스님. 제가 사죄하러 찾아뵌 자로써 주제넘게 드릴 이야기는 아니오나, 그들과 잠시 섞여 체감한 사람으로서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음...”
"맹영단을 과오의 잔재라 여기심은, 분명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과오'가 아닌, '새 삶'이었습니다.”
"......"
맹영단의 아이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며 마음 살짝 격앙된 강도진은, 거친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기 시작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밟아진 삶. 더 참기 힘들어 도망쳤지만 어김없이 수탈이 반복되는 삶. 그들 맹영단에게 있어서 14년 전 명지대사님과의 우연한 만남은 그렇게 가벼운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 인연은 괴로운 옛 굴레가 끊어지고 족쇄가 끊겨진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품게 된 희망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그런 삶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진중함이 얼마나 확고했는지, 주위 어느 누구도 쉬이 나서서 끊질 못했다.
“일찍이 ‘삼천위의 팔만세행(三千威儀 八萬細行)’이라는 말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가에선 엄격한 규율과 통제로 수행을 독려하는 것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대로 알지 못하면 공염불이다’란 격언도 압니다. 불경을 실제로 체득해본 적 없는 제가 이곳에서 왈가왈부할 수 없겠지요.”
“......”
“하지만... 하지만 화적패란 세간의 편견만으로! 단순히 그들을 지난날의 과오라 단정 지으심은! 진정... 옳지 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죄송합니다. 주제넘었습니다.”
“괜찮소이다. 강 시주.”
속내를 열 내서 시원히 털어냈지만, 그 반대급부로 주변의 공기가 좀 전보다 더 서먹서먹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이곳에 온 그였으므로, 장내의 눈치를 살짝 살피다가 더 늦기 전에 한세아가 귀띔해준 갈등 해결방안을 냉큼 꺼냈다.
“흠흠, 저는 오늘 의도치 않게 충각사에 오명을 씌운 일에 대하여 깊은 사죄를 드리러 왔습니다. 하오니 주지 스님께오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비록 하잘 것 없을지라도 일련의 값을 치르고 싶습니다.”
“...흠... 강 시주께서 이 늙은 중에게서 무엇을 승낙 받고자 하시는지요?”
“심득을 나누고자 합니다.”
“?!”
- 오오!
조화경에 이른 고수가 전하는 깨달음이라니! 장내 무승들 사이에선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술렁임이 불길처럼 일어나 활활 번졌다.
현재 여기 모인 모두가 다 아는 것처럼, 그 누가 강압하여 강도진에게서 억지로 받아내려는 반강제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이렇듯 조화경의 고수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선뜻 내놓는 것이라 한다면, 분명 수많은 고수들을 배출해온 유구한 역사를 지닌 충각사에 걸맞은 수준일 것임에도 틀림없을 터였다.
하지만 건정 스님을 비롯한 몇몇 고승들의 견해는, 순간 발발한 흥분과 번뇌에 젖은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흐음... 결코 만만히 생각해선 안 될 영악한 젊은이로다! 이는 필시 이해당사자들 간의 무공 교류란 상황을 만들어 그간의 행실들을 적당히 무마하려 함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세간의 이목마저 분산시키는 부가적인 이득도 챙길 목적일 터! 허허, 이런! 내가 사람을 깜박 잘못 봤었구나!’
고립된 귀마회 일원들을 구출코자 하는 강도진의 부차적인 계산을 제외하면, 이 접근방식 자체는 본래 강도진과 충각사와의 원만한 관계를 위한 한세아의 슬기였고, 순수한 화해법이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건정대사에 대한 귀마회의 살해위협과, 이로 인해 정신적으로 영향받은 주요 관계자들의 심리상태 등등이 덕지덕지 덧붙고 덩달아 어그러지다보니, 그의 의도 자체가 오해로 변질되는 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허면 강 시주께선 어떤 방법으로 심득을 나누고자 하십니까?”
내심 주지스님의 말투에서 경계심과 불쾌함이 듬뿍 묻어났지만, 이 눈치 없는 강도진은 ‘으레 내 잘못 때문에 그러려니’하고 한세아의 조언을 꿋꿋하게 실천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비무(比武)를 청하고자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강 시주께선 지금 저희에게 상당한 억지를 청하시는군요!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으나, 강 시주께오선 저희 노승들을 우롱치 마십시오!”
“아, 아닙니다! 우, 우롱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직설적으로 묻겠소이다! 우리들 중 어느 누가 천하제일인이라 불려도 과언이 아닐! 조화경에 이른 강 시주를 상대로 제대로 된 비무를 행할 수 있단 말이오리까?!”
강도진은 노기와 못마땅함이 큼직한 건더기로 녹아있는 건정 스님의 질문에, 무척 해맑고 담백하게 응답했다.
“항우대연 명지대사이십니다.”
“...커허어어음!!!”
- 웅성웅성.
오늘만 세 번째로 장내가 술렁거렸다.
* * * * *
술시정(戌時正, 20~21시) 수련관 외진 동굴.
- 또옥~. 똑! 또옥...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눅눅하게 떨어졌다. 어디서 이렇게도 물이 끊임없이 스며오는진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연신 바닥에 부딪치며 '퐁'하고 터지는 소리는 도무지 그칠 줄을 몰랐다.
경호도 마다하고 동굴 안에 홀로 들어선 건정대사는, 어느 지점에서 돌연 걸음을 멈추며 축축한 침묵을 깼다.
“오랜만이네.”
