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피고 지다 (7)
* * * * *
이튿날 중앙궁 편전(便殿).
혜국 황제 목두환(睦斁歡)이 앉은 옥좌 양옆으로, 의정(議政)을 비롯한 중신들과 시종관들이 모두 도열해있었다.
상참이 시작된 지도 어느덧 2각이 넘었다. 혜국 목 황제는 대신들이 거의 매일 똑같이 반복되다시피 하는 가벼운 정사(政事)만을 언급해오자, 평소와 다름없이 이쯤에서 적당히 끊기로 했다.
“중요한 다른 안건은 없는가? 없다면 그럼 이만 상참을 마치도록 하지.”
이에 형조판서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신 이정한(伊停瀚), 폐하께 아뢸 것이 있나이다.”
“아, 그래. 내 그대에게 며칠 전 타국 황손들이 기거하는 궁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 처리하라 명했었던 게 기억나는군. 그래, 그 원흉을 찾았는가?”
“예, 그 원흉은 다름 아닌 세간에서 사룡방이라 일컬어지는 모리배 집단이었사옵니다.”
"뭐라? 모리배?"
목 황제의 인상이 일그러질 대로 와락 일그러졌다. 더불어 함께 이어진 짜증은 덤이었다.
“어찌 그딴 하찮은 것들이 짐의 안뜰을 마음대로 휘젖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들이 워낙 손속이 사나운 무림인들이 모인 조직인지라......”
- 탕!
답변이 구질구질한 핑계로 밖에 들리지 않는 목 황제는 의자를 강하게 내려치며 대노했다.
“그게 말이 될 성 싶은가?! 허면 짐의 정예 군사들의 수준이 그들보다 못함을! 내 당연하게 받아야 들어야 한단 말인가?!!!! 병판! 병판은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소, 송구하옵니다.”
엉겁결에 날벼락 맞은 병조판서가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자, 이조판서 감성무가 앞으로 나섰다.
“폐하. 폐하의 노여움은 지극히 당연하다 생각 되옵니다만, 우선 그 사룡방이라는 역적들부터 토벌하고, 진상조사를 명하심이 바른 순서가 아닐까 사료되옵니다.”
“진상...조사?”
“예! 아무리 생각 없는 무림인이라 한들, 지엄한 황제폐하께서 계신 궁에서 날뛰는 것이 대역죄임을 모를 리 없습니다. 틀림없이 다른 배후가 있으리라 믿어 의심 않사옵니다.”
“흐음......”
“만약 궁에 나하국과 내통한 자가 존재한다면, 이번 사태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됩니다.”
“그렇군. 그 말도 일리가 있어.”
“부디 역적들의 토벌과, 이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좋다."
- 땅!
그렇게 대쪽같은 기세로 결정 내린 목 황제는 옥좌의 손잡이를 가볍게 내리치며 선포했다.
“형판은 들으라.”
“예, 폐하.”
“그대에게 중앙군 7천을 맡기겠다. 가서 역도들을 모조리 처단하고, 배후에 누가 숨어있는지 명명백백히 밝혀내도록 하라!”
“예, 명 받들겠나이......”
형판이 대답을 마치기 직전, 단봉남이 성큼성큼 걸어나와서 장읍했다.
“신 단봉남. 황제폐하의 현명하신 처사에, 소신의 의견을 한줌 보태고자 하나이다.”
“좋소. 말해보시오, 장인.”
“토벌대의 지휘를 형판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기심이 어떨까 싶습니다.”
“?”
이 말에 목 황제는 당연히 의문을 띄웠고, 이조판서는 대뜸 끼어든 그에게 심한 불쾌함을 표출했다.
“이보시오, 향주자사! 그 무슨 말이오?! 폐하의 지엄하신 명을 받을어 이 사건의 원흉을 명명백백히 밝혀낸 형판보다, 토벌대 지휘에 더 적합한 자가 누가 있단 말이오리까?!”
단봉남은 이조판서의 말을 한쪽 귀로 흘리며 본인이 하고픈 말을 계속했다.
“폐하, 이 사태로 인해 타국 황손들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옵니다. 아무리 경계를 강화한다한들, 이미 돌아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기란 쉽지 않을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어허! 말을 삼가시오. 향주자사. 궁에는 엄연히 그 법도와 절차가 있는 법이...”
골치 아픈 문제를 덜어낼 방법이 있다는 이야기에 관심을 보인 목 황제는, 점점 흥분하기 시작한 이조판서의 말을 싹뚝 끊어냈다.
“아아, 잠시만! ...장인, 말씀 계속해보시오.”
“예, 하오니 이번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은사국과 일서국에게 토벌대의 지휘권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사료되옵니다. 그리하면 황제폐하의 넓은 아량을 엿보여줌과 동시에, 저들의 구겨진 체면을 어느 정도 회복시켜줄 수 있다고 보옵니다.”
“흠... 나쁘지 않은 생각이구려. 형판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연히 이조판서의 편에 설 것이라 생각했던 형판에게선, 의아하게도 예상과 조금 다른 답변이 들려왔다.
“폐하, 은사국 황손들은 나이가 너무 어려 고려대상이 아니옵니다. 하오나 무림에서도 최고수로서 이름이 오르내리는 일서국 연일위가 나서준다면......”
“그렇군. 여러모로 괜찮은 모양새가 되겠어. 좋아, 그리 행하도록 합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당초 계획이 살짝 비틀어지자, 왠지 모르게 뒷맛이 씁쓸해진 이조판서였다.
"끄응..."
* * * * *
10월 24일, 웅속산 사룡방 본거지.
혜국 황제의 명을 받들어 진군중인 7천여 병사들의 앞을 거대한 방벽이 가로막았다.
틀어 막힌 대문은 작은 성문을 방불케 했는데, 그것이 일전에 손다임이 반파시켰던 몇 개월 전과는 비교해선 안 될 정도로 대단히 견고해보였다.
- 또각, 또각, 또각. 푸드득-.
최선두에 선 진영후가 말 위에서 내려왔다. 그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그 뒤를 이어 강도진과 15명의 수하들도 내려와 몇 발자국 거리에 섰다.
그리고 참관인 자격으로 따라온 형판과 향주자사는 내리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을 따름이었다.
사룡방 궁수들이 포진한 방벽과는 약 40여장의 거리. 이윽고 진영후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원창.”
“네!”
“후미를 맡기겠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이에 대한 실수는 절대 용납치 않겠다.”
“예!!!”
“형판 대감.”
“마, 말씀하시오. 연일위.”
형판은 진영후의 위압감에 팍 기죽은지 오래였다.
“혜국 병사들에게 꼭 전해주십시오.”
“?”
“그 누구도. 제 곁 70장 안으로 들어와선 안 됩니다. 분명히 선을 그옵건대, 설령 이 말을 무시한 채 누가 피해를 입는다해도 전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을 겁니다.”
“바, 바로 전달하겠소이다. 하하.”
형판의 대답을 들은 진영후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강도진에게 향했다.
“야.”
“어? 왜?”
대답을 잠시 미룬 진영후가 타고 왔던 말을 향해 손을 뻗자, 매여 있던 길이만 해도 6척이 넘어 뵈는 언월도가 무섭게 훨훨 날아왔다.
- 부웅~, 텁!
“다 내 몫이다. 한 놈이라도 건들 생각은 아예 접어라.”
“......어, 음... 그, 그래. 물론이지! 그럴 마음도 없었다야. 하하.”
강도진은 그동안 진영후를 오래 알아보면서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묵직한 음성과 표정만으로도, 그 분노의 크기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이건... 부처가 와도 못 말린다.’
- 고오오오오오오......
사룡방 측을 묵묵히 응시하는 진영후를 중심으로 강기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무공을 모르는 이들조차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의 짙은 안개처럼 생겨난 강기다발은, 어느 순간 아무도 볼 수 없는 무형으로 화했다.
- 팟-!
그의 상체가 살짝 기우나싶더니만, 진형후의 신형이 빛살처럼 사라졌다.
이에 깜짝 놀란 형판과 향주자사가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피다 다시 발견했을 땐, 그는 이미 방벽 위에 높이 떠오른 상태였다.
- 쿠확-! 콰과쾅!!! 쩌저저저저저정!!!
섬광과 같은 일초식. 그 일격에 방벽 9할이 흔적도 없이 뜯겨져 나갔다.
“끄어어어어어...!”
이 한 방으로 즉사하지 못한 사룡방 일원들의 처참한 신음들이, 잔해들 여기저기 사이에서 난자했다. 그러나 진영후에게선 동정의 여지가 깨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 푸욱!
"꺼읔!"
자고로 가족이란 이름의 역린은 매우 크다. 잘못 건드리면 노약한 이조차 거품 물고 달려들거나, 10년을 하루 같이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헌데 태생이 무림인인 자가 분노하여 칼을 뽑았다면? 하물며 그 역린이 폭발한 인물이 뭇사람들이 칭송하는 묵경의 고수라 한다면?
그에 대한 훌륭한 예시가, 지금 이곳에서 기웃거리는 병사들에게 적나라하게 목격되어지고 있었다.
- 콰콰과과쾅-!!!
“어, 어서 도, 도망...! 으허억!”
“으아아아아악...!!!”
재해(災害). 결코 보통의 인간이 피우는 한낱 난리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진영후일 것으로 추정되는 인형이 우레처럼 번쩍번쩍 나타날 때마다, 사람은 물론이고 건물조차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쓸려나갔다.