이에 횃불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벽을 응시하고 있던 그림자가 나지막이 응답해왔다.
“...예.”
“명지, 면벽 수행은 잠시 접으시게.”
“......”
“내 오늘은 자네의 고집을 꺾으러온 것이 아니야. 나도 옛날 옛적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애당초 내렸던 12년의 처벌을 꽉 채우고 나설 때까진 다시 만날 생각이 없었다네.”
"......"
수초 동안 침묵을 유지한 그림자가 이내 말을 걸어왔다.
“흠, 여느 북부 야만족이 나라의 경계를 침범하여, 불쌍한 중생들을 괴롭히기라도 했습니까?”
“그런 건 아닐세. 허나 본 사찰의 명예가 달린 일이야.”
“그럼 일 없습니다.”
“어허! 매우 중한 일이니, 얼굴부터 맞대고 마저 이야기함세! 당장 이리 나와 듣게나!”
명지대사는 주지스님의 단호한 불호령과도 같은 언성이 딱딱하게 떨어지고 나서야, 이윽고 벽면에서 몸을 틀었다.
그렇게 가부좌를 풀고 밝은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그의 모습은, 정말로 평범한 범인들과 궤를 달리했다.
6척이 넘는 장대한 기골과 귀밑부터 촘촘히 이어진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그 수염 못지않은 새카맣고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
만일 그가 걸치고 있는 거무튀튀한 색의 분소의 대신 땅땅한 갑주를 갖춰준다면 가히 대장군의 풍모였고, 혹 다색 의상을 적절히 입힌다면 사천왕문의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아이고, 형님’을 외치며 자리를 서둘러 비켜줄 법한 대단히 강렬한 인상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흠, 요 근래 혜국 백성들 사이에서 ‘살파랑’이라 불리는 자가 있네. 본 사찰의 절학으로 무차별적인 폭행과 여러 마찰을 숱하게 일삼았다지. 심지어 살인까지 심심찮게 범했다고도 들려왔다네.”
“그 자의 무공이 꽤나 대단한가 봅니다. 그런 놈 하나 혼쭐내자고 처벌 중인 제 손까지 빌리려 하시오니...”
“그는 현재 자네를 지명하여 비무를 청하고 있다네.”
“?”
명지 스님이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우뚱하자, 건정 스님은 즉각 한 마디를 덧붙여줬다.
“맹영단과의 연이 있는 자일세.”
“......”
“필시 자네가 남겼던 본찰의 무공을 익혔을 테지.”
이에 명지대사의 숯덩이 같은 눈썹이 크게 움찔했다.
“...그 사람이 불가의 무공으로 살인까지 저질렀다고 하셨습니까?”
“몇몇 세력이 주장하는 바로는 그렇다네.”
“...나무아미타불......”
짧은 탄식에서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아마도 근 6년 가까이 수감 생활하듯 이 동굴에 갇혀 지내면서,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단단한 심지에 몇 가닥 금이 생긴 듯 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사력을 다해 그자를 상대하게.”
“...제게 살생 저지르지 말라는 당부는 하지 않으시는군요. 무척 고강한 모양입니다.”
“아까 생원이 자네에게 귀띔해주라더군. 정녕 쉽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허허...”
모름지기 칠직 중 호법이라 함은, 일정 직위의 고승들을 제외한 가장 뛰어난 자만이 맡을 수 있는 직무를 뜻했다.
다시 말해 9천여 명의 무승들이 살아가는 충각사 내에서 열 손가락 서열 안에 드는 생원 스님이 주의를 준 것이므로, 명지대사조차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지난 몇 해의 수련을 통해 심득이 깊어지긴 했으되, 결코 가벼이 여겨선 안 되겠군.’
명지대사가 속으로 담담히 다짐을 하는 가운데, 건정대사가 향후일정을 말해주었다.
“비무는 이틀 후 사시초(巳時初, 09~10시)에 시작할걸세.”
“저는 지금이라도 관계없습니다.”
“나도 그랬네. 하지만 급작스럽게 찾아와 청하는 것이 무례할진데, 예고도 없이 곧바로 대련을 시작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며 한사코 다시 찾아오겠다하더군.”
“후훗, 의외로 아주 막돼먹은 중생은 아닌가봅니다.”
건정대사는 이런 명지대사의 후한 평가에 대해 반론을 강하게 제기했다.
“아니, 그리 오해해선 안 되네! 호의적인 태도로 우리 사찰과 교류함으로서, 그간 부렸던 말썽을 적당히 무마하여 덮으려는 수작으로 보이니까!”
“음... 주지스님. 그건 조금 과한 억측이 아닐...”
“내 지나친 억측이 아니야. 겨우 몇 시진도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곡성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이 이미 쫙 퍼졌다네. 누가 의도적으로 퍼트리고 다니지 않는 이상 어림없는 일이지!"
“......”
“벌써부터 숨어들어오는 염탐꾼들 덕분에, 지금 아주 난리도 아닐세. 귀마회 살수들이 이틈을 노려 흘러들어올 수 있다면서, 속가제자들까지 발 벗고 나선 상태야. 한낱 이 늙은이의 목숨이 뭐라고 그런 생고생들을 하는지 원...”
“......그렇군요.”
"사력을 다해도 좋네. 허니 절대 그 자에게 쉬이 밀리지 말아주게나!"
명지대사는 건정대사의 굉장히 강경한 태도를 받아드리며 굳건히 약속했다.
"알겠습니다."
- 작가의말
토요일은 2편, 일요일은 1편 연재를 고려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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