홍수가 마을을 삼키듯, 태풍이 초막을 바숴버리듯, 대노한 묵경의 고수가 발출한 기운이 닿는 곳곳마다, 눈 씻고 둘러봐도 온전한 것은 단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예전 강도진이 명지대사와 기분 좋은 비무를 통해 뭉그러트렸던 산맥 풍경조차도, 이 흉측한 사태와 견주기 민망했다.
‘사, 사람이 아니야!’
향주자사 단봉남은 말에서 황급히 내려와, 놀란 군마와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무공을 깨작깨작 익혀봤다는 형조판서조차, 진영후가 경고했던 70장은 고사하고 100여장 이내로 발 디딜 엄두를 못 내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 ...(중략)... 기마군 1만6천, 보병 7만. 도합 12만의 병력이 간단히 뚫리고, 자신의 목으로 칼이 겨눠지매, 임금이 크게 탄식하다. 』
과거 은사국 초개왕과 황후 아르주나(Arjuna)의 첫 만남. 세간에 널리 퍼졌던 이 일화를 전해 듣자마자 코웃음 쳤던 단봉남이었다.
훗날 첩보를 통해 이것이 야사(野史)도 아닌, 실록에 떡하니 기록된 내용임을 우연히 접했을 적에도, 감찰부 관리에게 돈 받아먹고 헛소리 말라며 호통을 쳤던 그였다.
그러나 앞으로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는 민담·패설마저도 진지하게 귀 기울이게 될 것만 같았다.
‘무림 초고수의 무력은 일반상식과 그 궤를 달리한다더니... 그것이 정녕 사실이었다!'
경악에 경악을 더하던 단봉남의 머릿속에 문득 스치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가만...... 그럼... 저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허풍이 아니란 소리인데?! 허헉?!!!’
그의 시선이 진영후의 무지막지한 초식을 살피며, 혼잣말 중얼거리듯 감탄 중인 강도진에게로 향했다.
"캬햐~, 그냥 가루로 만드네~. 가루로 만들어!"
단봉남의 동공이 점점 휘둥그레지는 가운데, 한세아가 이전에 찾아와 귀띔해줬던 이야기가 마치 소름처럼 그의 오싹한 등골을 타고 자연히 떠올려졌다.
『 염려 마십시오. 천경의 고수께서 계시오니, 설사 일서국 연일위가 이성의 끈을 놓칠지라도 바로 잡아주실 겝니다. 』
"......"
천경의 고수. 단봉남과 황후 단영의가 떨떠름함과 언짢은 심기를 내비치며 협상내용을 조율하고자 했을 때, 한세아가 이에 응수하며 꺼낸 패였다.
단봉남은 한세아가 위협적인 서역의 제왕, 외조부인 구천혈제를 들먹이는 대신에, 나이 서른도 채 되지 않은 새파란 젊은이를 거론했을 당시에는 그게 뭔 대수라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저 압도적인 인간재해를 두고 다시금 되짚어보니, 한세아가 의도한 계산을 지레짐작할 수 있었다.
‘필시 힘을 과시한 것이다. 자신의 편에 붙으라는 거겠지. 그래, 저 정도 거물! 고금제일인의 자리를 위협하는 인물이라면, 아무리 잘 숨긴다고 해도 종국엔 드러나기 마련! 은사국 공주는 자신이 가진 패가 최고의 가치를 지닐 때 서둘러 꺼낸 것이다!’
그는 이미 한쪽으로 확 기울어진 저울질을 오래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기어코 협상내용을 문서로 적어 황후마마의 수결(手決)까지 받아갔으니, 어차피 달리 방도도 없다. 더욱이 천하제일고수를 이렇게 병풍삼았으니, 추후에 힘으로 억누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은사국 공주는 분명 이것을 시작으로, 나하국과의 경쟁이 과열된 어수선 이곳에서 기반을 다지려함이다! 후우... 이렇게 된 이상 우린 그저 은연중에만 돕는 수밖에. 은연중에만...’
- 피이이이익~! 파팡! 팡!
단봉남의 고심에 종지부라도 찍듯, 산중턱에서 신호탄 2개가 하늘높이 빵빵 터져올랐다.
그것은 후미를 담당하는 척 사룡방 본전으로 잠입한 진영후의 수하들이 쏘아올린 신호였다. 녹색과 청색. 그것들은 사룡방 대두령을 생포하고, 이조판서를 엮어낼 증거를 수집 완료했음을 뜻했다.
- 쿠과쾅-!!!
이로써 더욱 거칠게 없어진 진영후의 파괴력은, 방금 전보다 3배 이상 무시무시해졌다.
- 작가의말
흠... 이따금씩 너무 긴 장편을 기획하지 않았나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제 스스로 이야기가 늘어지는 걸 싫어해서 일부 장면을 삭제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ㅡ_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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